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직전 발칸반도의 지정학적 위기가 빚어낸 사라예보 사건
16세기 이후 수백 년이 넘도록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온 발칸반도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민족주의 운동의 고양, 오스만 제국의 쇠퇴, 러시아의 지원 등에 힘입어 드디어 독립을 성취하기 시작했다. 정교회 신앙을 가진 발칸반도의 슬라브계 민족집단은 수백 년 만에 되찾은 민족의 독립과 종교의 자유에 환호했고, 중세 시대에 강대한 제국을 세웠던 조상들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열망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발칸반도의 운명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유럽의 지정학적ㆍ군사지리적 요지인 발칸반도의 신생 중소국가들이 강대국의 위협과 간섭에서 자유롭게 나라를 발전시켜 가기란 태생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이어진 유럽의 지정학적 변화는 발칸반도를 문자 그대로 유럽의 화약고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서쪽에서는 프로이센에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내어 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그리고 동쪽에서는 태평양으로 진출할 길이 막혀 버린 러시아가 발칸반도를 향해 손을 뻗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13세기 후반 이래 유럽 최고의 명문으로 군림해 왔다. 서유럽 세계의 유일한 정통 제국이자 로마 가톨릭 세계의 수호자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제위를 손에 넣은 합스부르크 왕가는, 17세기 신성 로마 제국이 사실상 유명무실화된 뒤에도 제위를 유지하며 유럽의 강국으로 군림해 왔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17세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오스만 제국의 대대적인 침공을 격퇴하며 유럽 세계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지킨 방파제 역할을 잘 수행했고, 1702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헝가리 영토를 완전히 수복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유럽 세계를 프랑스혁명 이전의 절대왕정 체제로 되돌리려는 빈 체제 역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개칭된 합스부르크 제국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 1773-1859)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영국, 프랑스 등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19세기 오스트리아의 무역선단은 동지중해를 넘어 아프리카까지 진출하며 해외 무역에 적극 참여했다(마틴 래디 저, 박수철 역, 2022, 375-78).
하지만 19세기 중ㆍ후반을 거치면서 오스트리아는 내부적으로 중대한 위기에 빠졌다. 이는 합스부르크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의 체제에 기인한 부분이 크다. 신성 로마 제국, 즉 중세의 제국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제국과는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 중세의 제국은 교황을 보좌하며 가톨릭 세계를 수호하고 다스리는 지극히 높은 위상을 갖기는 했지만, 그 위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적인 권력자라기보다는 여러 제후와 국왕의 대표자라는 성격에 가까운 측면이 많다. 애초에 중세 유럽의 봉건 군주는 제후들의 우두머리에 가까웠거니와, 중세 신성 로마 황제들이 제후들의 기득권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한계를 보임으로써 신성 로마 황제의 권력은 그만큼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중세 시대에야 이런 점이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이 국민국가를 형성해 갔던 반면, 합스부르크 제국은 그런 변화에 뒤처졌다. 애초에 합스부르크 제국은 말도 풍습도 정체성도 다른 제후국과 왕국들이 혼재한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트리아 대공 가문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당주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제위에 올라 명목상 제국 체제를 유지하면서, 수많은 왕국과 제후국의 군주를 겸임하거나 왕족, 유력자 등에게 왕위나 제후 자리를 맡기는 식의 중세적인 체제를 가졌다. 그러다 보니 합스부르크 제국은 그 전통과 국력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가 공고해질수록 체제적인 취약성이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완전히 철폐되어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개칭된 합스부르크 제국은, 민족주의가 고조된 19세기에 접어들며 더 큰 위기에 직면했다. 민족주의를 받아들인 제국 내 민족집단들이 제국 정부와 황실을 상대로 자치권의 확대나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합스부르크 왕가도 이런 문제를 간과하지 않아 비독일계 민족집단에 독일어 사용을 강제하는 등 국가 통합을 위한 노력에 나섰지만 한계는 뚜렷했다. 일례로 보헤미아인들은 자신들의 언어, 즉 체코어의 사용과 교육에 제한이 가해지자 체코어 인형극을 상연하면서까지 체코어를 보존해 갔다. 결국 오스트리아 제국은 민족주의의 열기를 견디지 못한 채 1867년 헝가리를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전 분야에서 자치권을 가진 왕국으로 승격하고, 보헤미아 등 다른 제후국의 자치권 또한 확대하는 개혁 조치를 단행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거듭났다.
