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의 절정기 속에서 커져가고 있던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서구 세계는 절정을 맞은 듯 보였다.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혁신,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팽창 덕택에 경제력과 군사력의 혁명적인 발전을 구가한 서구 열강은, 한 세기 전까지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하던 청나라와 무굴 제국을 압도하며 전 세계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위상을 차지할 수 있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등은 본국의 수 배~수십 배에 달하는 해외 식민지를 거느린 식민제국이 되었고, 러시아는 유라시아 교통의 요지이자 천연자원이 풍부한 중앙아시아를 손에 넣으며 태평양 방면까지 진출했다. 아울러 서부 개척을 이어간 끝에 캘리포니아와 오리건 , 알래스카 등지를 확보하며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모두 진출할 수 있다는 지대한 지정학적 이점을 확보한 미국 또한, 하와이를 병합하고 에스파냐로부터 쿠바, 필리핀 등지를 빼앗으며 19세기말에는 경제규모가 영국을 앞서는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자 식민제국으로 부상했다. 기관총과 증기기관을 갖춘 철제 군함으로 무장한 서구 열강의 군대 앞에, 비서구 세계의 군대와 전사들은 무력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장에서 대량으로 값싸게 쏟아져 나오는 서구 열강의 품질 좋은 공산품은, 산업 혁명 이전의 전근대적인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비서구 세계의 경제 기반을 파괴하며 그들이 서구 열강에 경제적으로 종속되게끔 만들었다(스벤 베커트 저, 김지혜 역, 2014, 474-505).
독일 통일 과정에서 일어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1-72) 이후, 유럽 내부에서는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채 수십 년이 넘는 평화가 이어졌다. 유럽 각국은 유럽에서의 영토 쟁탈전이 아닌 해외 영토나 식민지 확보에 주력했다. 게다가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프랑스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부르짖어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독일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는, 독일 통일에 성공한 뒤에는 되려 유럽 각국의 세력 균형을 교묘히 이용하여 평화 유지 정책을 펼쳤다.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의 이 같은 외교정책이 성공한 덕분에, 독일 통일 이후 유럽에서는 피비린내와 쇠 냄새가 진동하는 전쟁이 오히려 눈에 띌 정도로 잦아들 수 있었다. 아울러 왕당파와 자유주의자, 공화파 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내전과 혁명으로 비화하던 19세기 중반 이전의 유럽과 달리,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상당수의 유럽 국가가 공화국이 되거나 군주제를 유지하더라도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또한 남북전쟁을 계기로 온전한 국가 통합에 성공했다. 그 덕분에 19세기 서구 세계는 적어도 정치적, 지정학적으로는 안정된 듯이 보였다.
19세기 서구 열강의 변화는 영토나 군사 부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세기 중ㆍ후반을 거치면서 서구 세계에서는 전기, 철도, 기선, 사진, 전신전보, 전화기, 근대적인 상하수도 체계, 세탁기, 근대적인 의학 기술과 제도, 축음기 등 인류의 삶을 근원적으로 뒤바꾼 발명이 쏟아져 나왔다. 이 같은 위대한 발명 덕택에 인류의 생활 수준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하고 발전했다.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경제적 부와 더불어 삶의 질을 혁명적으로 개선한 발명품까지 연이어 등장하면서, 서구 세계에는 과학기술과 인간 이성의 힘을 바탕으로 인류 문명이 영원히 발전하리라는 믿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진 이 같은 풍조가 서구 사회를 지배했던 시대를, '아름다운 시대'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단어인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고도 일컫는다. 벨 에포크의 영광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벨 에포크 시대에 그 찬란한 영광을 누린 사람은 지구상에서 소수에 불과했다. 서구 열강의 침략에 시달렸거나 그들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비서구인들에게, 벨 에포크 시대는 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나라와 자유, 재산과 권리를 빼앗긴 채 착취에 시달렸던 끔찍하고 잔혹하기 짝이 없는 지옥과도 같은 시대일 뿐이었다. 이 같은 벨 에포크 시대의 모순은 비서구 세계의 사람들에게만 가혹했던 것이 아니었다. 서구 열강에서도 벨 에포크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이들은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를 거머쥔 소수의 상류층, 중상류층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한 채 공장이나 탄광에서 하루에 10시간 이상, 많게는 18-20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렸고, 그 대가는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수준의 박봉이었다. 상류층 시민들이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채 화려한 저택에서 호사스러운 파티를 열던 19세기 후반 유럽 대도시의 뒷골목에서는, 수많은 하층민 노동자들이 허름한 단칸방에서 수많은 자녀들과 더불어 쪽잠을 자는 신세에 머물렀다. 이들의 자녀들은 10세 전후의 나이에 학교 대신 공장에 가서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대우와 대가조차 받지 못한 채 중노동에 시달렸고, 그 탓에 건강을 해쳐 성인이 되기도 전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자유의 이름 아래 상류층과 중상류층이 부를 축적할 자유만 보장했을 뿐,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을 자유는 무시했던 초기 자본주의의 병폐가 불러온 비극이었다(조이스 애플비 저, 주경철ㆍ안민석 역, 2012, 173-74).
