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시대의 서막을 연 황건적의 난에 대한 지리적 고찰
정사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의 출발점인 황건적의 난은 한 왕조의 멸망과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기를 초래한 신호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음양오행설에 따라 한나라의 푸른 하늘(蒼天)을 몰아내고 새로운 누런 하늘(黃天)을 받들겠다며 일어난 황건적의 난은 후한 정부에 의해 진압되며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로 인해 수많은 정치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에 시달리며 쇠퇴해 가던 후한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은 채 결국 망국의 길에 접어들고 말았다.
그런데 황건적의 난은 왜 일어났을까? 그리고 후한 시대에는 수많은 농민 반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황건적의 난이 그토록 역사적으로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을까? 물론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원인으로는 영제(靈帝, 156~189, 재위 168~189)의 무능함과 외척의 득세, 십상시로 대표되는 환관 세력의 전횡과 국정농단, 후한 관료집단의 부정부패 등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농민 반란에 비해 황건적의 난이 규모가 월등히 커서 후한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황건적의 난을 이해하는 데 충분하지 못한 측면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여기서는 황건적의 난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그리고 어째서 후한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부상하기까지 했는지를 지리적 관점에서 접근해 보고자 한다. 이에 따라 황건적의 난 발발을 기후변화와 연관 지어, 그리고 그 영향을 지정학과 관련지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중국에서 등장한 중앙집권적 통일 왕조의 시초는 진나라였지만, 실질적인 첫 통일 왕조는 한나라였다. 진나라는 불과 15년을 넘기지 못하고 멸망한 반면, 한나라는 전한과 후한을 통틀어 4백 년 이상 지속하면서 중국 땅을 통일된 영역으로 재편하고 ‘한족’과 ‘한자’로 은유되는 통일된 중국 문화의 기틀을 다졌다.
그런 한편으로 중국은 고대 상나라와 주나라 시대부터 상상 이상으로 발달된 사회보장제도를 발달시켜 왔다. 상나라, 주나라,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들은 흉년이나 자연재해, 역병의 창궐 등을 대비하여 식량을 비축하고 유사시 이를 구휼에 활용하는 제도, 고아나 환자, 부양자가 없는 노인, 빈민 등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제도 등을 운영해 왔다. 백성에 대한 사회적 보장을 통해 민심을 다스리려는 시도였다. 한나라는 이 같은 전통적인 사회보장제도를 법제화하여 사회 통합과 민심의 안정을 위한 제도를 정비했다.
후한의 이 같은 사회보장제도의 주체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향촌사회와 향리 또한 포함했다. 농경문화에 기반한 고대 왕조인 후한은 법령을 통하여 사회보장제도를 제도화하였지만, 농촌 사회의 사회보장 실무는 농촌의 공동체에 맡긴 부분이 컸다. 한나라가 강력한 통일 제국이기는 했지만 고대 사회의 특성상 오늘날처럼 중앙정부가 사회보장 제도를 전적으로 시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농촌 사회의 실세였던 향리들은 지방관과 협력하여 후한 왕조를 지탱했던 사회보장 제도의 실무를 담당하는 주체로 활약했다. 평시에는 지방관을 보좌하며 한나라의 지방 행정을 도맡았던 향리들은, 가뭄이나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닥치거나 빈민, 미혼부모, 부양할 자녀가 없는 노인, 고아 등이 발생하면 지방관을 보좌하여 한나라의 안정적인 발전에 중요한 축을 맡았다.
