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인 주식회사와 보험업의 발달이 불러온, 시장과 경제, 재정의 변혁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베니스의 상인』에서 주인공이자 무역 선단의 대표인 안토니오는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거액의 빚을 져 심장의 살점이 도려내질 위기에 처했다가, 계약서에는 살점만 도려낸다고 명시되어 있으니 피가 한 방울이라도 흐른다면 샤일록을 살인죄로 엄벌하겠다는 재치 있는 판결 덕분에 목숨을 건진다. 그런데 왜 안토니오는 거액의 빚을 갚지 못해 자신이 평소에 멸시하던 샤일록에게 목숨을 잃을 위기에까지 처했을까? 안토니오는 애초에 샤일록에게 진 빚을 충분히 갚을 능력을 가진 재력가였지만, 그의 상단이 폭풍을 만나 모두 침몰하는 바람에 재산에 큰 타격을 입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궁지에까지 몰렸던 것이었다. 물론 작품 말미에서는 전멸한 줄 알았던 안토니오의 선단이 뒤늦게, 하지만 무사히 귀환하며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뒤집어 살펴보면, 안토니오 같은 베네치아에서도 알아주는 재력가조차 해난 사고를 당하면 전재산을 잃고 빚쟁이에게 쫓기는 신세로 전락함을 알 수 있다. 무역 선단을 운영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들며, 만일 선단이 폭풍이나 해적을 만나거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화물 비용은 물론 선박을 건조, 운영하고 선원을 모집하는 데 들어간 자금마저 고스란히 날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선주는 하루아침에 파산하고 패가망신할 수밖에 없다. 먼 거리를 오가는 원양 무역의 경우 이러한 위험성은 더한층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가 거듭되면 선주들의 운명은 물론, 나아가서는 국가경제에까지 중대한 위협을 주게 된다.
신항로의 개척을 선도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17세기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며 후발 주자인 영국, 네덜란드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해외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었지만, 유입된 부를 국가경제의 활성화와 국력 신장으로 이어 가는데 중대한 한계를 보였기 때문이다. 우선 애초부터 인구가 많지 않았던 포르투갈은, 수많은 청년층 인구가 부를 찾아 해외로 유출되면서 국내 산업 발전이나 군사력 강화에 오히려 차질을 빚었다. 그러던 가운데 1580년 야심가였던 국왕 세바스티앙 1세(Sebastião I, 1554-78, 재위 1557-78)가 모로코 원정 중 후사도 남기지 못한 채 전사하자,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그가 에스파냐 왕실과 외가 쪽의 혈연관계가 있다는 구실로 포르투갈의 왕위에 올라 포르투갈을 병합해 버렸다. 포르투갈은 1668년 영국의 도움을 받아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했지만, 그 뒤에는 원양 무역을 선도하는 해상 제국의 위상을 되찾지 못했다.
에스파냐는 포르투갈보다는 인구도 많고 더 강대했지만, 내부적인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에스파냐의 최전성기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펠리페 2세는 재위기간 동안 제노바 등지의 은행으로부터 에스파냐 GDP의 60%에 달하는 부채를 끌어다 쓴 정도를 넘어, 무려 4차례에 걸쳐 부채 지불 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하기까지 했다(Drelichman and Voth, 2011, p. 1205). 신대륙으로부터 유입된 막대한 자금을, 유럽의 패권국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무리한 전쟁, 에스파냐 상공업의 중심지였던 네덜란드의 독립운동 탄압 등을 위해서 탕진한 셈이었다. 물론 이 같은 막대한 부채가 펠리페 2세 치하의 에스파냐를 곧바로 몰락케 하지는 않았다. 에스파냐로 유입된 자금이 워낙 막대했고, 제노바의 은행가들은 연합을 이룬 다음 한 은행이 대출을 해 주어 지불 유예를 당한 은행이 에스파냐에 빌려준 돈을 회수하는 식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Drelichman and Voth, 2011, pp.). 하지만 펠리페 2세 치세 내내 이런 식의 부채가 이어지면서, 국가 재정은 극도로 취약해지고 말았다. 이와 더불어 국내 인력의 해외 유출 또한 포르투갈 못지않게 심각했고, 시대적인 한계 등으로 말미암은 비효율적인 식민지 통치는 식민지로부터 유입되는 자금이 에스파냐의 국력 신장으로 이어지는 것을 그만큼 저해했다(이매뉴얼 월러스틴 저, 나종일 외 역, 2001, 291-94쪽). 이런 와중에 통제를 벗어난 네덜란드를 대체할 산업 기반을 에스파냐 본토에 설립하는 일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비록 에스파냐는 1648년 네덜란드 북부의 7개 주가 공화국으로 완전히 독립한 뒤에도 가톨릭 신자가 주를 이루었던 남부 10개 주(오늘날 벨기에)를 1714년까지 지배했지만, 네덜란드 독립의 후유증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7세기에 에스파냐는 30년 전쟁(1618-48), 프랑스-에스파냐 전쟁(1648-59) 등 큰 전쟁에 개입했다가 연이어 실패한 뒤, 18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열강의 지위를 사실상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두 나라의 뒤를 이은 영국과 네덜란드는, 두 나라와 어떻게 달랐을까? 물론 결과만 놓고 본다면, 영국과 네덜란드는 에스파냐, 포르투갈과 달리 해상 무역을 통해 축적한 부를 자국 산업의 발달로 이어갔다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서 연원 하는 것일까? 영국 왕실과 정부, 네덜란드의 공화국 정부가 에스파냐, 포르투갈의 왕실, 지도층과 달리 유능하고 청렴해서 그런 차이가 났다고 치부할 수는 당연히 없다. 해상 무역을,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은 부와 자본을 대하는 관점과 방식의 차이가, 에스파냐, 포르투갈과 영국, 네덜란드의 차이를 빚었다.
