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탁의 집권과 국정 농단에 대한 지리학적 재해석
황건적의 난으로 후한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그렇다고 후한이 하루아침에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후한은 황건적의 난이 진압된 지 26년이나 지난 220년까지 존속했다. 하지만 무려 한 세대 가까운 이 기간 동안 후한은 사실상 이름뿐인 제국으로, 한 왕실은 권신의 꼭두각시로 전락했으며 지방 영토는 군벌 세력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처럼 후한 영토가 군웅이 할거하는 땅으로 변모한 직접적인 계기는 바로 동탁의 집권이었다. 동탁이 후한의 소제(少帝, 176-190, 재위 189)를 멋대로 폐위하고 헌제(獻帝, 181-234, 재위 189-220)를 옹립한 다음 헌제를 꼭두각시 삼아 후한의 국정을 농단하며 독재자로 군림했다. 동탁의 집권 기간 동안 세력 기반을 잃은 헌제와 한 왕실은 이후에도 이각(李傕, ?-198년), 조조 등과 같은 권신들에게 실권을 빼앗긴 채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게 해 줄 도구처럼 이용당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국정농단과 폭정을 일삼는 동탁을 벌한다는 명분으로 각지의 제후와 군벌들이 의용군을 일으키면서,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이미 크게 흔들린 후한 왕실의 영토 장악력은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약화되고 말았다. 지방 군벌과 제후들은 동탁이 실각한 뒤에도 자신들의 영지를 지리적 기반으로 삼아 권력과 영토를 얻기 위한 항쟁을 거듭했고, 이는 한 왕실이 몰락하고 중국 영토가 위, 오, 촉한의 삼국으로 재편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런데 동탁은 어떻게 해서 후한 정권을 그토록 신속하고 손쉽게 장악할 수 있었을까? 《삼국지연의》에서 심술궂고 사악한 외모와 비대한 몸집을 가진 데다 사악하기 그지없을뿐더러 군사적으로는 무능한 인물처럼 묘사된 동탁이기에, 《삼국지연의》에 익숙한 독자 여러분이라면 동탁이 그저 시대를 잘 만났거나 단순히 정치적 모략에만 능했기 때문에 그 같은 국정농단을 일삼을 수 있었으리라고 여기리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동탁을 모범적이거나 훌륭한 정치지도자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동탁이 일개 군벌을 넘어 후한의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농단을 일삼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치군인으로서는 상상 이상의 수완가였던 동탁 개인의 역량뿐만 아니라 그의 세력 기반이었던 서량 땅이 후한 말에 가졌던 지리적 의미도 자리 잡고 있었다.
후한의 13개 주 가운데 북서쪽 끝에 위치한 양주(凉州)는 오늘날 중국 간쑤성(甘肅省) 일대이다. 간쑤성은 타림분지를 비롯한 신장위구르 자치구와 인접한다. 이 지역은 오늘날에는 엄연히 중국의 영토지만, 청나라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이 아닌 유목민의 땅이었다. 그리고 신장위구르 자치구 서쪽에는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분포한다. 즉, 간쑤성 서쪽은 고대 이래 온전한 중국 땅이라기보다는 중앙아시아라고 간주할 만한 땅이었다. 그리고 양주, 즉 간쑤성은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일종의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하던 지역이었다. 실제로 간쑤성에는 옛 중국 왕조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교역사를 보여 주는 유적과 유물이 다수 남아 있으며, 이 때문에 간쑤성은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심지어 간쑤성은 중원이나 관중, 쓰촨 등 중국 본토와 차별화되는 스텝 기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즉, 기후나 식생 경관으로 따지자면 후한의 북서쪽 변경이었던 양주는 후한 본토보다는 중앙아시아에 가까운 모습을 한 지역이기도 했다.