그러다 보니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내정과 군사력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로 다른 민족집단의 수많은 언어가 쓰이는 제국이다 보니, 행정 체계의 효율성에는 그만큼 장애가 빚어졌다. 전통을 자랑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장병들로 구성된 군대의 전투력 역시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본질적으로 중세에 연원 하는 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였기에, 미국처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민자 집단들을 융합하여 민주시민으로 통합하는 일 역시 한계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아직 오스트리아 제국이었던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하여 독일 통일의 주도권까지 잃고 말았다. 19세기 후반 시점에서 엄연히 열강의 일원이었고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문화 선진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였지만, 내부적인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고 제국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확실한 돌파구를 마련해야만 했다.
그 돌파구는 바로 발칸반도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동쪽으로 인접한 발칸반도는 지중해, 흑해로 진출할 발판과도 같은 땅이었기 때문에, 내륙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강력한 해군력으로 식민지를 넓히며 국력을 키워 가고 있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과 경쟁할 수 있는 힘을 얻는 데 안성맞춤인 땅이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발칸반도로 진출할 명분과 권리까지 확보해 둔 터였다. 그 발단은 러시아-튀르크 전쟁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베를린 조약(1878)을 주재함으로써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종전을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그 덕분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승전국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에게서 빼앗은 영토를 반환하거나, 세르비아 등의 독립을 허용하는 식으로 전쟁을 마무리 짓도록 할 수 있었다. 즉, 러시아가 발칸반도에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영향력을 키우는 것을 상당 부분 저지하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발칸반도의 전쟁을 마무리 지은 당사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과 발언권을 키움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베를린 조약을 성공적으로 주재한 덕분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영유할 권리까지 얻었다. 이어서 1908년에는 러시아의 보스포러스해협 통과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제정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을 아우르는 세계제국이었다. 비록 크림 전쟁에서 실패를 겪었다고는 했지만,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완전히 복속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하여 태평양으로 진출할 지리적 발판까지 얻었다. 중앙아시아는 육상 교통의 요지이고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기도 하지만, 해군력을 통해 침투할 수 없다는 또 다른 지정학적ㆍ군사지리적 이점까지 지닌다. 바다와 멀리 떨어지기도 했거니와, 아무다리야강, 시르다리야강 등 중앙아시아를 흐르는 대부분의 하천이 바다가 아닌 아랄해 등의 호수로 흘러가는 내륙하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이 그토록 러시아를 견제했던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영국의 지정학자 핼퍼드 매킨더(Halford J. Mackinder, 1861-1947)는 세계의 지정학적 질서를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대결 구도로 상정하고, 해양세력이 침투할 수 없으면서 자원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등의 심장지대를 지배하는 세력이 세계를 주도한다는 심장지대 이론(Heartland Theory)을 제시하기도 했다(Venier, 2004, 331-334). 실제로 러시아는 수많은 내부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반 이후 캅카스의 석유, 우크라이나 동부의 석탄 등과 같은 자원 등을 활용하여 산업혁명에 성공하고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발전해 갈 수 있었다(이동민, 2022, 78-79).