1567년부터 에스파냐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시작한 네덜란드는, 본래부터 상공업과 해상 무역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이전부터 발트해와 이베리아반도를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해 왔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독립운동을 전개함과 더불어 동남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장거리 해상 무역에 눈뜨기 시작했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네덜란드의 무역선단은 유럽을 넘어 신대륙과 아프리카로 활동범위를 넓혔고, 그러면서 그들이 취급하는 상품의 종류가 다변화함은 물론 무역의 부가가치 또한 커졌다.
해상무역의 활성화는 많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만큼 자본도 많이 필요했다. 그러면서 네덜란드에서는 주식, 보증금, 채권 등의 신용거래가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신용거래는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15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했으나, 16세기 초ㆍ중반까지는 불편한 데다 수요도 많지 않아 널리 확산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16세기 중반 이후 해상무역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러한 수단은 네덜란드에서 활발하게 쓰이기 시작했다. 주식이나 채권, 보증금 등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효과적으로 자금을 모을 수 있기 때문에, 무역상은 물론 투자자 입장에서도 매력이 컸다. 무역상 입장에서는 무리하게 빚을 지는 대신 비교적 안전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투자자 입장에서도 투자금을 떼일 부담을 줄이면서 일이 잘 풀리면 배당금까지 받아 이익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금이 필요한 주체와 자금을 마련해 주는 주체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일종의 윈-윈 전략과도 같은 셈이었다. 그러면서 16세기 후반의 네덜란드에는 훗날 재정혁명이라 불릴, 자본주의 세계사에 큰 획을 그을 대전환의 토양이 다져지기에 이른다.
한편으로 네덜란드는 상인들이 주축을 이룬 공화국이었다. 물론 네덜란드 공화국은 삼권분립의 원칙, 보통ㆍ평등선거 등의 현대 민주주의 제도를 온전히 갖추지 않았고, 독립의 영웅이자 초대 총독인 오라녜 빌럼 1세()의 후손들이 형식상 네덜란드 각 주 의회의 추대를 받아 총독에 취임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총독직을 세습하는 등 현대 민주공화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상인 등 평민 상공업자들의 정치적ㆍ사회적 영향력과 지위가 높은 데다 제도적으로도 왕실이나 귀족이 평민층을 착취하거나 과도한 특권을 누리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웠던 네덜란드 국내의 사정은, 네덜란드가 영토나 인구 규모에 비해 더한층 조직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대규모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조직할 수 있는 힘을 실어 주었다. 특권층의 과도한 권력이나 특권이 덜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중앙정부가 효율적으로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막대한 부를 독점한 데다 면세특권까지 누리는 귀족층의 존재는, 그만큼 세수를 줄이고 국가 재정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울러 상공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더 많은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은, 상공업과 무역의 발전을 촉진했을 뿐만 아니라 세수 확보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납세의 의무가 있는 평민층이 부유해짐은, 그만큼 세수의 확대로 이어졌으니까. 이 같은 체제상의 이점은, 마찬가지로 왕정 국가이기는 했지만 평민층의 정치적ㆍ사회적 영향력과 지위가 높았던 영국이 18세기 이후 프랑스 등과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면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서막을 열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도 작용했다(아자 가트 저, 오은숙ㆍ이재만 역, 2017, 635-38쪽).
