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or Things」 39/100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Der Mensch ist Etwas, das überwunden werden soll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1844-1900)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영혼은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어린이가 된다.(Wie der Geist zum Kameele wird, und zum Löwen das Kameel, und zum Kinde zuletzt der Löwe.)"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한 말이다. 그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자신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에 고통 또한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 외적 요인이 아닌 자신에게 집중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해 내는 자'로 묘사하며, 이를 위버멘쉬(Übermensch)라고 명명했다. 말 그대로 사람을 뛰어넘은 자, 즉 초인(超人)을 의미하는 말로, 인간은 계속해서 위버멘쉬를 목표로 나아가야 하나, 그 과정에서 일시적인 전진과 후퇴를 반복한다고 보았다. 그는 영혼(Geist)이 위버멘쉬로 나아가기 위한 삼 단계의 과정을 제시하며 각각의 단계를 낙타(Kameel), 사자(Löwe), 그리고 어린이(Kind)에 비유하였다. 짐을 싣고 혹독한 사막을 건너게 해도 순종하는 낙타는 복종하는 존재를 은유한다. 이 단계의 영혼에게는 순종과 복종만이 존재한다. 온순한 낙타를 지나 사자의 단계로 발돋움하며 영혼은 압제에 맞서 투쟁하는 능력을 기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은 압제의 안티 테제로서 존재할 뿐, 그 의미를 긍정하지 못하기에 사자는 고통과 허무함만이 가득할 뿐이다.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이러한 과정과 삶을 놀이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 그것이 어린이이며, 또한 니체가 제시한 위버멘쉬의 반열이다.
신이라고 불리는 의사 고드윈 백스터 박사는 어느 날 자살해 떠내려온 임산부의 익사체를 발견한다. 자살자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고민하던 백스터 박사는 자살한 여자의 뱃속에 있던 아기로부터 뇌를 꺼내 그것을 여자의 머리에 이식했고, 그렇게 벨라 백스터가 탄생한다.
고드윈 백스터는 그녀의 관찰과 조사를 위해 그의 제자였던 맥스 맥캔들리스을 자신의 집으로 부르고, 맥스는 그녀의 아름다운 외양에 반한다. 이를 눈치챈 백스터 박사는 벨라를 집에 붙잡아두기 위해 맥스에게 벨라와 결혼하지 않겠느냐고 묻고, 맥스는 승낙한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은 어디까지나 어린아이인 채였고, 종종 돌발적인 행동들을 하곤 했다.
그녀가 성장해감에 따라 그녀는 바깥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갔고, 반항심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백스터 박사의 변호사였던 던컨 웨더번은 그런 그녀에게 접근해 자신이 자유롭게 해주겠다며 그녀를 유혹하고, 벨라는 그녀를 막는 맥스를 마취해 기절시키고 리스본으로 도망친다.
리스본에서 다양한 것들을 보고 끊임없이 웨더번과 섹스하는 시간을 보내는 벨라. 그러나 벨라는 사회적인 약속들이나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웨더번과 갈등을 겪는다. 그녀를 통제할 수 없자 웨더번은 벨라를 트렁크에 실은 채 크루즈에 오르나, 크루즈에서 만난 친구들과 대화하며 세상과 철학에 대해 눈을 뜬 벨라는 점점 웨더번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웨더번은 그녀의 변심을 막고자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상심한 그는 술과 도박에 빠지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크루즈. 해리 애슬리는 벨라에게 죽어가는 빈민들을 보여주고, 충격받은 벨라는 그들을 도와야 한다며 계단을 뛰어내려가지만 계단은 부서져 끊겨있다. 크루즈로 돌아온 벨라는 술에 취해 쓰러져있는 웨더번의 돈을 전부 긁어모아 빈민들을 위해 써달라며 선원들에게 건넨다. 졸지에 알거지가 되어버린 웨더번. 돈이 없어진 그들은 마르세유에서 하선해야만 했고, 눈 내리는 파리에서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된다.