하지만 러일전쟁은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에 쐐기를 박고 말았다. 영국과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일본에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세계 5위 수준의 강대한 전력을 자랑하던 러시아 해군이 사실상 소멸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해군이 소멸한 마당에 영국, 프랑스 등과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이어가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일본이 과도하게 팽창하여 동아시아와 태평양의 지정학적 질서가 어그러질 것을 우려한 열강의 주재로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1905) 덕분에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극동 러시아 영토를 지킬 수 있었지만, 조선에 대한 영향력과 뤼순() 및 다롄()의 조차권, 창춘() 이남의 철도 부설권 등은 일본에게 양보해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지명에 담긴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복 야망은, 러시아 해군의 소멸과 더불어 1905년 사실상 꺾이고 말았다.
그렇다고 팽창의 방향을 서쪽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러시아의 서쪽 국경선에는 독일이 버티고 서 있었는데, 당연히 러시아가 자국보다도 국력이 앞서는 독일을 침공해서 정복하거나 식민지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15세기 중앙아시아를 통일했던 티무르처럼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인도를 정벌할 수도 없었다. 이미 인도는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세계에서 러시아가 뻗어나갈 수 있는 땅은 어디였을까? 바로 발칸반도였다.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을 제압하고 세르비아와 루마니아, 몬테네그로가 독립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들 입장에서 러시아는 당연히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고, 러시아는 발칸반도에 진출할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더욱이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슬라브 민족정체성과 슬라브계 언어, 정교회 신앙이라는 공통분모를 러시아와 공유했다. 민족주의 열기가 달아오르던 19세기에 이는 러시아가 발칸반도에 진출할 더한층 유리한 고지를 조성해 주었다. 아직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다른 슬라브계 민족집단도 민족주의의 열기 속에서 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당연히 러시아의 잠재적 동맹국이 될 수 있었다. 발칸반도의 슬라브 민족주의 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러시아는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협상을 통해 해군 함정이 보스포러스해협을 통과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데 성공했다. 혹해에서 지중해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보스포러스해협을 통과해야 하는데, 19세기 내내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경쟁 구도를 이어 가던 영국은 다른 유럽 열강과 합세하여 1841년부터 러시아 해군 함정의 보스포러스해협 통과를 봉쇄해 왔었다. 이렇게 되면 러시아 흑해함대는 흑해라는 거대한 호수에 갇혀 지중해로, 대양으로 무력을 투사할 수 없는 반쪽짜리 함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 최대의 공업지대가 있던 흑해 북동안의 돈바스 등지 역시 경제와 산업 활동에도 차질이 빚어지기 쉽다. 그런 만큼 러시아가 보스포러스해협을 통과할 권리를 얻었다는 사실은, 러시아가 발칸반도, 나아가 지중해까지 진출할 수 있는 지정학적 발판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대한 문제가 불거졌다. 이를 구실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병합은, 사실 러시아의 정식 동의를 얻지 않은 채 사실상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독단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외교 채널 간의 의사소통 문제로 일어난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병합은, 결국 발칸반도를 노리던 두 나라의 외교 관계를 파탄내고 말았다(마틴 래디 저, 박수철 역, 2022, 486쪽).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주민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에 큰 반발을 품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슬라브계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1377년 보스니아 왕국을 세워 나름 영토 확장까지 해 가다가 1463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터였다. 종교적으로도 이슬람교와 정교회가 주를 이루었고, 유럽의 대표적인 가톨릭 세력인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달리 로마 가톨릭 신자는 소수였다. 