자본주의 세계의 토양을 이룬 무역과 문명교류
자본주의란 무엇일까? 단어 그대로의 뜻을 풀어 보자면, 자본, 즉 돈과 재화가 중심을 이루는 경제사상 또는 체제를 의미한다. 확실히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이 핵심적인 가치, 요소로 중요시되며, 단순히 돈이나 재화를 축적하는 수준을 넘어서 대량의 재화 생산을 통한 시장과 자본의 확대 재생산을 전제로 한다.
물론 자본주의는 그저 돈이나 재화의 축적이라는 키워드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약 1만 년 가량 전에 농업 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잉여생산물, 즉 재화는 곧 권력이었고, 인류는 재화, 그리고 돈을 축적하기 위해 전쟁과 무역, 상업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를 자본주의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학자들에 따라 여러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자본주의란 일반적으로 사유재산 제도와 경쟁을 전제로 하는 시장경제의 원리에 토대하며 재화의 생산 및 교환을 통한 자본의 축적과 재축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경제 사조나 체제 또는 이와 관련된 문화 등을 의미한다고 정의 내릴 수 있다(고원, 2012, 329-43). 아울러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축적과 재축적은, 자본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재화의 대량 생산과 이를 통한 시장경제의 유지 및 확대는, 자본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와 경제를 책임지는 대규모 산업시설과 기업체 등은 기본적으로 거대한 자본에 바탕을 둔 체제라는 성격을 가진다. 게다가 현대 자본주의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금융업은, 아주 뭉뚱그려 말하면 자본 그 자체가 자본을 낳고 확대 재생산하는 사업이라는 성격도 가진다. 이러한 점에서 고대 로마 등의 노예 경제, 중세 유럽의 봉건제 경제, 근대 초기의 중상주의 등은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갖고 있을 수는 있을지언정, 자본주의라고 규정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가 근대 이후 세계의 경제는 물론 정치, 사회, 문화까지 지배하는 일종의 세계체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성립하는 데 필요한 자본과 기술의 축적, 그리고 세계의 연결이라는 전제조건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나종일 외 역, 2001, 33-78쪽). 따라서 자본주의가 지구를 가로지르며 세계체제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이해하려면, 인류가 어떻게 먼 거리를 넘어 교류하며 문명과 경제를 발달해 갔는가에 대한 이해가 전제될 필요가 있다.
인류는 언제부터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과 무역을 하고 교류를 이어 왔을까? 무역의 역사는 생각 이상으로 오래된 일이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 평가받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미 고대부터 크레타섬을 중계지로 삼아 이집트, 키클라데스제도 등지와 해상 무역을 실시했으며, 이는 미노스 문명과 키클라데스 문명, 에게 문명을 거치며 서구 문명의 직접적인 토대를 형성하는 고대 그리스 문명의 형성과 발달로 이어졌다(Papakinos, 2020, p. 42). 말(馬), 수레바퀴 등 인류 문명의 핵심을 이루는 자원과 발명 역시 실크로드를 통한 유라시아의 문명 교류를 통해 전파되고 확산되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명저 “총, 균, 쇠”에서, 교역이 가능한 동서축을 가진 유라시아는 고대부터 무역과 문명교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바다, 사막, 열대우림 등 교역과 교류를 차단하는 자연환경 조건을 가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아메리카, 호주 등지에 비해 문명 발달을 훨씬 빠르게, 그러면서도 체계적으로 이루며 다른 대륙을 압도하는 힘을 기를 수 있었다고 논한 바 있다(김진준 역, 2012, 260-81쪽). 이는 교역과 문명교류가 문명의 발달에서 매우 큰 중요성을 가짐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그만큼 고대부터 그러한 활동이 이어져 왔음을 함의하기도 한다.
왜 인류는 고대부터 머나먼 땅과의 무역과 교류를 이어 왔을까? 물론 먼 곳에 대한 지적 호기심도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동기는 돈을 벌고 재화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다. 먼 땅에서만 구할 수 있는 진귀한 물자는 그 자체로 값비싼 재화이기도 했거니와, 경제 활동과 전쟁 수행 등 문명의 유지와 발전에 필요한 활동에도 필수적인 자원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유라시아 인류가 고대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활발하게 무역을 해 왔던 까닭, 가야가 일본에 철을 수출하며 번영했던 까닭 등은 바로 이러한 견지에서 해석할 수 있다. 스키타이, 흉노, 돌궐, 몽골 등의 유목민이 척박한 유라시아의 스텝 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면서도 인류사를 뒤흔든 거대한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까닭 역시, 이들이 태생적으로 막강한 기병 전사였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스텝 지대가 철광석이 풍부한 데다 유서 깊은 동서 교역로였던 덕분에 무역을 주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무역의 효과는 돈과 권력을 가져다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땅과 바다의 무역로를 통한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재화뿐만 아니라 사람의 교류도 함께 이루어졌다. 사람의 교류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사상과 기술, 문화의 교류가 뒤따름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다양한 생각과 아이디어, 기술, 문화가 교역로를 따라 전파되었고, 무역 과정에서 만난 다양한 사상과 문화는 서로 융합하면서 새로운 문화로 변화, 발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고대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실크로드를 통해 유일신교, 특히 페르시아의 주류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으며 대승불교로 분화한 뒤 동아시아로 전파되어 동아시아 문화권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3세기에 존재했던 불교국가 쿠샨 왕조의 영토가 인도 중북부뿐만 아니라 실크로드가 지나는 중앙아시아까지 지배한 데 따른 결과였다. 고대 헬레니즘 미술 양식이 석굴암 불상에 재현된 배경 역시, 고대부터 이어져 온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 교류의 산물이었다.