벨 에포크 시대에 유럽에서 평화가 이어졌다지만, 그 실상은 달랐다. 각각 바다와 유라시아 대륙을 지리적 발판으로 삼은 채 세계의 패권을 노리던 영국과 러시아는, 19세기 내내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 불리는 군사적ㆍ외교적 대립을 이어 갔다(Edwards, 2003, 84). 러시아가 쇠약해진 오스만 제국을 압박하여 흑해를 장악하려 하자, 영국은 프랑스, 사르데냐 등과 동맹을 맺은 다음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여 러시아의 흑해 진출을 저지했다(크림 전쟁, 1853-56). 하지만 러시아는 크림 전쟁에서 실패하기는 했지만 중앙아시아를 착실하게 병합해 갔고, 이후 러시아-튀르크 전쟁(1877-78)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발칸반도의 슬라브계 민족집단이 세르비아, 루마니아, 몬테네그로로 독립하도록 해 주었다.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민족주의 발흥을 이용한 러시아가, 오랜 경쟁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약체화하고 발칸반도를 러시아의 동맹국으로 만들어 자국의 영향력 아래 두는 데 성공한 외교적ㆍ지정학적 쾌거였다. 19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하여 태평양에 진출할 교두보까지 건설했고, 영국은 이런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필리핀 영유권을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아야 했던 미국과 더불어 신생 제국주의 열강인 일본을 대대적으로 지원하여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간신히 저지할 수 있었다(러일 전쟁, 1904-05). 러일 전쟁은 제국주의 열강 간의 지정학적 대립이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했다는 점에서, 제0차 세계대전(World War Zero)이라고도 불린다(Knowner, 2007, 5-11).
서구 세계라는 공간적 범위 밖에서 일어난 제국주의 열강의 대립과 충돌은 그레이트 게임뿐만이 아니었다. 각각 종단 정책, 횡단 정책이라는 식민지 확보 전략을 통해 아프리카를 남북으로, 동서로 식민화해 가던 영국과 프랑스는, 1898년 파쇼다(오늘날 남수단 코도크)에서 충돌을 빚었다. 파쇼다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그나마 내부 정세가 불안했던 프랑스가 영국에 양보하는 바람에, 전쟁으로 비화하는 대신 평화롭게 끝났다. 하지만 미국은 필리핀과 카리브해를 지배하기 위해 에스파냐와 전쟁(미국-에스파냐 전쟁, 1898)을 벌였고, 다른 서구 열강에 비해 산업화도 근대화도 늦었던 에스파냐는 이미 세계 최강국으로 대두한 미국과의 전쟁에서 연패한 끝에 해외 식민지를 잃었다. 1870년 통일을 달성한 뒤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에 뒤늦게 뛰어든 이탈리아 역시, 아프리카를 침략했다가 이미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확보해 가고 있던 프랑스와 극심한 마찰을 빚었다.
독일의 정권 교체는 민족주의의 고조와 맞물려, 서구 세계의 지정학적 갈등과 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남다른 야심가였던 독일의 새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1941, 재위 1888-1918)는, 즉위 직후 비스마르크를 전격 해임한 뒤 대대적인 해군 건설과 식민지 확보에 나섰다. 평화 유지를 위해 영국과의 친선 관계를 도모하고 이를 위해서 해군력을 최소한으로만 유지했던 비스마르크의 정책과는 정반대의 행보였다. 이미 영국, 미국 다음가는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자 과학기술 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성장해 있었던 신생 강대국 독일은, 빌헬름 2세의 지도 아래 영국 다음가는 세계 2위의 해군을 건설하고 아프리카와 태평양에 다수의 식민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아울러 빌헬름 2세는 영국, 프랑스 등을 견제하기 위해 게르만계 국가라는 민족적 동질성을 가진 우방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리고 식민지 확보 과정에서 프랑스와 적대 관계에 몰린 이탈리아를 포섭하여 1882년 삼국동맹을 체결했다.