1590년대에 접어들어 네덜란드는 해상무역의 지리적 범위를 아시아 방면으로까지 확대한다. 이는 네덜란드의 국력과 경제력을 신장할 기회이기도 했지만, 항로가 길어진 만큼 부담과 위험성도 만만치 않았다. 아시아로의 항해에는 카리브해나 아프리카로의 항해에 소요되는 비용의 2~4배나 되는 자금과 훨씬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뿐만 아니라, 1600년 전후 기준으로 아시아로 항해하는 네덜란드 선박의 20% 이상이 다양한 이유로 침몰할 정도로 위험성도 컸다(Gelderblom and Jonker, 2004, pp. 648-49). 16세기 초반 에스파냐는 소형 카락 2척과 캐러벨(15세기에 이베리아반도에서 등장한 돛대 3개를 갖춘 선박으로, 원양 항해에 적합했지만 크기가 100t 이하로 작았다. 주경철, 2009, 137쪽) 3척으로 이루어진 규모가 크다고 볼 수 없는 선단으로 신대륙을 발견했고 수백 명에 불과한 콘키스타도르들의 활동을 통해 잉카와 아스테카의 광대한 영토를 손에 넣었지만, 17세기의 세계에서 네덜란드는 이 같은 일확천금 같은 행운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기존의 주식, 채권, 보증금과 같은 수단으로는 아시아를 잇는 무역 네트워크를 유지하기에 벅찼다. 그렇다고 해서 경제적ㆍ시간적 부담과 위험성 때문에 아시아 항로를 포기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네덜란드 입장에서 아시아로 이어지는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투자금을 효과적으로 유치하고 위험성을 적절히 관리할 수 있는 특단의 수단을 마련해야만 했다.
160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가 문을 열었다.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효과적으로 관리ㆍ확장하기 위한 회사였다. 네덜란드 정부가 아닌 일개 회사가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관리하고 해외 식민지까지 건설한다는 점이 독자 여러분께 다소 이해하기 어렵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유럽 국가의 정부가 이를 온전히 감당할 정도의 행정력이나 인력, 재정 동원 능력 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이처럼 회사나 개인 등에 무역로나 식민지 개척을 일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지고 보면 콜럼버스의 항해나 콘키스타도르들의 누에바에스파냐 건설(침략) 등도 에스파냐 왕실의 지원이나 규제 등을 받기는 했지만 정규군이나 정부 인사가 아닌 모험가들이 주도하는 측면이 많았으며, 에스파냐 왕실이나 정부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을 온전하고 철저하게 통치한 것도 아니었다. 아울러 훗날 영국 역시 영국 동인도 회사, 허드슨만 상사 등의 기업체를 통해 인도, 캐나다 등지로 진출(침략)했으며, 영국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이들 회사를 해체하고 영국령 인도 제국, 캐나다 등을 통치하게 된다. 물론 포르투갈처럼 국가가 상단을 대표하여 해군력을 앞세워 무역 거점을 확보하고 아시아 국가들과 무역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이매뉴얼 월러스틴 저, 나종일 외 역, 2001, 506-509).
그런데 영국 동인도 회사보다 2년 늦게 수립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영국의 경쟁자보다도 30년 가까이 이른 혁신에 성공했다. 1620년대 초반에 이르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양도 가능한 주식, 고정자본(장기간 쓰이는 생산수단이나 설비에 투입되는 자본으로, 생산 그 자체에 쓰이는 자본인 유동자본과 대비되는 개념이며 생산수단 등의 내구성이 다할 때까지 장기간 유지ㆍ사용되는 특징을 가진다), 유한책임(회사가 파산할 경우 투자자자가 자신이 투자한 몫만큼만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이라는 특징을 가진 근대적인 주식회사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 (Gelderblom et al., 2013, 1051). 아울러 위기 대처를 위한 보험 또한 적극 도입했다(Gelderblom et al., 2013, 1068-70). 물론 주식이나 채권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투자를 받아 무역선단을 설립ㆍ유지하는 방식은 이전에도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져 왔고 그전에 베네치아, 제노바 등에서도 쓰여 왔지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구조는 이러한 혁신을 통해 세계 최초의 근대적 주식회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Gelderblom et al., 2013, 1072-74).
