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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Dec 15. 2022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서막, 신항로의 개척

   인류는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문화와 기술을 교류하며 문명 발달을 이어 왔다. 그러는 가운데 수많은 도시들이 무역을 중계하며 발전하고 번영했다. 팍스 몽골리카는 이 같은 유라시아의 무역과 교류를 더한층 촉진했고, 그 덕분에 유라시아의 경제는 더한층 발전했으며 무역을 중계하던 도시들 또한 더 큰 번영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팍스 몽골리카가 끝난 뒤 오스만 제국이 또 다른 세계제국으로 대두하면서, 유라시아의 동서 교역은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2천 년이 넘도록 이어져 온 동로마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으로 거듭난 오스만 제국은, 몽골 제국과 달리 유럽과 아시아의 교역을 차단했다. 그 이유는 오스만 제국이 몽골 제국과 달리 종교에 대한 관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려는 의도에 있었다. 이를 위해 오스만 제국은 이교도이자 지중해의 숙적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을 잡았다. 실크로드의 육상 교통로를 장악함으로써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무역을 통한 막대한 부를 독점하고, 지중해를 통해 오스만 제국과 유럽을 잇는 무역로에서 나오는 이윤은 베네치아가 가져간다는 발상이었다.

15-6세기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는 유라시아 동서 교역을 독점했다.(https://url.kr/ilo8fa)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가 아시아와의 무역을 독점하니, 유럽의 여러 도시와 국가들은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두 나라가 아시아와의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니 무역 수지는 확연히 나빠졌고, 그렇다고 무역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물론 실크로드에는 바닷길도 있었지만, 유럽 입장에서 이를 이용할 수는 없었다. 바닷길이 인도양을 통해 인도와 아시아를 연결하다 보니, 유럽은 지리적으로 바닷길에 접근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무역로를 찾아야 할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다른 무역로는 어디에서 찾아야 했을까? 오스만 제국이 땅을 가로막고 베네치아가 지중해 무역로를 독점하니, 남은 공간은 바로 대서양이었다. 신항로의 개척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유럽인들은 대서양을 따라 유럽 역내의 무역을 진행해 왔다. 대서양을 통한 무역 자체는 유럽인에게 새로울 것이 없는 일이었지만, 중요한 점은 방향이었다. 대서양의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항로를 돌려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와 아시아로 이어지는 해상 무역로를 개척한다면,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무역을 행할 수 있을 테니까. 새로운 무역로를 얻는다면 막대한 경제적 이윤을 얻음은 물론, 동쪽에서 하루가 다르게 세력을 키우며 유럽 세계를 위협하는 오스만 제국 또한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을 터였다.


  새로운 해상 무역로의 개척을 선도한 나라는 유럽의 남동쪽 끝에 위치한 포르투갈이었다.  11세기에 형성된 포르투갈은 15세기에 이르러 오늘날의 영토를 대부분 확보했고, 유럽에서도 무시 못할 강국으로 대두해 있었다. 그 과정에서 포르투갈은 이베리아반도에 7백 년 동안 진출했던 이슬람 세력과 레콩키스타라 불리는 지난한 전쟁을 이어 갔고, 포르투갈군, 특히 군대의 중추를 이루었던 귀족층은 실전 경험을 축적할 대로 축적해 둔 터였다.  한편으로 대서양과 지중해를 잇는 관문에 위치한 포르투갈은, 그 지리적 이점을 살려 중북부 유럽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무역의 중계지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 과정에서 포르투갈에서는 상공업자 계층이 크게 성장했고, 그러면서 귀족, 특히 하급 귀족들은 무슬림과의 전쟁에서 세운 전공과는 별도로 평민이지만 부를 축적한 상공업자들의 세력에 눌리기도 했다. 15세기 말에 접어들어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사실상 세력을 잃고 레콩키스타가 종식되면서, 포르투갈에는 외부로 그 힘을 배출해야 할 환경이 무르익었다. 무역을 통해 세력을 키운 상공업자들은 자신들의 부와 이권을 더욱 확충하려 했고, 싸움에는 이골이 난 한편으로 상공업자들의 대두에 위축된 하급 귀족들은 그들대로 부와 권력, 명예를 거머쥘 필요성이 절실했으니까(주경철, 2008).