무역을 통한 다양한 재화와 자원, 그리고 기술과 문화의 교류는, 문명의 발달을 크게 촉진했다. 새로운 자원과 기술, 문화의 유입이 이루어지면서, 인류는 무역을 하지 않았다면 구할 수조차 없는 새로운 문명을 이룩하고 발전시켜 갈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서구 문명의 뿌리라고 여겨지는 고대 그리스 문명은, 그보다 앞서 번영한 미노스 문명과 키클라데스 문명이 지중해 무역을 통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선진적인 문명을 받아들이며 발전시켜 놓은 문명의 초석 위에서 형성되고 발달할 수 있었다(Papakinos, 2019, pp. 33-39). 10만 명이 넘는 대군을 거느렸던 대제국 잉카와 아스테카가 16세기 초반 수백 명에 불과한 에스파냐의 콘키스타도르에게 무너진 까닭에는, 이들 문명이 지리적 이유로 인해 유라시아의 문명만큼 외부와의 무역과 교류를 하지 못한 탓에 특히 군사기술 측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문명과 기술의 발전이 지체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김진준 역, 2012, 525-55쪽).
한편으로 바다와 땅을 통한 교역로는 막대한 이익을 선사하는 원천이었기 때문에, 실크로드를 비롯한 유라시아의 주요 무역로는 전쟁을 불러오는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난 포에니 전쟁은, 지중해 무역권 쟁탈전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한 무제는 유라시아의 실크로드를 지배하며 동서 교역로를 장악했던 숙적 흉노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부하 장건을 시켜 실크로드의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게 했고, 그 덕에 무제는 이전까지 한나라의 숙적으로 군림하던 흉노를 서쪽으로 몰아내고 한나라의 위세를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십자군 전쟁 역시 명분은 성지 탈환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지중해 무역을 둘러싼 유럽과 이슬람 세력 간의 투쟁이라는 성격도 자리 잡고 있었다. 이처럼 문명의 교류와 재화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길과 공간은 문명과 제국 간의 쟁탈전과 전쟁의 대상이 되는 일도 잦았고, 그 결과는 참혹한 살육, 파괴와 더불어 문명의 영역과 세계지도의 재편까지도 불러왔다. 예컨대 포에니 전쟁은 지중해를 로마, 나아가 유럽 문화권의 바다로 만들었고, 한 무제의 흉노 원정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영역을 공고히 다지는 결과를 빚었다.
심지어 파괴적이고 야만적인 행위인 전쟁이 역설적으로 무역과 문명 교류, 문명의 발달을 촉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례로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전쟁은 찬란한 헬레니즘 문화의 꽃이 피게 만들었다. 각각 서쪽과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던 당나라와 우마이야 왕조가 충돌하며 빚어진 탈라스 전투(751)에서 우마이야 왕조는 포로로 잡은 당나라 기술자를 통해 제지술을 습득했고,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제지술이 중앙아시아에서 아랍을 거쳐 유럽까지 전파되면서 이슬람과 유럽 문화권의 학문과 문화는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전쟁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잔혹하고 파괴적인 행위였지만, 역설적으로 전쟁의 결과가 문명의 교류와 융합, 발전을 촉진한 측면도 있었던 셈이다.
13세기에 이루어진 몽골 제국의 대두는, 그전부터 꾸준히 발전해 오던 유라시아 문명의 교류와 발전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세계제국이 등장함에 따라, 유라시아의 동쪽과 서쪽 지역 사이의 교류와 왕래, 교역이 눈에 띄게 활발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 제국은 흔히들 무적에 가까운 강대한 군사력과 더불어, 정복 과정에서 수많은 학살과 파괴 행위를 자행한 잔혹한 제국으로도 알려져 있다. 분명 그들은 저항하는 적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으며, 몽골 제국에게 초토화된 도시와 잔혹하게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잔혹하고 파괴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그들은 그들의 항복 권고를 받아들인 적에게는 어느 정도의 관용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풍습과 문화, 종교도 상당 부분 용인했다. 피정복민의 우수한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이는 유연함도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몽골 제국의 무차별적인 파괴와 살육, 잔혹행위는 주로 정복전쟁 초기에 이루어졌고, 제국의 기틀이 잡힌 뒤에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행위 대신 피정복민들도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통치를 해 나갔다.