후한의 사회보장 제도는 기후변화로 인해 중대한 타격을 입었다. 기원전부터 이루어져 온 동아시아의 한랭화는 후한대까지 지속되었다. 사실 동아시의 한랭화는 전한기 등에는 한나라에게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한랭화로 인해 북방의 몽골 스텝 지대가 중국 대륙에 앞서 황폐화되면서, 무제(武帝, 기원전 157-기원전 87, 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는 오랫동안 한나라의 상국 행세를 하던 흉노족을 무찌르고 한나라의 판도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문제는 동아시아의 한랭화가 무제 사후 1-2세기가 지난 기원전 1-2세기가 넘도록 이어졌다는 점이었다. 2-3세기가 넘도록 이어진 동아시아의 한랭화는 흉노를 이어 남쪽의 한나라까지 황폐화시켰다. 기후가 한랭해지니 농업 생산성은 자연히 떨어졌고, 이는 한나라의 경제력을 악화시켰다. 그 직격탄은 농촌 사회의 농민들에게부터 돌아갔다. 후한 후기였던 2세기 중반 무렵부터 농업 생산량이 인구 부양력 아래로 떨어질 정도로 감소한 데다 날씨까지 추워지면서 후한의 농민들은 기아와 질병에 시달렸다. 이들을 구제할 사회보장 제도 역시 농업 생산량 저하로 인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서, 후한 농민들의 고난은 더한층 가중되었다. 굶주림과 빈곤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유랑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농촌 공동체는 와해되어 갔다. 이는 가뜩이나 삐걱이던 후한의 사회보장제도를 더한층 악화시켰다. 사회보장 제도의 실무를 담당하던 농촌 공동체가 와해되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사회보장 제도의 악화는 농촌 공동체의 지속적인 악화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유랑민으로 전락한 농민들은 각지를 떠돌며 유리걸식하다가 떼강도로 돌변하는 경우도 잦았다. 농업 생산력과 사회보장제도가 계속해서 악화되면서, 후한 각지에서는 궁지에 몰린 농민들에 의한 봉기와 민란이 잇다랐다. 전한의 전성기라 할 수 있었던 기원전 1-2세기에 흉노 제국을 무너뜨린 동아시아의 기후변화는, 기원후 2세기에 접어들면서 후한마저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기후변화에 따른 한발과 농업생산성 악화가 민란과 농민봉기를 촉발시켰다고는 하지만, 황건적의 난은 어떻게 지방 민란 수준을 넘어 4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한 왕조의 멸망을 가져온 역사적 전환점으로 비화될 수 있었을까? 장각은 어떻게 황건적의 난을 전 중국 땅을 뒤흔든 거대한 폭풍으로 비화시킬 수 있었을까?
이는 황건적이 단순한 민란이나 농민봉기가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던 데 기인한다. 황건적의 난은 바로 도교의 일파인 태평도에 토대한 반란이었고, 그랬기에 빈곤과 기아, 질병에 시달리던 후한의 민중에게 새 세상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심어줄 수 있었다. 아울러 고대 중국의 중심지이자 광대한 평야 지대인 중원의 지형은 태평도의 확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춘추전국시대에 활동한 노자(?-?)와 장자(기원전 369?-기원전 289?)가 설파한 노장 사상을 토대로 발전한 도교는 무위자연(無爲自然), 즉 인위적인 욕심이나 고집을 버리고 자연의 섭리에 따른 삶을 추구한다. 이 같은 도교의 교리는 끊임없는 전란에 지친 춘추전국시대에 지칠 대로 지친 중국인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며 널리 퍼져갔다. 도교는 그저 민중에게 위안과 희망을 가져다준 종교에 그치지 않았다. 문제(文帝, 기원전 196-기원전 157, 재위 기원전 180-기원전 157), 경제(景帝,기원전 188-기원전 141, 재위 기원전 156-기원전 141) 등 전한의 황제들도 초한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도교 사상을 정치에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도교는 후한 이후 유교, 대승불교 등과 더불어 중국 정신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종교이자 사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후한의 농촌 사회가 붕괴하기 시작한 2세기 중, 후반에 이르러 후한의 민중들은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이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종교였다. 아직 대승불교는 중국 땅에 유입된 지 얼마 안 되었고, 유교는 현실 위주의 합리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런 점에서 무위자연 사상에 토대한 도교는 중국 민중의 열망을 채워 주기에 적합한 부분이 컸다.