  포르투갈의 힘은 어디를 향해야 했을까?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이면서 포르투갈보다 국력이 강했던 인접국 에스파냐로 뻗어갈 수는 없었다. 베네치아라는 해양 강국이 버티고 있는 데다 지리적인 접근성이 떨어지는 지중해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서양을 따라 중북부 유럽으로 이어지는 항로 또한 이미 포르투갈이 활용해 온 무역로였을 뿐더러, 이 쪽 방면으로도 프랑스, 영국, 신성 로마 제국 등 쟁쟁한 강국들이 버티고 있었다. 포르투갈이 외부로 뻗어갈 방향은 두 곳이었다. 한 곳은 지브롤터해협 너머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권인 모로코였고, 다른 한쪽은 인도, 아시아와 이어질 대서양 남쪽으로의 항로였다. 때마침 포르투갈은 1415년 지브롤터해협 너머의 세우타를 점령해 둔 터였다. 북아프리카로, 아니면 대서양 남쪽으로 진출할 지정학적 조건을 확보한 셈이었다.

  15세기부터 국가 주도 아래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포르투갈의 신항로 개척은 성공을 거두었다. 항해왕자 엔히크(Henrique, o Navegador, 1394~1460), 희망봉의 발견자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 1450?~1500) 등과 같은 선구자들의 의지와 노력, 능력도 대단했지만, 이 무렵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의 지정학적 질서도 포르투갈을 도왔다. 오스만 제국은 바다가 아닌 아시아 방향의 대륙으로 눈을 돌려 페르시아의 사파비 제국과 경쟁하고 있었고, 북방의 기마 유목민과 대치하던 명나라는 해금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인도를 통일한 강대한 무굴 제국은 1526년에야 등장했고, 포르투갈이 개척하는 항로를 가로막은 나라는 제후국이나 토후국 정도에 불과했다. 심지어 사파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신항로 개척을 돕기까지 했다. 게다가 인도양과 동남아시아는 유럽 등 다른 지역, 해역과 이어지지 않았을 뿐, 현지 토착 세력이 이미 오랫동안 해상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포르투갈은 강력한 적의 방해를 받기는커녕 사파비 제국이라는 또 다른 강국의 도움까지 받아 가면서, 이미 해상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던 인도양과 동남아시아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주경철, 2009).

  1488년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뱃길을 개척하는 데 성공한 포르투갈은, 15세기에 접어들어 토후국이 다스리고 있던 호르무즈, 고아를 비롯한 인도 서부의 주요 항구, 실론섬 일부 등을 무력으로 정복한 다음 명나라와 일본에까지 진출했다. 해금 정책을 시행하던 명나라는 포르투갈과 공식적인 외교 및 무역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포르투갈은 명나라의 지방 관리와 유지들을 회유하여 15세기 중, 후반에는 마카오를 임차하는 데 성공했다. 해금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는 했지만 명나라 역시 해외 무역에 대한 수요가 있었기에,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해외 무역 거점으로 오랫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명나라와는 달리 일본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은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전란이 끊이지 않던 전국시대(戰國時代) 일본의 다이묘(大名)들이,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과 포르투갈의 우수한 무기를 노려 포르투갈과의 교역에 적극 나섰기 때문이다(Tremml-Werner, 2015). 이 과정에서 화승총, 서양식 갑주, 카스텔라, 덴뿌라 등의 서구 문물이 일본에 전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이 일본에 전래되기까지 하였다.

