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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악마와의 토크쇼 (2023)」

by 전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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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te Night with the Devil」 71/100


어떠한 정도의 믿음도 사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No amount of belief makes something a fact.

제임스 랜디 (James Randi, 1928-2020) - 캐나다의 초능력자 사냥꾼


자신의 이름을 건 심야 토크쇼 프로그램 Night Owls with Jack Delroy의 진행자 잭 델로이는 만년 이인자로, 나날이 저조해지는 시청률로 인해 압박을 받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가 폐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자, 돌연 종적을 감추었던 델로이는 복귀 후 더욱 자극적인 포맷의 시도로 슬럼프 탈출을 꾀하지만, 생각만큼 일이 잘 풀리지는 못했다. 그렇게 그의 재계약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시청률 집계 주간이 시작된다. 잭 델로이는 마지막 스퍼트를 위해 핼러윈 특집으로 그의 방송에 오컬트 전문가들을 초청한다.

1부에서 그는 가짜 영매사 크리스투를 초청한다. 그는 게스트들이 입장 전 미리 설문지를 작성하게 해, 그 정보를 바탕으로 한 관객의 죽은 아들과 접신한 듯 연기한다. 그렇게 짜고 치는 판이 끝나고 1부를 마무리하려던 무렵, 크리스투는 갑자기 자신에게 미니라는 이름의 영이 들어왔다며 눈을 뒤집고 고통스러워한다. 크리스투의 이상 현상과 함께 전등이 나가는 등, 괴이한 일들이 발생한다.

광고 시간이 끝나고, 무대에는 카마이클 헤이그라는 이름의 초능력 회의론자가 오르게 된다. 그는 크리스투가 보여준 모든 것이 연기라며 비판한다. 이에 델로이는 사실 미니는 자신이 아내를 부르던 애칭이라고 밝히지만, 헤이그는 이 또한 미리 계획된 것이라 생각하며 믿지 않고, 크리스투는 이에 분노해 헤이그에게 물을 뿌리고 나가려고 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크리스투의 상태가 악화되어 검은 선혈을 분사하듯 토해내고, 뒷수습을 위해 잠시 광고 송출 시간을 가진다.

광고 시간이 끝나고, 다음으로 무대에 올라온 것은 릴리라는 이름의 소녀와, 그녀의 보호자이자 최면술사인 준 로스미첼이었다. 릴리는 아브락사스라는 사탄을 섬기는 종교의 희생양이자 유일한 생존자로, 준은 릴리에게 아브락사스를 섬기는 또 다른 악마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릴리는 그 악마를 꿈틀 씨라고 부른다. 델로이는 시청률을 위해 시청자들 앞에서 악마를 불러오자는 제안을 하고, 준은 이를 거절하지만, 관객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강령술을 시도한다.


영화는 지금껏 비공개 상태인 채 숨겨져 왔던 그의 방송이 공개된다는 설정으로, 최근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공포 요소들 중 가장 뜨거운 감자였던 아날로그 호러와 로스트 미디어라는 두 가지 요소에 파운드 푸티지라는 고전적인 요소까지 잘 녹여낸 것이 괄목할 만하다. 1977년을 배경으로 하는 토크쇼의 영상을 재생한다는 콘셉트인 만큼 4 대 3이라는 CRT 모니터를 위한 화면비, VHS 테이프에 녹화된 아날로그 방송 특유의 고르지 못한 화면과, 아날로그 호러 장르에서 한창 유행했던 뒤틀리는 그래픽 화면을 이용한 연출이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르의 영상물들이 지금까지 아마추어들의 작업물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부실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악마와의 토크쇼는 이러한 선입견들로부터 탈피하여 확실한 서사구조와 잘 촬영되고 편집된 영상들이 합쳐져, 해당 장르가 가지고 있었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보여준다.