서량이라는 지명은 양주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후한은 북서쪽의 중앙아시아 스텝 지대에서 살아가던 유목민과 교류했고 그들과 대립하기도 했으니, 서량이 후한에서 강(羌)족을 비롯한 유목민의 침입을 방어하는 안보상의 최전선이자 유목민과의 교역이 행해지는 경제적 요지가 됨은 필연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스텝 지대인 데다 중원, 관중 등지와도 거리가 멀었던 양주는 농업에 경제적 기반을 두었던 후한 시대에는 정치와 사회의 중심지라고 보기는 어려운 지역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안보와 교역상의 중요성 때문에 서량은 단순한 오지라기보다는 정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후한 정부는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땅이었다. 강족 등 기마 궁술에 능숙한 유목민,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반독립 세력과의 대치가 이루어지는 서량 땅에는 필연적으로 기병 중심의 정예군이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유목민과의 전투 및 반란 진압을 통해 실전 경험을 축적한 이들의 전투력은 한군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동탁은 이 같은 서량에서 세력을 키우며 군벌로 성장한 인물이었다. 《삼국지연의》 등의 문학 작품과 매체에서 동탁은 대단히 비대한 몸집에 심술궂은 생김새를 한 가진 무능하고 포악하며 탐욕스러운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지만, 실제 동탁은 서량에서 숱한 전투에서 무공을 세우며 강족에게 두려움을 샀던 용장이었다. 게다가 동탁은 배포가 크고 베풀기를 잘하여 부하들의 인망을 모았을 뿐만 아니라, 유목민과 교섭하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데도 능숙한 인물이었다. 이런 동탁이 서량의 군 지휘관을 넘어 군벌로 성장할 수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탁은 분명 유능한 군벌이자 정치군인이었고 힘이 장사였지만, 군사적 재능이 완전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다. 일례로 그는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던 도중 패전의 책임을 물어 파직된 적이 있었다. 184년 지방 세력인 변장과 한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동탁은 조정이 파견한 장온(張溫, ?-191)을 받들며 반란 진압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몇 번의 패전도 경험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량에서 동탁의 카리스마는 흔들리지 않았고, 정치공작에 능했던 그는 조정의 고관들을 매수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동탁의 군사적 실패는 일종의 실책으로 보아야지, 그가 군사적으로 아주 무능했음을 의미하는 근거로 보기는 힘들다. 애초에 그런 인물이었다면 아무리 인덕과 정치수완이 뛰어났다고 한들 다른 곳도 아니고 최전방인 서량에서 힘을 키우지는 못했을 테니까.
189년 일어난 십상시의 난은 동탁에게 절호의 기회를 주었다. 영제가 세상을 떠난 뒤 소제가 즉위하자, 대장군 하진(何進, ?-189)은 소장파 관리와 장수들을 규합해 영제를 주무르며 전횡을 일삼던 열 명의 환관, 즉 십상시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낙양의 병권을 장악한 하진은 십상시를 궁지에 몰아넣었지만, 십상시는 그를 궁궐로 유인한 뒤 암살했다. 그러자 하진의 최측근 참모였던 원소는 병력을 이끌고 십상시를 모조리 제거했다. 하지만 난리통에 낙양의 치안은 엉망이 되었고, 하진과 달리 대장군이 아니었던 원소는 낙양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이 와중에 소제와 동생 유협은 난리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낙양에서 정변이 발생하자, 동탁은 이를 평정한다는 구실로 낙양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동탁은 겁에 질린 채 소수의 수행원들만 데리고 떠돌던 소제 형제를 발견하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원소와 조정 대신들은 소제를 앞세워 낙양에 입성하는 동탁을 저지할 힘이 없었다. 병력도 부족했거니와, 황제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동탁에게 빼앗겼으니까. 이로써 동탁은 지방의 유력 군벌에서 후한의 정권을 장악한 거물로 자리 잡게 된다.
《삼국지》와 《삼국지연의》는 공히 동탁을 극도로 탐욕스럽고 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자라고 기록한다. 단지 자신에게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옛 상관이자 조정의 최고위 대신인 사공 장온을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꽃놀이를 나온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했다는 기록도 있다. 서량에서 부하들은 물론 이민족의 인망까지 샀던 덕장의 모습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모습이다.
어쩌면 이는 동탁의 출신 배경과도 관계있을지 모른다. 서량에서야 부하들과 이민족의 존경을 받던 동탁이었지만, 낙양에서 동탁은 정치적 배경이 없이 그저 군사력과 시운 덕택에 정권을 잡은 인물이었다. 이각이나 곽사(郭汜, ?-197) 같은 부하들 역시 서량에서 용명을 떨쳤던 맹장이기는 했지만, 노련한 정치가와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었고 낙양과 후한 조정에 연고도 없는 이들이었다. 서량에서 동탁이 보여준 인덕은, 사실 지방 군벌의 인덕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부하의 존경을 받는 카리스마를 가진 동탁이었지만, 백성의 삶을 어루만지고 조정의 대신과 후한 지배층의 갈등을 조정할 정치가로서의 역량, 난세를 헤쳐나가고 새 시대의 비전을 제시할 지도자로서의 자질까지 갖추지는 못했다. 그런 그가 정권을 잡았으니, 공포정치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
동탁은 이처럼 공포정치를 이어간 데다, 소제를 멋대로 폐위하고 유협을 새 황제, 즉 헌제로 옹립했다. 헌제가 소제보다 자질이 뛰어나다는 구실을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조종하기 쉬운 황제를 꼭두각시처럼 내세우겠다는 의도였다. 이로 인해 후한 조정의 대신과 관료들은 물론 각지의 군벌과 제후들은 동탁에 대해 극심한 적개심을 키웠고, 결국 190년에는 원소와 조조를 필두로 한 반동탁 연합군, 즉 18로 제후 연합군이 결성되기에 이른다.