근대적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799년 네덜란드 정부에 흡수되어 해체될 때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기업체로 군림했다(주경철, 2005, 2). 오늘날의 애플, 삼성, 구글, 코카콜라 등이 갖는 위상조차도 능가하는, 근대 세계 최대의 거대 기업이자 다국적 기업의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동남아시아를 넘어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일본의 에도 막부와도 교류를 이어 갔다. 1853년 미국 해군 제독 매슈 페리(Matthew Perry, 1794-1958)가 근대식 함대를 앞세워 에도 막부에 개항을 강요할 때까지, 네덜란드는 일본과 교류하고 무역하던 유일한 유럽 국가였다. 아울러 1619년에는 자체 고용한 함대와 병력을 동원해 인도네시아를 네덜란드령 바타비아라는 이름의 식민지로 삼음으로써, 1949년까지 이어진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지배의 막을 올리기까지 하였다.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가 대성공을 거두자, 1621년에는 서인도 회사까지 설립하여 대서양 무역을 크게 확장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가이아나, 카리브 네덜란드를 식민지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 동해안에 니우암스테르담(Nieuw Amsterdam) 식민지를 건설하기까지 했다. 니우암스테르담은 1664년 영국에게 빼앗긴 뒤 뉴욕(New York)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세계 금융시장과 경제의 최중심지인 월스트리트(Wall Street)는, 본래 니우암스테르담을 건설한 네덜란드인이 방어를 위해 목책(wall)을 쌓았던 데서 비롯하는 지명이다.
그 원동력은 앞서 언급한 17세기 초반에 이룩한 혁신이었다. 거래가 자유로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주식은 단순히 돈을 불릴 수 있는 보증서나 채권을 넘어, 교환가치가 높은 자산으로 더한층 인기를 끌 수 있었다. 유한책임이나 보험 덕분에, 네덜란드인들은 더한층 적극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주식을 매입할 수 있었다. 설령 회사가 잘못되더라도 주주가 입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무역선단이 전멸하는 바람에 고리대금업자에게 목숨까지 잃을 위기에 처한 『베니스의 상인』 속 안토니오와 같은 처지로 전락할 위험성이 눈에 띄게 줄어든 셈이다.
하지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혁신은 그저 회사 하나를 세계 굴지의 거대기업, 선구적인 다국적기업으로 키워 주는 수준을 넘어서는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주식이 부가가치와 투자가치, 교환가치가 높은 자산으로 대두하면서, 네덜란드의 증권시장은 급속히 활발해지고 확대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혁신이 도상에 있던 17세기 초반에, 이미 네덜란드의 주요 대도시에는 증권거래소가 세워졌고 많은 사람들이 증권을 사고팔기 시작했다. 즉, 증권이라는 증서가 현금이나 귀금속 등의 현물에 못지않거나 이를 능가하는 경제적 가치를 갖는 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보험 역시 '최후의 수단'을 넘어서는, 경제적으로 중요한 산업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독자 여러분이 이해하고 계시리라 믿지만, 보험회사는 대단한 인격을 가진 독지가가 불행에 빠진 사람이나 기업을 구제하기 위해 큰돈을 ‘퍼주려고’ 설립한 곳이 아니다. 재난이나 사고를 당한 보험 가입자에게 지급되는 보험금은 엄연히 보험 가입자의 납입금으로 충당된다. 해상무역은 위험이 컸기 때문에 무역에 종사하는 선주나 상단주는 보험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고, 아시아를 비롯한 원거리 해상무역이 많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고는 했지만 사고나 재난을 만나 침몰하는 상선은 어디까지나 일부였기 때문에 보험업은 충분히 수지맞는 장사였다. 아니, 가입자에게는 예기치 못할 심각한 위험에 대처할 대안을 마련해 주는 한편으로 보험회사는 보험회사대로 적잖은 이윤을 축절하게 해 주는 일종의 윈-윈 전략과도 같은 사업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혁신은, 네덜란드가 세계 해상무역 네트워크의 지배자로 대두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영토로 보나 인구 규모로 보나 유럽에서 대국이라고 불리기 어려웠던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은 물론 그들보다 훨씬 많은 인구, 넓은 영토, 강대한 군대를 거느렸던 에스파냐조차 압도해 갔다. 