이 무렵 등장한 도교의 종파가 바로 태평도(太平道)였다. 도교의 교리에 중국의 전통적인 음양오행 사상, 그리고 무속신앙을 결합한 태평도는 장각(張角, ?-184)에 의해 창시되었다. 장각은 170년대 무렵부터 우길(于吉, ?-?)이라는 신령스러운 인물에게 받았다는 경전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의 가르침을 설파하며 신도를 모았다. 재물은 천하 자연의 것이니 백성들이 공평하게 나누어야 한다는 도교의 교리와 《태평청령서》의 내용에 따라 식량과 재물을 공평하게 분배할 것을 주장하고 환자들을 간호, 치료했던 장각의 주위에는 자연스럽게 수많은 후한의 민중들이 모여들었다. 후한 말의 혼란기에 등장한 또 다른 도교의 종파인 천사도(天師道: 입교 조건으로 쌀 다섯 말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오두미도(五斗米道)’라는 이름으로도 불림)가 비교적 오지에 속했던 데다 험준한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인 한중에서 창시된 까닭에 지리적 확산이 제한되었던 데 반해, 중원을 지리적 배경으로 했던 태평도는 빠른 시일 내에 후한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장각은 태평도 공동체를 통하여 민중을 구휼하는 데 힘썼고, 빈곤과 기아, 질병에 시달리던 후한의 백성들은 붕괴한 농촌 공동체와 무너진 후한의 사회보장제도의 대안과도 같았던 태평도에 너나할 것 없이 몸을 바쳤다.
후한 조정과 관리들은 이 같은 태평도의 교세 확장을 달가이 여기지 않았다. 자칫하면 후한 조정과 체제를 위협하는 거대한 정치 세력이나 군벌로 비화할 소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정과 관청이 태평도를 서서히 옥죄기 시작하자 장각은 거병할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후한의 사회적 부조리는 곪을 대로 곪아 있었고, 장각을 따르는 태평도 신자들은 수만-수십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결국 183년 장각은 한나라를 뒤엎을 거대한 봉기를 일으켰다. 태평도의 교리에 따라 스스로를 대현량사(大賢良師) 겸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칭했고, 동생인 장보(張寶, ?-184)와 장량(張梁, ?-184)에게는 각각 지공장군(地公將軍)과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는 장군직을 내렸다. 태평도 교리의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던 음양오행 사상을 바탕으로 태평도 봉기군의 슬로거도 정했다. ‘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재갑자 천하대길(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즉 한나라의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태평도의 누런 하늘이 당연히 이를 대체하며 갑자년(甲子年: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이듬해인 184년을 말한다)은 대길하리라는 뜻의 슬로건이었다. 이에 따라 장각을 따르는 자들은 누런 두건을 썼다. 이로써 후한의 멸망을 초래하고 중국사를 뒤흔든 황건적의 난이 시작되었다.
황건적의 난은 삽시간에 후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후한 각지에 태평도 신자들이 널리 퍼져 있었고, 이들은 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에 신속하게 대규모의 군사적 봉기를 일으킬 수 있는 조직력도 갖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지리적 배경인 중원은 천연 장애물이 발달하지 않은 광대한 평야 지형이기 때문에, 황건적의 병력은 더한층 빠른 속도로 조직될 수 있었다.
황건적은 단순히 후한 조정과 사회에 대한 적개심만 강한 반란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태평도에 대한 신앙심으로 굳건하게 정신을 무장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들이었다. 애초에 황건적이 머리에 두른 누런 두건, 즉 황건부터 태평도의 교리를 상징하는 종교적 상징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규모는 물론 전투력 측면에서도 일반적인 민란군과는 차원이 달랐다. 삽시간에 일어난 대규모의 황건 전사들의 결사적인 진격 앞에 후한의 지방군은 속절없이 무너져 갔다. 184년에 이르러 중원의 상당 부분을 장악한 황건적은 후한의 수도 낙양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낙양은 개방된 지형에 위치했기 때문에 이 같은 내란에 대처하기에는 불리한 입지조건을 갖고 있었고, 이 때문에 후한은 황건적에게 낙양을 함락당하고 나라가 멸망할 풍전등화의 위기에까지 내몰렸다.