보헤미아(오늘날 체코), 모라비아(오늘날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지는 비록 독일 문화권에 속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종주국 오스트리아와 이질적인 부분이 컸다지만 문화적, 역사적으로 접점이 강한 반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병합은 현지 주민들에게는 강대국이 멋대로 자신들의 민족적 열망을 무시한 채 강제로 조국을 병탄한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병합은 수많은 세르비아인까지 격분하게 만들었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성취한 세르비아인들은, 14세기 중반 발칸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세르비아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민족주의적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세르비아 국민들은 사악한 이교도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세르비아 제국의 영웅과 조국을 배반한 배신자들의 이야기에 열광했고, 세르비아 정부는 옛 세르비아 제국의 영토 회복, 즉 대(大) 세르비아 건설을 외교 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었다(크리스토퍼 클라크 저, 이재만 역, 2019, 67-69).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옛 세르비아 제국의 영토로 대세르비아의 영역에 당연히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세르비아 건설을 위해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할 지정학적 발판이기도 했다. 게다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옛 세르비아 제국의 영토였을 뿐만 아니라, 슬라브 민족이라는 민족정체성까지 공유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는 세르비아계 주민들도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 세르비아 입장에서 게르만계 민족집단과 문화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배는 이민족이 슬라브 민족의 영토와 주권, 영광과 정체성을 짓밟은 침략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르비아가 노골적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문제에 당장 개입하거나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노골적으로 도전하지는 못했다. 엄연히 열강 축에 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신생 중소국가였던 세르비아의 국력 차가 너무나 현격한 탓이었다. 외교적ㆍ지정학적으로도 불리했다. 우선 이탈리아는 중세 말~근대 초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가 다수 있었고 20세기 초반 기준으로도 이탈리아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던 아드리아해 연한, 즉 발칸반도 서부를 '잃어버린 이탈리아'라 부르며 수복을 노리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통일 당시 이들 지역까지 수복하려 했으나,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그렇게 하지 못한 터였다. 세르비아가 함부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건드렸다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물론 삼국동맹의 일원이기도 한 이탈리아라는 또 다른 강국까지 적으로 돌릴 공산이 컸다. 게다가 세르비아의 동맹국 프랑스는 세르비아에 충분한 군사적 지원을 할 형편이 아니었고, 그레이트 게임을 사실상 승리로 끝내고 러시아를 동맹국으로 포섭한 영국은 발칸반도 문제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여기에 덧붙여, 1903년 세르비아 군부 과격파 장교단이 궁궐에 침입해 오브레노비치(Obrenović) 왕가의 국왕 알렉산다르 1세(Aleksandar I, 1876-1903, 재위 1889-1903) 부부를 잔혹하게 난자해 살해하고 카라조르제비치(Karađorđevići) 왕가의 페타르 1세(Petar I, 1844-1921, 재위 1903-1918)를 왕위에 앉히는 사건 때문에 유럽 각국의 세르비아에 대한 여론은 크게 악화된 상태였다. 20세기 초반 유럽과 발칸반도의 지정학적 정세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그토록 갈망하던 세르비아에게는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비록 현대적이고 민주적인 다문화 사회라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도 많았지만, 합스부르크 왕가는 수백 년에 달하는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민족과 왕국, 제후국들로 이루어진 제국을 유지해 온 저력을 가졌다. 그들의 피지배 민족 통치는 결코 강압적이지만은 않았다. 일레로 17~8세기 이후 폴란드 일부와 우크라이나 동단 영토를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는 마찬가지로 또 다른 폴란드 영토 일부와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러시아보다 훨씬 유화적이었다(구로카와 유지 저, 안선주 역, 2022, 147-162). 19세기 중반 이후 고조되는 민족주의의 열기 속에서 제국을 유지ㆍ발전하게끔 할 유연함도 갖추고 있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 재위 1848-1916)는 당대 기준으로도 매우 보수적인 인물이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오스트리아 제국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재편하고 여러 민족집단에 상당한 자치권을 주었다. 물론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이 같은 조치가 제국 내의 비독일계 민족집단의 불만을 온전히 잠재우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제국이 민족주의의 열기 속에서 분열하는 대신 유럽의 강대국이자 문화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새로 병합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무력을 통해 강압적으로 다스리는 대신, 이들에게 자치권을 최대한 허용하고 경제적인 혜택을 누리게 하는 유화책을 펼쳤다. 