물론 여기에는 인구가 많지 않았던 네덜란드가 포르투갈과 달리 인접국으로부터 유입된 이민자나 식민지 노동력, 심지어는 노예 노동력을 적극 고용하거나 이용했던 부분도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van Rossum., 2019, 21-28). 하지만 단순히 투자처로부터의 배당금을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 유동성 있고 교환가치가 높은 자산으로까지 대두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주식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아시아 해상무역 네트워크라는 막대한 이윤을 낳으면서도 재정적 부담과 위험성이 만만찮은 사업에 효과적으로 뛰어들 수 있게 해 주었다. 결코 큰 나라라고 볼 수 없었던, 심지어 17세기 중반까지는 에스파냐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지도 못했던 네덜란드가 17세기 세계 해상무역을 선도하는 해양강국이 될 수 있었던 비결에는 이처럼 근대적인 주식회사의 효시를 쏘아 올렸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혁신이 깊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1650년대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도 네덜란드의 경쟁자를 따라 근대적인 주식회사로의 혁신을 완성하게 된다.
하지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혁신은 그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팽창이나 네덜란드의 국력 강화로만 이어진 것이 아니었다. 주식과 증권 거래가 경제활동의 중요한 축으로 떠오르고 보험업까지 발전하면서, 유럽의 경제와 재정에는 혁명적인 변화가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증권 거래가 활발해짐에 따라, 16세기 네덜란드에는 증권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인 2차 시장(secondary market)이 빠른 속도로 형성ㆍ발달할 수 있었다(Gelderblom and Jonker, 2004, 659-63). 즉, 네덜란드의 시장은 현물과 현금이 오가는 시장을 넘어, 증권거래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한층 선진적이면서도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경제력을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 새로운 경제로 탈바꿈한 것이다. 보험업의 발달은 2차 시장의 형성에 따른 네덜란드 경제의 유연성과 규모 확대를 더한층 촉진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혁신이 불러온 이 같은 시장과 경제의 변혁을, 재정혁명(financial revolution)이라고도 부른다(Gelderblom and Jonker, 2004, 663-67).
네덜란드로부터 촉발된 재정혁명은 자본주의 세계의 형성과 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2차 시장의 대두, 그리고 보험업의 중요 산업으로의 부상이라는 변화는 돈의 의미와 흐름, 그리고 경제의 규모에 극적인 전환을 불러왔다. 이전까지 돈, 자금, 자본이라 하면 말 그대로 현금과 현물이었다. 물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혁신 이전에도 유럽 각국은 은행과 보증금, 주식 등의 제도를 도입했지만, 이는 돈을 고리대금업자가 아닌 믿을 수 있는 금융기관에 맡겨 두거나 배당금을 받는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은행 통장이나 채권 등은 돈을 맡기거나 배당금을 받는 수준을 넘어, 시장에서 자유롭게 통용되는 재산이나 교환수단으로써의 가치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2차 시장이 형성되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부채는 글자 그대로 '빚'이었고, 펠리페 2세가 진 거액의 빚이 에스파냐의 국력과 경제력을 잠식했던 것처럼 대출을 받는다는 일은 시한폭탄을 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증권시장, 즉 2차 시장이 형성되고 보험업이 유력 산업으로 대두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증권이란 주식 거래를 위해 사용되는 일종의 문서이다. 즉, 주식 거래에 필요한 내용을 적어놓은 일개 종이조각에 불과한 증권이 중대한 부가가치, 투자가치, 교환가치를 지니며 시장의 중요한 축으로 대두했다는 말은, 투자의 확대를 통해 가용한 돈과 자본의 양적 규모를 현저히 키웠을 뿐만 아니라 돈과 자본의 의미까지 변용하게 만들었다. 