Horrific보다는 disturbing에 가까운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이 영화는, 크리스투가 엑토플라즘을 내뿜는 장면 이후 빠르게 정리되는 스튜디오, 거스 맥코넬의 뱃속에서 나오는 수많은 벌레들과 같은 장면들로 불쾌함을 선사하다가도 사실 모든 것이 최면이었음을 밝히는 카마이클 헤이그 등, 긴장과 탈력 상태를 오가게 만들며 완급 조절을 잘 하고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관객들을 잘 가지고 논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를 통해 짧은 긴장과 탈력 상태의 연속이 반복되고, 점차 공포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지며, 관객들을 불쾌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공포를 선사한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아이디어가 너무나도 많았던 것만 같은데, 델로이가 티비를 끄라고 말하는 장면, 릴리가 모두를 죽여버리는 장면, 델로이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정말이라고 말하는 장면들 등, 이 많은 장면 중 하나만 취사선택했다면 조금 더 불쾌하고 강렬한 엔딩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작중 카메라를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인물은 딱 두 명뿐이다. 하나는 쇼호스트인 델로이, 그리고 다른 하나는 릴리. 릴리는 악마가 깃든 존재이며, 기이한 소녀로 묘사된다. 델로이의 경우는 프로 쇼호스트이므로, 그가 카메라를 응시하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엔딩 장면,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사랑했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는 갑자기 카메라를 응시하며 정말이에요라는 말을 한다. 이때의 화면비는 4 대 3이다. 결국 그의 고백은 쇼와 다를 바 없으며, 신용할 수 없는 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정말이라고 하는 장면을 통해,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저 방송에서의 이미지를 위한 것이며, 그는 사적인 자아와 방송에서의 자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점을 확실하게 만들어준다.

작중 인물들은 카메라는 진실만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 보면 화면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의문이 생긴다. 화면은 여러 가지 비율로 재생되는데, 4 대 3 비율이 사용되는 부분은 방송임을 암시하는 것이므로, 4 대 3 화면 속의 장면들은 전부 방송용의 장면이어야 한다. 델로이가 아내와 재회하는 장면에서의 4 대 3 화면비는 그의 인생이 전시용임을 암시하는 장면이겠으나, 과연 헤이그가 거스에게 최면을 걸었을 때 4 대 3의 화면비로 등장한 최면 속 거스의 모습은 녹화된 것인가? 아니면 관객 모두가 최면에 걸렸다는 암묵적인 약속인 것일까? 쇼에서 재생된 영상의 경우, 모두가 최면에 빠진 모습이었으므로, 이를 그저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뒤틀리는 그래픽은, 영상이 어떠한 존재에 의해 변형되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녹화된 영상에서 델로이는 분명 리오를 따라 스테이지 바깥으로 향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릴리를 칼로 찔러 죽인 것 또한 녹화된 장면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사실인가? 스태프들이 모두 도망가고 홀로 남은 카메라에 녹화된 영상일 텐데 왜 중간 장면은 생략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정말 조작되지 않은 영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


오컬트 장르를 평소에 즐겨왔던 관객들이라면 눈치챘을 만한 여러 가지 현실에서 콘셉트를 따온 요소들이 이곳저곳에 삽입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잭 델로이가 연관된 것으로 나오는 사교클럽 글러브는 숲속 캠프에서 여러 가지 오컬트 활동과 더불어 집단 난교를 즐긴다는 설명으로 미루어보아 각계각층의 유력자들이 참가하는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보헤미안 그로브와 유사해 보이며, 초능력 회의론자로 등장한 캐릭터 카마이클 헤이그는 과거 초능력 사냥꾼으로 유명했던 제임스 랜디를 떠올리게 한다. 심지어 그의 앞에서 초능력을 증명하면 거금을 주겠다는 설정까지도.


개인적으로 최근 본 공포영화들 중에서 가장 무섭고 재밌게 관람한 영화였으며, 이걸 심야영화로 혼자 보고 돌아와 아무도 없는 기숙사에서 혼자 잠들어야 하는 필자를 위로해 주자.


관람 일자


2024/05/12 - CGV 인천 1관[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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