오스만 제국의 독립에서 벗어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주민들이 그들만의 민족 정체성을 기른 다음, 다민족 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일원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그 덕분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는 다수의 학교와 공장, 광산, 철도망이 들어섰고, 사라예보 시장을 비롯한 요직에 진출하며 로마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 아래서도 차별받는 대신 상당한 대접을 받았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무슬림으로 이루어진 군부대는 제국 내에서도 가장 충성심이 높고 전투력이 뛰어난 부대로 인정받을 정도였다(마틴 래디 저, 박수철 역, 483-485).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Franz Ferdinand Karl Ludwig Joseph Maria, 1853-1914)은 황제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군주나 왕위 계승자는 왕가의 공주나 그에 준하는 신분의 여성과 결혼하던 것이 관례이자 상식이었던 그 시대에,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귀족이기는 했지만 황후나 태자빈이 되기에는 미천하다고 여겨졌던 백작 가문의 딸과 결혼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의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은 결혼이라는 개인사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제위 계승자로 책봉된 뒤 황제를 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국정에 참여한 그는,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속과 발전을 위해 제국 내의 슬라브계 민족집단과 구성국의 지위, 자치권을 대폭 제고함으로써 제국을 15개 구성국으로 이루어진 대오스트리아합중국(Die Vereinigten Staaten von Großösterreich)으로 재편하려는 시도까지 한 인물이었다(크리스토퍼 클라크 저, 이재만 역, 2019, 194-196). 물론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이 같은 개혁안은 보수적인 황제는 물론, 제국의 주류를 이루는 오스트리아(독일계)와 헝가리의 극심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민족주의의 열기가 달아오르던 20세기 초반 유럽의 정세를 고려하면,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대오스트리아합중국 구상은 그 타당성이나 현실성에 한계가 있었을지는 모르나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기 위한 나름의 합리적인 개혁안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통치에도 한계는 뚜렷했다. 이는 두 가지 지리적 스케일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부 스케일에서는, 세르비아계의 불만이 커져 갔다. 당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는 정교회를 신봉하는 세르비아계와 로마 가톨릭 신도, 무슬림이 섞여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세르비아계는 로마 가톨릭 신도는 물론 무슬림에 비해서도 차별받고 소외당했다. 여기에는 세르비아계가 유전적으로 열등한 데다 근본이 없는 이민족 출신이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민족을 구성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골상학자들의 어처구니없는 연구결과가 영향을 미친 측면도 적지 않다(마틴 래디 저, 박수철 역, 2022, 484-486). 게다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넘어선 지리적 스케일에서는, 대 세르비아 건설이라는 야망을 실현할 길이 가로막힌 데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동포들이 받고 있던 수난에 분노하던 세르비아와 1908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외교 관계를 파탄 낸 러시아가 연대하고 있었다. 이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축출하거나 그 영향력을 최소화하려는 지정학적 의도, 그리고 슬라브계 민족이 주를 이루는 나라라는 공통점을 가졌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역시 이들에 포섭되어 갔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발칸반도 진출은 이를 적대시하는 슬라브계 민족집단과 국가를 이른바 범슬라브주의라는 민족주의적 명분 아래 결집케 했고, 그러면서 발칸반도의 지정학적 위기는 전쟁으로 한걸음 더 나아갔다(Boech, 2016, 107-125).
제국군의 감찰관이기도 했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는, 1914년 6월 25일 황제의 명을 받아 제국군의 대규모 기동훈련을 감독하고 참관하기 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방문했다. 이틀 뒤인 27일 훈련이 끝나자, 대공 부부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주도(州都) 사라예보로 향했다. 업무 수행도 할 겸, 아직 병합된 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민심도 달래고 회유하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대공 부부가 세르비아에 도착한 6월 28일은, 1389년 세르비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한 날인 비드보단(Vidvo Dan)이었다. 세르비아인들에게 이 날은, 위대한 조상들이 '사악한 이교도'에 맞서 조국과 그리스도교 세계를 지키다 장렬히 쓰러져 간 특별한 명절이었다. 하필이면 이 날에 사라예보를 방문함으로써,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의도와는 무관하게 세르비아계의 민족감정과 반발심을 자극하고 말았다(존 키건 저, 조행복 역, 2009, 77).