벨라는 돈을 벌어오겠다며 어딘가로 향하고, 포주인 스위니는 그녀에게 자신의 창관에서 매춘부로 일해볼 것을 권한다. 섹스를 하며 돈도 벌 수 있음에 만족한 벨라는 빵집에서 초콜릿 에클레어를 사들고 가 웨더번에게 권한다. 어디에서 돈이 났냐는 질문에 벨라는 태연히 섹스를 하면 돈을 준다기에 그리했다 말하고, 분노와 좌절이 극에 달한 웨더번은 벨라에게 네가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며 원망한다. 그런 웨더번을 이해할 수 없는 벨라는 그를 떠나고, 창관에서 계속해 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드윈이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자 맥스를 시켜 벨라를 찾아오도록 하고, 맥스는 정신병원에 갇힌 웨더번을 찾아내 벨라가 파리에서 매춘부로 일하고 있음을 알아낸다. 그렇게 벨라는 런던으로 돌아오고, 고드윈과 맥스가 자신과 같은 존재를 다시 만들어 냈음에 분노하지만, 이내 고드윈과 화해한다.
벨라는 길을 걷던 중, 자신이 창녀로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면 결혼해달라며 맥스에게 청혼하고, 맥스는 이를 받아들인다. 이윽고 찾아온 결혼식. 신부가 주례를 하던 중, 웨더번이 한 남자와 함께 들이닥친다. 그의 이름은 알피 블레싱턴. 벨라는 자신의 육체이자 어머니인 존재가 그의 아내였으며, 원래의 이름은 빅토리아 블레싱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서는 결혼식 도중에 알피를 따라 그의 저택으로 향한다.
알피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하인들에게 잔인한 장난을 치며 즐거워하는 사디스틱 한 취미가 있었으며, 벨라가 저택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심지어 그녀를 할례 하려는 계획까지 세우는 모습을 보며 벨라는 도망치려고 시도하고, 맥스에게 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를 마취시켜 도망치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고드윈은 맥스와 벨라의 곁에서 눈을 감고, 벨라는 의사가 되어 알피의 머리에 염소의 뇌를 이식한다. 모두들 고드윈이 살던 집 정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알피는 염소처럼 풀을 뜯어 먹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제임스 웨일 감독의 「프랑켄슈타인 (1931)」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영화의 초반부가 흑백 영상이라는 점, 고드윈 백스터의 호문쿨루스처럼 얼기설기 이어붙인 듯한 추함을 넘어서 징그러운 외양, 한 사람에게 타인의 뇌를 넣어 재탄생시킨 존재, 그리고 신(god)이라는 그의 별명. 교수형 당한 시체에 뇌를 집어넣어 괴물을 만들어낸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이제 신이 되는 기분을 알 것만 같아(now I know what it feels like to be a god)"라고 말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벨라의 모습 또한 실수로 인해 정상인이 아닌 전두엽이 쪼그라든 비정상인의 뇌를 넣어 만들었기에 괴물 같은 행동거지를 보여주게 된 1931년작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고드윈 백스터 박사의 이름 고드윈(Godwin)이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의 원래 이름임은 이 영화가 프랑켄슈타인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음이 분명함을 확실하게 한다.
그러나 비교적 현실적 공간들을 배경으로 한 프랑켄슈타인과는 달리, 가여운 것들은 현실과 가상의 공간들을 적절하고 교묘하게 병치해 실제와 아닌 것을 혼동케 하였다. 또한 비교적 사실적인 서사 속 배경들에서 그 공간에 존재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인위적 괴수들, 미로 같은 공간들, 과장된 색감과 몽환적인 배경은 영화의 기괴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한 층 상승시켜준다.
