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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Jul 12. 2020

러시아 전승기념일과 불멸의 연대 서울 행사의 지리학

서울에서 개최되는 러시아 2차대전 전승기념일 행사의 장소적 의미

  공간과 장소, 지역은 어떻게 다를까? 선문답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지리학에서는 이 세 가지 개념을 구분한다. 공간이라 함은 말 그대로 수리적, 계량적인 공간을 의미하며, 지역이라 함은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지표 공간의 단위를 말한다. 그리고 장소라 함은 정체성, 애착, 기억 등과 같은 주관적인 정서나 의미가 부여된 대상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북위 38도, 동경 129도 하는 식의 수리적 위치는 공간, 불교 문화권, 영동지방, 유라시아 등은 지역 개념과 관련된다. 그리고 신혼여행의 추억이 깃든 곳, 되돌아가고 싶은 모교 등과 같은 것들은 장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장소가 주관적 속성을 가진다는 사실은, 장소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제주도 섭지코지, 강릉 정동진 등과 같은 명소들에서 이러한 장소의 속성을 살펴볼 수 있다. 섭지코지나 정동진은 본래 바닷가의 경치 좋은 곳이었지만, 모래시계, 올인 등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드라마의 배경 장소가 되면서 드라마의 감동과 명장면을 재현(representation)한 장소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지리학자들은 이러한 과정을 ‘장소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장소의 생산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016년 탄핵정국 때의 광화문 촛불집회를 예로 들어 보자. 경복궁, 인왕산, 청와대를 배경으로 각진 고층건물을 벽처럼 두른 채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선 이 광장은, 대한민국의 국가 체제와 정통성, 질서를 재현한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탄핵 촛불집회는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다. (잘못된) 권위에 대한 도전은, 바로 그 권위를 재현하는 장소에서 이루어질 때 그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1-1991)는 전자와 같은 권위, 질서, 체제 등의 장소적 재현을  ‘공간의 재현(representation of space)’, 후자와 같은 장소를 통한 저항, 체제 변화 시도 등을 ‘재현의 공간(space of representation)’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하기도 하였다.  


  군사 퍼레이드를 비롯한 대규모 행사, 축제, 집회, 퍼레이드, 열병식 등은 기본적으로 지리적 의미를 가진다. 왜냐 하면 이 같은 행사나 활동은 기본적으로 대규모 장소를 배경으로 하며, 그러한 행사나 활동이 장소를 통해 이루어짐으로써 해당 장소는 단순히 넓은 장소, 특정한 활동이 일어난 장소의 의미를 넘어 해당 행사, 활동 등이 추구하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메시지를 재현하는 장소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예컨대 김현철(2015)은 퀴어 퍼레이드를 통해서 성소수자들은 퍼레이드가 일어난 도시공간과 장소를 '주류 사회'로부터의 배제에서 벗어나 상호 연대하고 이성애적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을 실천하는 장소로 만들어 간다는 논의를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정희선(2004)은 1970년대 이후 명동성당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민주화운동이 명동성당이라는 장소가 종교적 성지로서의 의미와 사회적인 저항을 재현/실천하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결합하면서 고유한 장소적 의미를 생산하는 양상에 대해서 논의하기도 하였다. 즉, 어떠한 행사나 집회 등의 개최는 단순히 기념이나 시위, 추모, 축하 등을 한 번 해 보는 수준을 넘어, 그로 인해 장소의 의미가 생산 및 변화되고 이는 사회와 정치, 문화의 변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의 총본산이기도 하지만, 민주화운동의 배경이 되면서 민주화에 지대한 기여를 한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출처: 가톨릭굿뉴스)

  이어지는 절에서는 러시아의 2차대전 전승기념일 행사, 그리고 한국에서 매년 개최되는 전승기념일 행사인 "불멸의 연대" 행사의 지리적 의미에 대해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사에서 미증유의 비극이기도 했지만, 구소련 입장에서는 더더욱 크나큰 비극이었다. 1941년에 나치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이후, 종전시까지 소련은 나치독일의 침공에 맞서 싸우며 1천-2천만 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감내해야 했다. 개전 초기 전쟁 준비도 채 갖추지 못했던 소련군은, 세계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던 나치독일군의 공세에 연패를 거듭하며 막대한 인명과 영토의 손실을 입었다-나치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수십만에 달하는 집단군 병력이 말 그대로 ‘증발’해 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을 정도였다. 1942-3년 이후 소련군은 전열을 정비하며 반격에 나섰지만, 소련군은 승리를 거두었던 전투에서조차 나치독일군보다도 월등히 많은 인적, 물적 손실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소련 침공을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 확보를 위한 전쟁으로 여겼던 나치독일은 점령한 구소련 영토에서 ‘열등한’ 슬라브 민족에 대한 인종청소 범죄를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구소련, 특히 러시아계 민간인들도 목숨을 잃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나치독일의 지상군 병력과 맞서 싸웠던 주체는 바로 소련군이었다.