더 큰 문제는 세르비아 군부 과격파와 연게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부의 세르비아계 과격 민족주의 결사인 흑수단(Black Hand)의 존재였다. 1903년 알렉산다르 1세 부부를 잔혹하게 살해한 뒤 페타르 1세를 옹립한 세르비아 군부의 과격파는, 이후 페타르 1세와 반대파의 견제를 받아 세르비아의 국정과 군권을 장악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들은 군부에서 완전히 숙청당하지는 않았다. 일례로 1903년의 쿠데타에 참여한 인물인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Dragutin Dimitrijević, 1876-1917)는 1914년 당시 대령 계급으로 세르비아군 정보기관의 책임자를 맡고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과격파 장교단으로 구성된 흑수단의 수장이기도 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흑수단은 사실 이들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영내에 심어둔 일종의 세포조직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세르비아 정부가 디미트리예비치와 흑수단에 대한 견제를 강화해 가자, 그들은 전쟁을 일으켜 정부 관료들을 숙청하고 국정과 병권을 장악할 시도에 착수했다(A.J.P. 테일러 저, 유영수 역, 2022, 95-97). 때마침 비드보단에 사라예보를 방문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흑수단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테러나 암살 위협에 대한 현지 관료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행사 참석을 위해 오픈카를 타고 이동했다. 불의에 저격당할 위험성이 큰 행동이었지만, 대공은 민심 시찰을 겸할 겸 기어이 오픈카에 올랐다. 물론 만일에 대비해서 방탄복을 착용하기는 했다.
현지 관료들의 경고는 틀리지 않았다. 이동 중이던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흑수단 단원의 수류탄 공격을 받았다. 수류탄이 빗나가는 바람에 대공 부부는 무사했지만, 수행원과 구경꾼 십수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 대공은 자신 때문에 다친 사람들을 위문하려는 마음에,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안전한 장소로 대피하라는 현지 관료의 조언을 따르는 대신 오픈카 운전수에게 부상자들이 입원한 병원으로 방향을 돌리라고 명령했다. 침착하고 자비롭게까지 보이는 이 행동은, 결국 자신과 아내는 물론 결과적으로 천만 명도 넘는 유럽인이 목숨을 잃는 참혹한 전쟁의 불씨를 댕기고 말았다. 대공 부부는 병원으로 이동하던 도중에,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1894-1918)라는 22살 난 흑수단원의 총격을 받고 말았다. 프린치프가 쏜 총탄은 방탄복으로 보호받지 못한 대공의 목을 꿰뚫었고, 대공은 아내와 함께 절명하고 말았다. 이 날은 비드보단이기도 했지만, 얄궂게도 대공 부부의 결혼기념일이기까지 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구로카와 유지 저, 안선주 역, 2022,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장대한 동슬라브 종가의 고난에 찬 대서사시』, 글항아리.
마틴 래디 저, 박수철 역, 2022,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까치.
이동민, 2022, 「대러시아 관계에 있어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분열에 대한 다중스케일적 접근: 드니프로강은 어떻게 우크라이나를 지정학적으로 분단했는가?」, 『문화역사지리』, 34(3), 67-87.
존 키건 저, 조행복 역, 2009, 『제1차세계대전사』, 까치.
크리스토퍼 클라크 저, 이재만 역, 2019, 『몽유병자들: 20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 책과함께.
A.J.P. 테일러 저, 유영수 역, 2022, 『기차 시간표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의 기원』, 페이퍼로드.
Boeckh, K. 2016, The rebirth of pan-Slavism in the Russian empire, 1912–13. In The Balkan Wars from Contemporary Perception to Historic Memory, eds. K. Boeckh, and S. Rutar, pp. 105-137. London: Palgrave Macmillan.
Venier, P. 2004. The geographical pivot of history and early twentith century geographical culture. The Geographical Journal, 170(4), 330-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