  16세기 포르투갈은 유럽과 아시아의 해상 무역로를 아우르는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인도와 아시아에서 얻은 진귀한 물자, 특히 향신료는 포르투갈에 막대한 부를 안겨 주었다. 13-4세기의 팍스 몽골리카가 실크로드를 통해 유라시아를 하나로 이었다면, 16세기에는 포르투갈에 의해 유라시아가 다시금 바닷길로 이어진 셈이었다.


  포르투갈에 이어 신항로 개척에 나선 나라는, 마찬가지로 1492년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축출한 뒤 통일 국가로 거듭난 에스파냐였다.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돌아 인도와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신항로를 개척했다면, 에스파냐의 신항로는 대서양 너머로 향했다. 포르투갈과 마찬가지로 수백 년이 넘도록 이슬람 세력과 기나긴 투쟁을 이어 왔던 에스파냐는, 유럽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군사력을 갖춘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포르투갈과 마찬가지로, 에스파냐 역시 바다로 뻗어나갈 에너지가 충만한 터였다.

  포르투갈이 동쪽으로 가는 항로 개척에 열을 올리던 1492년, 에스파냐 왕실은 지구 구형설에 따라 서쪽으로 계속 배를 몰고 가면 인도와 연결되는 뱃길을 개척할 수 있다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0-1507)의 항해를 지원했다. 콜럼버스는 인도와 바로 이어지는 항로를 개척하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신대륙 아메리카를 에스파냐에 선사했다.

  에스파냐인들은 일확천금의 기회를 노리며 신대륙으로 향했다. 마침 그곳에는 잉카와 아스테카라는 대제국이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이 두 제국은 건축, 농업, 귀금속 가공 등의 수준이 매우 뛰어났지만, 군사기술은 석기시대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데다 천연두 등의 전염병에 대한 저항력도 없었다. 이 때문에 각각 10만 명에 달했던 아스테카와 잉카의 대군은 철제 무기와 갑주, 총포, 군마로 무장한 수백 명의 에스파냐 콘키스타도르들의 침략을 당해 내지 못했고, 뒤이어 수많은 아스테카인과 잉카인이 천연두에 쓰러지는 바람에 두 제국은 몰락하고 말았다(재레드 다이아몬드 저, 김진준 역, 2012). 에스파냐는 1521년 신대륙에 누에바에스파냐(Nueva España: ‘새로운 에스파냐’라는 뜻)라는 거대한 식민지를 세웠다. 에스파냐는 포르투갈보다 인구가 월등히 많았던 데다, 아스테카와 잉카가 에스파냐의 침략을 당해 내지 못하고 쓰러지는 바람에 주요 거점을 점과 선처럼 잇는 식으로 해상무역을 전개했던 포르투갈과 달리 그처럼 거대한 해외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주경철, 2008).  

 누에바에스파냐에는 향신료는 없었지만, 막대한 양의 금, 은, 주석이 매장되어 있었다. 즉, 규모만 거대한 식민지가 아니라 향신료 이상으로 거대한 부를 에스파냐에 안겨준 신천지였던 셈이다. 수많은 에스파냐인들이 부와 새로운 삶터를 찾아 누에바에스파냐로, 신대륙으로 향했다. 이곳의 무역항과 교통의 요지, 그리고 광산지대에는 인구가 수만~십수만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규모의 대도시가 세워졌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못지않은 부의 원천인 신대륙을 손에 넣은 에스파냐는 일약 유럽 최강국으로 대두했다.