작중 벨라의 모습은 니체가 주장한 위버멘쉬를 향한 삼 단계의 성장과정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초반부의 집에 갇혀 고드윈 백스터 박사의 명령에 따라 지내는 모습은 낙타 단계의 순종을, 백스터 박사와 맥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웨더번과 도망치는 것과, 다시 웨더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모습은 사자 단계의 반항을, 창관에서 창녀로 일하며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그것을 즐기기 시작하는 부분부터는 어린이의 놀이를 상징하고 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타인의 시선이 어떻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니체는 위버멘쉬를 자신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도덕이 사실에 기반하는 것이 아닌 인위적인 가치라는 것을 인식하고 기존에 세워져 있던 도덕적인 가치를 부수며 자신만의 가치를 바탕으로 새로운 도덕 판단의 잣대를 세우는 사람. 벨라에게 있어 그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사회적 규범을 이해하지 못한 그녀는 그것을 계속해 거부해왔고, 철학과 사상을 배우며 자신이 무엇을 거부하고 있는 것인지 인식하기 시작했다.
니체는 또한 성적인 쾌락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순수한 쾌락이며 도덕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웨더번이 몸을 파는 것은 잘못되었음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판단 근거와 자신이 그것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 기반해 자신의 일에 떳떳할 수 있었다. 기존의 가치관을 부수고 자신의 것을 쌓아 올리는 창조적인 힘, 또한 고드윈, 웨더번과 알피로 대표되는 물리적인 힘에 대한 반항. 그러한 모든 것들로부터 니체의 위버멘쉬 사상의 향취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연설을 모아놓은 책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에 따르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였을 때, 선을 사유하기 위한 무한하고 완벽한 의식 또한 존재하지 않으며, 이로 인해 선천적인 선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즉슨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이며, 본성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의 자유는 핑계를 허용하지 않으며 우리는 오로지 우리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것, 혹은 우리의 행동을 가능케 하는 그런 개연성의 모임에서만 기대를 찾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불안과 고립감 그리고 절망을 겪게 되며, 사르트르는 이를 "인간은 자유롭기를 선고받았다(l'homme est condemn é à être libre)"는 말로 묘사했다. 그러나 벨라는 마치 이러한 불안과 고립, 절망으로부터 자유로운 듯이 보인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행동을 믿고, 행동으로 옮긴다. 그렇기에 그녀의 삶의 가치는 선천적 의미(a priori)로부터 자유로우며, 완벽히 스스로가 부여한 의미와 동일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방식으로 삶에 대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새로운 인간 공동체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인간을 인간 자신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하기에 인간은 스스로 인간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르트르의 말, 벨라는 어린아이에서부터 시작해 온전한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을 구축해 나갔고, 자신의 선택을 즐겼으며,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가치관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를 창조해냈다는 점에서 실존주의를 상징하는 존재처럼 비추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이야기들로, 인간은 사회적 관계와 맥락 속에서 살아간다. 나의 선택은 언제나 타인을 선택하게 되며 자신의 자유가 중요한 만큼 타인의 자유도 중요하고, 자신이 공감받기를 원한다면 타인을 공감할 수도 있어야 한다. 자신의 권리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 되는 타인의 권리에 대한 침해는 월권 혹은 방종과 무절제에 가깝다.
분명 자신의 선택대로 살아가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그러나 사회는 기인을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신념 체계를 지키기를 원하며, 핵심적인 부분에서의 수정을 강하게 거부하고는 한다. 변화의 시도는 항상 변화하지 않으려는 흐름에 부딪히게 되어있으며, 개인이 전면적으로 사회의 맥락을 거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벨라라는 캐릭터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이상적인 인물이며, 또한 실존한다 하더라도 극 중에서 거세된 타인들과의 이해관계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극 중에서는 벨라만을 조명했기에 그녀에게 이입할 수 있겠지만, 그녀 또한 타인에게 많은 상처들을 안겨주었으면서, 타인에게 입힌 피해에 대한 성찰은 일절 없이 계속해서 자신만을 신경 쓰는 모습은 이기적이고 불쾌하게 느껴졌다.
관람 일자
2024/03/19 - 메가박스 영종 6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