하지만 이 무렵에 이르러 황건적의 난은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황건적은 기본적으로 종교 조직이다. 난세의 민중에게 희망을 주고 식량과 질병 치료 및 간호를 제공하는 자치적인 공동체 조직으로써야 어땠을지 몰라도, 본격적인 국가조직이나 군사조직으로서의 체계나 기강은 온전히 잡히지 못했다. 장각 역시 종교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는 출중했을지 몰라도, 대규모 병력의 기강을 확실하게 통제하고 국정을 운영할 만한 경험이나 역량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적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황건적의 난이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각지의 병력과 부대들의 일탈도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후한의 영토를 점령한 황건적 가운데 다수는 후한에 대한 분노와 군사적 승리에 대한 도취감을 이기지 못하고 약탈과 방화, 살인 등의 범죄 행각을 일삼기 시작했다. 황건적이 가진 체계의 한계로 인해 장각이 이 같은 휘하 병력의 기강 해이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데도 제약이 컸다.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종교적인 순수함이, 느슨하게 연결된 종교 조직의 한계로 인해 초심을 잃고 도적떼로 전락한 셈이었다.
‘창천이사(蒼天已死)’라는 슬로건과 달리 한나라가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문제였다. 비록 말기적 상황에 처했다고는 하나, 후한은 아직 국가로서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십상시 등의 국정농단을 자행하는 간신배에게 휘둘렸다고는 하나 후한 황제와 황실의 권위는 아직은 존중받고 있었고, 후한 영토 역시 춘추전국시대처럼 분열된 상태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조조(曹操, 155-220), 원소(袁紹, ?-202), 손견(孫堅, 155-191), 유비(劉備, 161-223) 등은 자신의 지리적 연고지에서 황건적의 난을 진압할 의용군을 일으킬 수 있었다. 게다가 서량(西凉), 요동(遼東) 등의 군사 요충지, 그리고 낙양 등의 정치적 요지에는 황건적이 이제껏 상대해 왔던 지방군과는 격이 다른 대규모의 정예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4년 장각이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장각의 개인적인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부분이 컸던 황건적 세력에게 장각의 죽음은 치명타였고, 후계자 격이었던 장보와 장량은 형을 대체할 역량을 갖지 못했다. ‘천하대길’이 일어난다는 184년은 황건적의 구심점을 앗아간 해가 되고 말았던 셈이다.
조직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황건적은 주준(朱儁, ?-195), 황보숭(皇甫嵩, ?-195), 동탁(董卓, 139?-192) 등이 지휘하는 후한의 관군과 각지의 의용군에 의해 결국 184년 진압되고 말았다. 장보와 장량은 전사했고, 후한군은 장각의 시신을 부관참시한 뒤 그의 머리를 낙양에 효수했다. 한때 수많은 후한 민중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던 태평도는, 황건적의 난이라는 실패한 대규모 반란으로 끝나고 말았다.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 후한은 그 대가로 승리의 영광을 맛보는 대신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경작지가 황폐화됨에 따라 후한은 국력과 경제력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다. 황건적의 난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하고 그 규모를 키워버린 후한 조정은 민심은 물론 국정을 장악할 동력까지 크게 잃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건적의 난이 중국 전역에 걸쳐 대규모로 이루어지다 보니, 후한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중앙군뿐만 아니라 이민족 방어의 최전방에 해당했던 서량 등지에 주둔했던 병력, 그리고 각지의 의용군 병력까지 동원해야 했다. 황건적의 난이 끝난 뒤 동탁, 공손찬(公孫瓚, ?-199) 등과 같은 지방군의 지도자, 그리고 의용군 지도자들은 황건적의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규합한 군사력과 반란 진압에서 세운 전공을 명분 삼아 지역 군벌 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한 왕조가 수백 년에 걸쳐 구축한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의 영토 체제에 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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