독일의 이 같은 대두는 영국과 프랑스에 중대한 위기의식을 불러왔다. 가뜩이나 영국, 프랑스를 위협하는 유럽의 강국으로 대두한 독일이 노골적으로 팽창 정책을 이어 가니, 이를 좌시했다가는 제국주의적 국제질서 속에서 두 나라의 위치에는 중대한 타격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다. 1900년 5,600만 명을 넘긴 독일 인구는 각각 4천만 명 정도에 머물렀던 영국과 프랑스를 크게 상회했다. 같은 시기 독일의 GDP 규모는 프랑스(4위)를 앞서고 영국(2위)을 바싹 추격하는 세계 3위 규모였다. 18세기 중반 이래 유럽에서 가장 정강한 육군을 보유했던 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으로 거듭나면서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거듭났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한 뒤 산업의 요지였던 알자스-로렌을 독일에 빼앗기기까지 했던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충만했음은 물론, 노골적으로 팽창해 가는 독일과 동쪽으로 직접 인접했다는 지정학적 위기에까지 직면했다. 빠른 시간 안에 세계 2위 수준까지 성장한 독일 해군은 세계 최강의 해군국 영국 입장에서도 심각한 위협이었다. 독일 하나만 해도 중대한 위협인데, 삼국동맹까지 결성하니 독일의 위협은 더한층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삼국동맹을 견제하기 위해 협력을 이어간 끝에, 1907년에는 러시아까지 끌어들여 삼국협상을 체결했다. 러일 전쟁의 끝물에 일어난 쓰시마 해전(1905)에서 러시아는 일본 해군에게 참패하여 해군력이 사실상 소멸하는 바람에 더 이상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을 이어갈 수 없었고, 러시아의 서쪽에 인접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에게도 만만찮은 위협이었기 때문이었다(Knowner, 2007, 11-14). 그레이트 게임이 사실상 영국의 승리로 끝나다시피 한 20세기 초반의 유럽에는, 그레이트 게임보다도 더 치열한 열강 간의 지정학적 대립과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다. 벨 에포크의 전성기를 맞이한 유럽은, 역설적이게도 열강 간의 거대한 전쟁이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지정학적 위기에 말려들어 가고 있었다.
미국, 영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한 독일이었지만, 20세기 초반의 독일은 지정학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삼국협상의 체결이었다(Manić and Stepić, 2015, 21-23). 삼국협상의 체결로 말미암아 독일은 서쪽의 프랑스, 그리고 동쪽의 러시아라는 거대한 두 적을 양면에서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위기에 내몰렸다. 독일 통일 이후 프랑스는 인구나 경제 규모를 독일에게 추월당했다지만, 여전히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었고 해외 영토와 식민지의 규모는 독일보다도 훨씬 컸다. 비록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독일에게 패배하는 굴욕을 겪었다지만 프랑스 육군은 유럽에서도 그 전통을 알아주는 강군이었고, 해군 역시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게다가 유사시에는 프랑스의 동맹국인 영국이 세계 최강의 해군을 동원해 독일 해군을 견제하면서 프랑스에 병력과 물자를 지원할 수도 있었다. 러시아 역시 러일전쟁에서 어처구니없이 패했다고는 했지만, 그리고 국내의 체제 문제로 인해 소요가 이어지며 혁명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고는 했지만, 유럽 전선에 배치된 러시아 육군의 규모와 전력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더욱이 당시 독일과 러시아의 국경 지대에는 산맥 등 천연 장애물이 크게 발달하지도 않았다. 독일군 못지않은 프랑스-영국 연합군과 수백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군이 동서 양 전선에서 동시에 독일 땅으로 몰려온다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독일군으로도 감당할 가능성이 희박했다. 여기에 덧붙여 삼국협상국의 해외 영토 및 잠재적 동맹국의 규모는 삼국동맹을 능가했다. 러일전쟁 과정에서 영국이 태평양이라는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공유했던 미국과 일본을 동맹으로 포섭한 까닭에, 이들마저 독일과 삼국동맹이 아닌 삼국협상 편에 섰다(김정섭, 2017, 51-52). 장기전이 이어질수록 삼국동맹이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구도까지 더해졌다((Manić and Stepić, 2015, 23). 심하게 말해서 삼국동맹, 특히 독일은 삼국협상국에게 지정학적으로 포위당하다시피 한 형국에 처한 셈이었다.