1950년도 러시아의 인구피라미드. 2차대전의 막심한 병력 소모로 인해 25세 인구부터 성별 인구가 현저한 불균형을 보인다.(www.populationpyramid.net)

  하지만 소련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내 나치독일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감수하며 나치독일의 병력과 싸웠던 주체는 바로 구소련이었기 때문에, 소련은 2차대전 종전 후 미국과 더불어 세계 질서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상과 발언권을 얻을 수 있었다. 2차대전후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이 자국의 의사와 무관하게 공산화되었던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구소련은 특히 1960-70년대 이후 나치독일이 소련군에게 항복한 날인 5월 9일을  ‘전승기념일(День Победы)’로 정하여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기는 했지만, 독소전쟁의 승리는 소련이 국난을 극복하고 초강대국으로 거듭났다는 자긍심을 상징했기에 구소련 구성국들, 그중에서도 러시아에서 자랑스러운 영광의 역사로 높이 평가되어 오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 정부는 매년 ‘불멸의 연대(Бессмертный Полк)’라는 이름의 열병식과 행진이 중심을 이루는 전승기념일 행사를 붉은 광장에서 대대적으로 개최해 오고 있으며, 모스크바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각 도시에서도 중요 행사로 개최하고 있다.

2019년 러시아 전승기념일 퍼레이드 장면(출처: 타스통신)

  러시아 전승기념일 행사는 단순히 2차대전을 추모하기 위한 행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2차대전은 오늘날 국제질서와 지정학의 토대가 만들어진 계기였고, 구소련은 2차대전을 통해서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는 소련군이 2차대전 내내 막대한 영토와 수천만에 달하는 인명을 손실해 가면서 결국 나치독일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기원한다. 이미 1991년에 구소련이 해체되기는 했지만, 러시아 연방은 전승기념일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해 오고 있다. 이는 2차대전의 승리와 이후 국제 질서의 형성이 소련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붉은 광장이라는 장소에 재현함으로써, 대내적으로는 러시아 연방정부의 정통성과 권위를 확립하고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을 과시하려는 목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즉, 러시아 정부는 붉은 광장이라는 '가장 러시아적'이라 할 만한 장소, 러시아의 권위와 정통성을 가장 선명하게 상징하는 장소에 2차대전의 승리, 그리고 러시아의 강력한 군사력과 외교적 영향력을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통해 성대하고 웅장하게 재현함으로써, 러시아의 정당성과 권위를 확립하고 자국의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영향력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러시아 정부가 매년 전승기념일 행사장에 외국 정상들을 초대하여 열병식을 관람케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2015년 러시아 전승기념일 행사에 참석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출처: 중국 신화통신)

  그런데 러시아 전승기념일 행사가 한국에서도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2010년대에 후반부터, 주한 러시아 대사관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5월에 전승기념일 행사가 열리고 있다. 2017-18년에 대학로에서 열렸던 이 행사는, 2019년 5월 11일에 신도림 오페라하우스에서 개최되었다. 2019년 행사는 러시아인들로 성황을 이루었으며, 참석자들은 서울 전승기념일 행사를 통해서 서울이라는 이주지에 러시아의 역사적, 민족적, 정체성을 재현하는 장소성을 생산하였다.

2019  서울 불멸의 연대 행사 장면. 참석자들은 2차대전에 참전한 조상들의 사진을 들고 있다.
나치즘과 나치독일에 대한 승리라는 러시아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재현한 현수막
구소련, 러시아가 나치즘을 격파했음을 잊지 말아 달라는 문구가 적힌 조형물

  위에 제시한 사진들은 필자가 2019년 행사에 참석해서 촬영한 것들이다. 위의 사진들을 통해서 한국으로 이주했거나 한국에 체류/거주 중인 러시아인들이 ‘나치즘을 격퇴한 주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서울 전승기념일 행사장(신도림 오페라하우스)에 재현하는 양상, 그리고 이를 통해 서울 전승기념일 행사장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한국 사회에 이러한 정체성을 전파하는 장소로 만드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2019년 서울 전승기념일 행사장에서 구소련/러시아 군가 “슬라브 여인의 작별”을 공연하는 모습. 2차대전 승전의 주체, 파시즘을 격퇴한 주체라는 정체성이 선명하게 재현되어 있다.
전승기념일 공식 가요인 “전승기념일(День Победы)”를 합창하는 행사 주최진과 참석자들. 서울 전승기념일이 재현하는 장소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향후 그 양상과 의미에 변화가 따르리라 생각되지만, 어쨌든 현대 사회는 세계화 사회이다. 그런 만큼 사람과 정보, 재화의 초국가적 이주는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세계화가 세계를 완전히 균질한 공간으로 바꾼 것은 아니었으며, 지구촌 사회에서의 이주와 교류가 활발해질수록 국가별, 지역별로 다양한 정체성과 로컬리티가 더욱 부각받고 있다. 2차대전의 종전으로부터 이미 7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나치독일도 구소련도 이미 역사책 속의 국가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2차대전이 만들어낸 국제질서가 오늘날의 국제질서의 뼈대를 이루고 있듯이, 2차대전에서의 막대한 희생과 승리라는 정체성은 여전히 러시아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정체성은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그리고 최근에는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전승기념일 행사를 통해 재현되고, 강화되고, 재생산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오늘날의 장소, 문화, 경관과도 결코 분리되어 생각되기 어려운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후기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서울 러시아 전승기념일 행사는 개최되지 못했다. 본래 2020년 행사에 참여후 그 내용을 주제로 문화지리학 학술논문을 작성할 계획이었고 이를 위해 주한 러시아 대사관과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내년에는 행사가 잘 개최되어, 이 주제로 학술논문을 쓴다는 내 꿈도 이루어지기를 빈다.



참고문헌


김현철, 2015, "성적 반체제자와 도시공간의 공공성: 2014 신촌 퀴어퍼레이드를 중심으로," 공간과 사회, 25(1), 12-62.

정희선, 2004, "종교 공간의 장소성과 사회적 의미의 관계  :  명동성당을 사례로," 한국도시지리학회지, 7(1), 9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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