  에스파냐는 신대륙에 만족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과 동남아시아로 진출했듯이, 에스파냐 왕실은 1419년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을 후원하여 신대륙의 남단을 돌아 동남아시아와 인도로 향하는 뱃길을 개척하게 했다. 5척으로 구성된 선단을 지휘한 마젤란은 천신만고 끝에 태평양을 횡단하여 동남아시아의 어느 군도(群島)에 도착했지만, 현지 주만과의 다툼 끝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1522년 18명의 생존자를 태운 고작 한 척의 배가 간신히 에스파냐에 도착했지만, 그들이 싣고 온 향신료를 처분하니 항해에 든 비용을 훨씬 상회하는 큰 이익이 났다. 1565년 에스파냐는 마젤란이 발견한 군도를 식민지로 삼고, 국왕 펠리페 2세(Felipe II de España, 1527~98, 재위 1556~98)의 이름을 따 필리피나스(Filipinas) 명명했다. 필리피나스의 영어식 표기가 바로 우리가 아는 필리핀(Philippines)이다. 이로써 에스파냐는 유럽, 남북 아메리카, 아시아의 네 대륙에 걸친 대제국으로 거듭났다. 아직까지 유럽인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호주를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대륙에 영토를 가진, 문제 그대로 세계제국이었다.

1570년대 에스파냐(주황)와 포르투갈(녹색)의 판도.(https://www.britishempire.co.uk/maproom/spainportugalmap.htm)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신항로 개척은, 그저 새로운 땅을 발견한다거나 이베리아반도의 두 왕국이 광대한 해외 영토를 거느린 거대한 제국으로 대두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이는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이 이어지며 활발하게 무역 활동을 했던 팍스 몽골리카와도 차별화되는 의미를 갖는 지구사적 대전환이었다.

  우선 신항로의 개척을 통해 유럽에 유입된 향신료와 귀금속은, 유럽 경제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활기를 불어넣었다. 신항로의 개척 이전 같으면 쉽게 찾아보기도 힘들었을 귀금속, 그리고 당대 최대의 고부가가치 상품인 향신료가 유럽으로 대거 유입되니, 유럽에서는 경제적으로 큰 호황이 일어났다. 일확천금의 꿈을 찾아 배에 몸을 싣고 대양으로 향하는 이들도 늘었지만, 이와 더불어 유럽의 경제 규모 역시 커지기 시작했다.

  신대륙으로부터 유입된 귀금속, 특히 은은 유럽과 세계의 경제 체제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은은 단순히 값비싼 귀금속 정도를 넘어, 교환 수단으로써의 가치가 매우 높은 재화였기 때문이다. 은 자체도 훌륭한 교환 수단이었을뿐더러, 15~6세기에는 세계 각지에서 은화가 화폐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가치만으로 따지면 금이 훨씬 뛰어나지만, 너무 비싼 금과 달리 은은 무역을 위한 지불 수단, 화폐로 통용되기에 적절한 가치를 갖고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 은화는 화폐로 통용되었기 때문에 은의 수요는 급증했고, 15세기에 이르러 유럽에서는 은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바람에 은광 개발 붐이 일 정도였다(Borges et al. 2018, 454). 그런 유럽에 신대륙의 은이 대거 유입되면서, 유럽인들은 풍부해진 은으로 질 좋은 은화를 대거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유럽의 경제규모가 커짐은 물론, 물물교환 경제가 아닌 화폐경제가 더한층 저변을 확대해 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누에바에스파냐의 은광도시 포토시(오늘날 볼리비아 포토시)는, 막대한 은을 생산하며 16세기 세계 해상무역 네트워크 형성에 크게 이바지했다.(영문 위키피디아 Potosi 항목)