이 같은 위기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이는, 독일군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Graf Alfred von Schlieffen, 1833-1913)이었다. 백작 작위를 가진 귀족이었던 그는, 독일이 직면한 지정학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프랑스와 러시아의 지리적 차이에 주목했다(Desch, 2002, 96-97). 프랑스는 산업과 인프라가 발달한 선진국인 동시에 뛰어난 군사교리와 질적으로 우수한 병력을 갖춘 군사강국이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국토 규모가 작고 특히 동부전선과 파리 사이의 종심이 200km 이하로 얕다.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대에는 쥐라산맥과 보주산맥이라는 천연 장애물이 분포하지만, 중립국인 벨기에와 네덜란드 방면에는 평탄한 지형이 펼쳐져 있다. 아울러 파리는 벨기에, 네덜란드를 통과하는 축선과 이어진다. 반면 러시아는 국토가 거대한 반면 교통 인프라는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다. 즉, 독일-러시아 전선의 종심은 비교적 깊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동원 체계의 효율성이나 병력의 질적 수준 또한 독일, 프랑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폰 슐리펜은 이 같은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의 지리적 차이에 주목하여, 전쟁이 발발하면 독일군 전력의 90% 가까이를 서부전선에 집중한 다음 중립국을 신속히 통과하여 파리를 점령하고 프랑스의 조기 항복을 받아 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 내기 전에는 동프로이센 등 독일 동부 영토를 과감히 포기한다는 전제까지 명시했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를 굴복한 다음에는, 전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돌려 질적 수준이 낮은 데다 장기간의 행군으로 인해 피로가 누적되고 보급선까지 길어진 러시아군을 격멸하여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1905년 12월에 완성된 이 작전 계획은, 입안자인 폰 슐리펜의 이름을 따 '슐리펜 계획(Schlieffenplan)'이라 불린다. 폰 슐리펜이 리는 이 작전 계획은, 그가 1906년 군대에서 퇴역한 뒤에도 독일군의 핵심 군사교리로 중요시되었다(Foley, 2004, 4).
훗날의 군사사학자들은 매우 치밀하게 수립된 슐리펜 계획의 전략적ㆍ전술적 안목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보급 문제나 기동 문제, 예상외의 돌발변수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훌륭한 이론'의 한계 또한 지적한다(Holmes, 2013, 194-96).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독일군 못잖은 강군이었던 프랑스군이 폰 슐리펜이 의도한 대로 빠른 시일 내에 무너진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품을 만하다. 하지만 폰 슐리펜이 어쩌면 도박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는 이 같은 작전계획을 수립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그가 전쟁의 현실이나 다양한 변수 등을 온전히 살피지 못해서였다기보다는 그만큼 20세기 초반 독일이 처했던 지정학적 위기가 중대해서였다고 봄이 옳다. 제국주의와 맥락을 같이 하며 꽃을 피운 벨 에포크 시대는, 제국주의의 모순과 더불어 역사상 유례없는 거대하고 참혹한 전쟁이 발발할 날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참고문헌
김정섭, 2017, 『낙엽이 지기 전에: 1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 MiD.
스벤 베커트 저, 김지혜 역, 2014, 『면화의 제국: 자본주의의 새로운 역사』, 휴머니스트.
조이스 애플비 저, 주경철ㆍ안민석 역, 2012, 『가차없는 자본주의: 파괴와 혁신의 역사』, 까치.
Desch, M. C. 2002. Planning war in peacetime. Joint Forces Quarterly, 30, 9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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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ey, R. T. 2004. Preparing German army for the First World War: The operational ideas of Alfred von Schlieffen and Helmuth von Moltke the Younger. War & Society, 22(2),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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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ić, E., and Stepić, M. 2015. Geopolitical and geoeconomic cause of the First World War. Serbian Political Thought, 11(1), 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