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yuichi Sakamoto | Opus」 29/100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Ars longa, vita brevis.
로마 격언
거인이 일어서고, 피아노는 홀로 연주되는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 잔향만이 남았다. 깊게 팬 고뇌의 주름, 거칠게 들려오는 숨소리, 뼈마디가 뭉툭하게 도드라져 자꾸만 떨리는 손가락. 지난 몇 년간 제대로 된 라이브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괴롭혀온 병마는 그를 늙게 했다. 거인은 이제 늙었다. 마지막으로 선택된 스무 개의 곡들. 그의 마지막 공연은 보는 이 없이 쓸쓸하게 치러져 흑백 소묘처럼 남았다.
보름달처럼 밝은 조명 아래에서 손가락을 건반 위에 얹자 그의 눈빛이 돌연 형형해진다. Lack of love가 연주되며 시작하는 그의 공연은 러닝타임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몇 안 되는 말과 한두 차례의 실수를 제외하고는 연주만이 계속된다.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타건을 거듭하던 그의 표정은 공연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야릇한 웃음으로 바뀌고, 화면은 곡의 끝과 함께 자꾸만 암전 된다. 그렇게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끝마치자 다시 한번 화면은 암전 되고, Opus를 마지막으로 연주하는 그의 옆에 엔딩 크레디트가 오른다. 그렇게 연주하던 그는 사라지고 빈 피아노에서 Opus가 연주되며, 그의 마지막 공연은 끝을 맺는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에 남게 된다.
마지막 화면, 거인의 생몰연도와 함께 "Ars longa, vita brevis"라는 유명한 라틴어 격언이 떠오르고 영화는 비로소 끝난다. 흔히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로 번역되는 이 격언의 원문은 히포크라테스가 그의 저서 《격언집 (Aphorismi)》에 남긴 'Ὁ βιος βραχύς, ἡ δὲ τέχνι μακρή'로, 이는 인생은 짧지만 기술은 방대하는 뜻이다. 그가 그의 짧은 인생 동안 갈고닦아왔을 그의 기술들과, 또 오랫동안 향유될 그의 예술을 떠올려본다면 그의 스완송이 될 이 영화의 끝을 매듭짓기에 무척이나 적절한 문구가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이 영화로써 어떠한가 묻는다면 어쩐지 미묘하다. 영화의 경계선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 영화는 영화보다는 하나의 콘서트, 연주회, 뮤직비디오 또는 기록 영상물에 가까워 보인다. 형식만 놓고 보자면 영락없는 콘서트다. 음악에 맞추어 카메라가 줌 인, 줌 아웃 등의 방식으로 심리적인 거리감을 좁혔다 늘리기도 하고, 다각도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 타건 하는 손가락, 때로는 피아노 그 자체와 주변을 비추기도 하지만 말이다. 모든 서사가 영화 외적인 요소인 사카모토 류이치의 일생으로부터 오며, 콘서트나 뮤직비디오와 어떠한 차이를 가지지도 않는다. 이 작품을 영화로 정의한다는 것이 어쩐지 미묘하게 느껴진다.
가끔은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이 영화라는 이름표를 달고 실험대에 오른다. 앤디 워홀의 「잠 (1964)」, 루이스 부뉴엘이 감독하고 유명 초현실주의 작가인 살바도르 달리가 참여한 초현실주의 영화인 「안달루시아의 개 (1929)」, 그리고 심지어는 절대영화적 맥락에서 등장한 한스 리히터의 「리듬 23 (1923)」와 같이 한때 영화는 실험대 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 작품은 이미 떠난 사람인 사카모토 류이치와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의 모습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사람의 음성을 과감히 도려내고, 차분한 카메라 워크가 흑백의 부드러운 영상과 어우러져 관객들로 하여금 그의 피아노 선율에 몰입하여 연주를 오롯이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미 그가 피아노를 치던 의자는 비어있고, 피아노의 현에 남은 마지막 하나의 떨림마저 가셨음에도 불구하고, 필름 속에 남은 마지막 공연은 끝나지 않은 채 언제든 영사의 시작과 함께 다시 관객들 앞에 올려져 살아 숨 쉴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러한 형식은 그와 그의 음악을 기억하기 위해 선택된 하나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역시 그의 많고도 많은 라이브 영상들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이 작품만이 가지는 특색이 무엇인지가 정말 애매하고, 이것보다도 더 나은 선택지가 분명 존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왜 영화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관람 일자
2024/01/08 - 메가박스 청라지젤 컴포트 5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