  신대륙으로부터 이루어진 은의 유입은 유럽의 경제, 사회체제만을 바꾼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에서 통하는 귀금속인 은은 일종의 기축통화와도 같은 구실을 할 수 있었다. 기존에 유럽에서 채굴되는 은의 양을 훨씬 뛰어넘는 은이 유입된 덕분에, 유럽인들은 은을 활용하여 한층 효과적으로 해외 무역을 해나갈 수 있었다. 16세기 중, 후반에 이르러,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상인들은 유럽과 아시아, 신대륙을 잇는 세계적인 무역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카락, 나오, 갤리온 등의 대형 무장상선은 실크로드의 카라반보다도 한층 효율적으로 재화를 멀리  떨어진 항구까지 운반할 수 있었고,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상인들은 은을 활용해서 머나먼 동아시아와도 매우 효과적으로 교역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이 가져온 진기하고 유용한 재화 자체도 매력적이었지만, 그들이 지불한 은의 매력은 그 이상이었다. 아시아의 권력자, 부호, 상인 등은 진귀한 재화와 가치 높은 은을 얻기 위해 에스파냐, 포르투갈 상인들과의 교역에 나섰다. 포르투갈이 명나라로부터 마카오를 임차하는 데 성공하고 에스파냐와 더불어 일본에 로마 가톨릭을 전파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신대륙의 은이 아시아에까지 대거 유입됨에 따라, 이들 지역의 무역과 경제 활동 또한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오랫동안 해금 정책을 펴 오던 명나라와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빠져 있던 일본의 권력자들과 상인들 역시 은의 맛을 보면서 무역활동에 한층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여담으로 이 과정에서 어그러진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질서는,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국제전으로까지 비화하게 된다(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센터 기획, 정두희‧이경순 엮음, 2010).

16세기 에스파냐(백)와 포르투갈(청)에 의해 이루어진 은의 세계적 유통 경로

  이렇게 해서 16세기 세계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형성한 거대한 해상무역 네트워크로 연결되기에 이른다. 이를 세계화의 효시로 간주하는 학자들도 있을 정도이다(Flynn and Giraldez, 2008, 360-62). 그리고 이러한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로 퍼져간 은은 무역과 경제활동을 활성화했을 뿐만 아니라, 화폐경제의 발달도 촉진했다. 나아가 은의 확산이 이루어지면서 노동력의 대가를 현물이 아닌 은, 즉 화폐로 지불하는 경향도 커져 났다(Broadberry and Gupta, 2006).

   요컨대 15~6세기 신항로의 개척은 세계를 하나로 묶으며 장거리 해상무역을 활성화하고 세계 경제의 규모를 키웠을 뿐만 아니라, 화폐경제의 토대까지 다져 놓았다. 즉,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의 지중해 무역 독점을 타파하고 새로운 교역로를 찾아 배를 띄우며 시작된 포르투갈, 에스파냐의 신항로 개척은, 경제규모의 확대와 화폐경제의 발달, 전 세계를 잇는 해상무역 네트워크라는 세계 경제 체제의 일대 혁신을 불러왔다. 이 같은 16세기의 변화와 혁신을 현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등장하는 데 중대한 밑거름을 다졌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16세기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후발 주자인 영국과 네덜란드에 해양제국의 위상을 내주었다. 이들 신흥 해양제국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양무역을 관리, 경영하면서, 선배 해양제국과는 차별화되는 새로운 경제 제도와 체제를 건설하게 된다. 해양제국의 세대교체는, 세계가 현대적인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통합되는 단계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결과로 이어진 셈이다.


참고문헌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센터 기획, 정두희‧이경순 엮음, 2010,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휴머니스트.

재레드 다이아몬드 저, 김진준 역, 2012, 총, 균, 쇠, 문학사상사.

주경철, 2008, 대항해시대, 서울대학교 출판부.

주경철, 2019, 문명과 바다: 바다에서 만들어진 근대, 산처럼.

Broadberry, S., and Gupta, B. 2006. The early modern great divergence: Wages, prices and economic development in Europe and Asia, 1500-1800. Economic History Review, 59(1), 2-31.

Borges, R., Silva, R. J. C., Alves, L. C., Araújo, M. F., Candeias, A., Corregidor, V., and Viera, J. 2018. European silver source from the 15th to the 17th century: The influx of "New World" silver in Portugese currency. Heritage, 1, 453-467.

Moisés, R. P. 2005. The rise of Spanish Real. Sigma: Journal of Political and International Studies, 23(5), 69-89.

Tremml-Werner, B. 2015. Spain, China, and Japan in Manila, 1571-1644: Local Comparisons and Global Connections. Amsterdam: Amsterdam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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