세계제국 몽골 제국에서는 상업과 장거리 무역이 눈에 띄게 번성했다. 수많은 세력이 각축전을 벌이던 실크로드의 스텝로와 오아시스로가 몽골 제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치안이 크게 개선된 덕분이었다. 몽골인들은 당해낼 군대가 없는 천하무적의 기병 전사였지만, 실크로드의 동서 교역을 주관하던 이들이기도 했기에 무역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안목 또한 뛰어났다. 애초에 칭기즈 칸이 세계 정복에 나선 계기는, 몽골의 실크로드 교역로를 가로막는 서쪽의 이슬람 왕조 호라즘 제국을 토벌하기 위한 원정이었다. 그런 몽골 제국 치하에서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은 더한층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고, 수많은 무역 중계지는 큰 도시로 발전하며 번영을 누렸다. 잔혹하기 짝이 없는 전쟁으로 세워진 몽골 제국이 역설적으로 실크로드의 평온과 유라시아의 번영을 가져왔으니,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몽골 제국 안정기의 평화와 번영을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즉 몽골에 의한 평화가 도래한 시대라고 이름 붙였다.
무역의 활성화는 자연히 문화적인 교류까지 증진했다. 몽골 제국의 지배 아래 안전해지고 효율성이 증대한 교역로를 따라 재화는 물론 사람의 이동 또한 한층 활발히 일어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무역상과 사신뿐만 아니라, 머나먼 땅의 모습을 살펴보고 기록하려는 학자들도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여행길에 올랐다. 이븐 바투타(Ibn Battuta, 1304-1368), 라시드 웃 딘(Rashid-al-Din Hamadani (1247–1318)), 랍반 사우마(Rabban Bar Sauma, 1220-1294), 플라노 드 카르피니(Giovanni da Pian del Carpine, 1185-1252), 기욤 드 뤼브룩(Guillaume de Rubrouck, 1220-1293)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원나라에서도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라는 세계지도를 편찬하였다. 그러면서 유럽의 세계지도에는 동아시아가, 동아시아의 세계지도에는 유럽과 아프리카가 표현되기 시작했다.
문화적인 교류의 증진과 지리 지식의 확대는 무역에 대한 열망을 더한층 촉진했다. 머나먼 땅의 진귀한 재화는 일확천금의 기회를 가져다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무역상 출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오늘날에는 그 진위와 신빙성에 많은 의문이 있다고 비판받는 《동방견문록》이지만, 일본에 황금이 널려 있다는 등 머나먼 동아시아의 부와 풍요를 서술한 이 책은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는 동아시아의와의 교류와 무역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는 데 성공했다(김호동, 2010).
유사 이래 땅과 바다를 통해 이어져 온 무역과 교류는, 재화와 자원, 기술과 문화가 공간을 넘어 확산하는 결과를 불러오며 인류 문명의 발전을 견인했다. 지리적 공간을 넘나드는 무역과 교류 덕분에 세계, 특히 유라시아 각 지역은 물질적 부는 물론 기술과 정신문화까지 축적할 수 있었다. 수많은 연구자들은 이미 근대 이전에 자본주의의 맹아가 자라고 있었다거나, 세계-최소한 세계의 일부라도-가 거대한 경제 체제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논의를 제기해 오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 세계를 온전히 아우른 것은 아니었고, 근대적인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아우르는 단계에 이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팍스 몽골리카는 황금 쟁반을 머리에 인 여인이 세상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을 정도의 평화와 부를 누렸다고도 은유되지만(김호동 외 역, 1998, 366), 설령 그 은유가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 ‘황금 쟁반을 머리에 인 여인’은 유라시아의 동서 쪽 끝 바다 너머에 있는 땅을 알 턱이 없었다. 대서양과 태평양, 인도양 너머의 거대한 대륙은 아직 유라시아와 뱃길을 통해 온전히 연결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무렵까지의 무역과 경제활동은 분명 문명의 발달에 많은 기여를 했지만,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펼쳐질 정도의 규모에 미쳤다고 보기는 어려운 수준이었다. 무역을 통해 이루어진 재화의 소비와 유통은 대부분 특권층 위주로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민중은 농업이나 유목 등을 통해 자급자족하는 생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아울러 자본주의 경제의 중요한 축을 차지하는 금융업의 발달 역시, 이 무렵까지는 아직은 충분히 무르익은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금융업과 무역, 시장경제가 더한층 발달해서 자본주의의 서막을 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 기원을 계속해서 거슬러올라가자면, 이는 인류 문명이 이룩된 이래 이루어진 인류의 무역과 산업 활동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계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직접적인 계기는, 장거리 항해와 해양 무역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 신항로의 개척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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