18로 제후 연합군의 공격에 동탁은 고전했다. 궁지에 몰린 동탁은 결국 낙양을 초토화하고 전한의 수도였던 장안으로 철수한다. 기껏 점령한 낙양이 초토화된 탓에 18로 제후 연합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지며 내분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보급 문제까지 불거지기 시작했다. 천혜의 요새 관중분지 너머로 진격할 역량은 이미 사라졌다. 18로 제후 연합군은 결국 와해되었고, 제후들은 군사를 이끌고 각자의 영지로 돌아갔다.
18로 제후 연합이 소멸하자 동탁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를 정도로 치솟았다. 원소, 조조, 공손찬() 등의 제후들은 자기 영지와 병력을 온존하기는 했지만, 이미 대세가 동탁에게 넘어간 이상 더 이상 그에게 도전하는 대신 동탁의 권력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절대권력을 거머쥔 동탁은 주색잡기를 즐기며 공포정치를 이어 갔다.
이 무렵 동탁의 측근이자 맹장인 여포(呂布, ?-198)가 동탁의 시녀와 사통하는 일이 일어났다. 《삼국지연의》는 왕윤의 시녀 또는 수양딸인 초선이라는 미녀를 두고 동탁과 여포가 싸움을 벌였다고 묘사하지만, 이는 문학적인 창작이다. 여포는 동탁에게 신임받는 측근이었지만, 그가 저지른 일은 용서받기 어려웠다. 악명 높은 폭군 동탁이 이 사실을 눈치챈다면 아무리 여포라 하더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터였다. 이런 여포를 포섭한 인물이 바로 조정의 반 동탁파 대신인 사도 왕윤(王允, 137-192)이었다. 왕윤의 부추김에 넘어간 여포는 결국 동탁을 살해했다. 동탁의 머리와 몸뚱이는 낙양의 저잣거리에 며칠이나 효수되었고, 그의 측근과 가족, 친지들은 조정을 장악한 왕윤에 의해 숙청당했다.
왕윤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동탁은 제거했지만, 서량이라는 동탁의 지리적 기반을 제거하지는 못한 탓이었다. 서량에 기반한 동탁의 병력은 온존했고, 이각과 곽사 등도 숙청을 피해 살아남았다. 그들은 서량의 대군을 이끌고 낙양을 공격했다. 낙양의 조정은 서량의 대군을 대적할 병력을 확보하지 못했고, 기습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지방의 제후들을 소집할 겨를도 없었다. 여포가 낙양의 병력을 지휘해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애초에 중과부적이었고, 여포가 용맹했다고는 하지만 이각과 곽사 역시 군사적 재능이라는 측면에서는 결코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왕윤은 낙양을 점거한 이각과 곽사에게 숙청당했고, 간신히 도주한 여포는 방랑자 신세가 되었다.
왕윤을 제거하고 후한 조정을 장악한 이각과 곽사는, 용맹한 장수이기는 했지만 정치적 식견이나 역량이 부족했고 정치적 정당성조차 결여한 인물이었다. 정권을 잡은 그들은 동탁과 마찬가지로 국정 농단을 이어 갔다. 권력 기반이 미약했을 뿐만 아니라 나이조차 어린 헌제가 그들을 통제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동탁의 집권에 이어진 혼란으로 인해, 후한 조정의 권위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를 틈타 각지의 제후들은 더욱 세력을 키우며 영지의 왕처럼 군림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영토와 이권을 노리고 전쟁을 이어가기까지 했다.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치명타를 입은 후한의 땅은, 이제 이름뿐인 황제와 조정만 남긴 채 사실상 분열하기 시작했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서량 땅이 길러낸 야심 찬 군벌 동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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