즉, 돈과 자본의 의미가 눈에 보이는 금화나 은화, 지폐, 아니면 현물을 넘어, 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되고 가치가 매겨지는 일종의 숫자와도 같은 성질을 가진 주체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돈과 자본이 현금과 현물에서 숫자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선 자금을 보다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운영할 수 있게 된다. 운용하기 불편하고 자칫하면 잃어버리거나 강탈당할 우려도 적지 않은 현금이나 귀금속 등에 비해, 증권과 같은 문서는 많은 돈을 안전하면서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운용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증권은 엄연히 제도화된 공식 문서이기 때문에, 개인 간에 이루어지는 계약서 등보다 훨씬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서 돈과 자본은 그저 축적만 많이 해 두면 좋은 주체를 넘어, 한층 활발하게 순환할 뿐만 아니라 가치를 재생산하고 증식할 수 있는 주체로 한 걸음 올라서게 된다. 증권의 매매를 통한 주식투자 자체가 투자 성격이 강하기도 했거니와, 2차 시장이 성장하고 돈과 자본의 순환이 활발해지면서 자본의 투자 또한 더한층 활성화된 까닭이었다. 보험업의 발달은 이 같은 자본과 시장, 경제의 변화를 더한층 촉진했다. 보험 납입금을 통해 조성한 거액의 자본은 증권거래소 등을 통해 해상무역을 비롯한 다양한 고부가가치 사업에 비교적 안전하게 투자될 수 있었고, 이는 보험회사를 그저 만일에 대비해 돈을 모아두는 곳이 아니라 납입금을 투자하여 경제적 가치를 창출ㆍ재창출하는 시장과 경제의 중요한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처럼 돈과 자본의 의미가 바뀌면서, 유럽의 경제 구조에는 질적인 대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현금과 현물 대신 문서화ㆍ숫자화된 자본이 경제를 좌우하기 시작하면서, 경제의 규모가 커졌다. 게다가 돈과 자본이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물건에서 증권 등에 적힌 숫자로 변하면서, 자본의 흐름 자체가 바뀌기 시작했다. 즉, 투자나 거래를 하고 대출을 받는 과정이, 커다란 돈자루를 들고 다니는 일에서 문서에 서명하는 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증권이라는 문서는 언제 어디서나 교환하거나 투자 이윤을 거둘 수 있는 장치였기 때문에, 은행 입장에서도 숫자와 문서를 통한 거래와 대출을 '종이조각'을 주고받는 일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행위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경제 활동에서 신용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이 크게 떠오르게 된다. 신용할 수 있는 주체라면 얼마든지 대출을 해 줄 수 있고, 그렇게 대출을 받은 주체는 강한 신용을 바탕으로 열심히 투자를 해서 대출받은 돈을 갚거나 낮은 이자로 대출을 신청ㆍ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경제활동은 규모가 더욱 커졌을 뿐만 아니라 더한층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신용등급이 경제 부문에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 까닭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17세기 세계는 아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라고 보기 어렵다. 유럽의 경제는 여전히 중상주의, 즉 본격적인 시장경제보다는 보호무역과 식민지 착취에 바탕한 전근대적인 무역 활동을 통해 유지ㆍ발전하는 경제 체제가 지배하고 있었다(이매뉴얼 월러스틴 저, 유재건 외 역, 2001, 61-62). 청나라, 무굴 제국, 오스만 제국 등 아시아의 강국들은 여전히 유럽 국가들을 압도하는 국력과 경제력을 자랑했고, 실크로드 등 육로를 통한 무역로의 경제적 가치는 유럽인들이 개척한 해상무역 네트워크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이지은, 2013, 198-206). 15~16세기에 동로마 제국, 몽골 제국의 침공을 막아내며 유럽 세계를 동쪽에서 지켜낸 동유럽 최강국 헝가리 등을 정복하며 서쪽으로 팽창을 거듭하던 오스만 제국이 16세기 중반 이후 그 팽창을 멈췄던 까닭은, 그들이 지중해와 유럽보다 더 중요성이 높은 지역으로 여겼던 페르시아 방면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었다(Ágoston, 2015, 620). 하지만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혁신은, 현금이나 현물이 아닌 신용이 경제를 좌우하는 새로운 경제 질서와 체제를 낳았다. 이 같은 변혁은 유럽의 경제를 계속해서 전환해 가며, 자본주의 체제가 태동한 뒤 세계 경제를 자본주의 질서에 통합하는 밑거름으로 이어지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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