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0 「한 남자 (2022)」

by 전율산
2cb88dbf-cd07-4119-9284-672876a2f2ba.jpg

「ある男」 75/100


누군가가 자신의 배경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신념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주 순진한 것이거나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Il faut beaucoup de naïveté ou de mauvaise foi pour penser que les hommes choisissent leurs croyances indépendamment de leur condition.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évi-Strauss, 1908-2009) - 《슬픈 열대 (Tristes Tropiques)》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인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그의 저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에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고 주장했다. 신에 의해 선결정되었던 우리의 본질이 사라진 시대. 사르트르는 인간이 스스로의 본질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했을까.

프랑스의 인류학자이자 구조주의의 창시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 (Tristes Tropiques)》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배경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신념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주 순진한 것이거나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Il faut beaucoup de naïveté ou de mauvaise foi pour penser que les hommes choisissent leurs croyances indépendamment de leur condition)"라는 말을 하며, 인간은 자신이 위치한 사회와 문화의 배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의 사고 그 저변에는 문화와 사회의 구조가 이미 무의식중에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인간의 주체성이란 스스로가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닌, 사회구조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신을 온전히 스스로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개인에 대한 평가 과정에서의 불합리함을 낳는다. 평가라 함은 개인의 온전한 선택에 대해 내리는 것이 합당하며, 이는 선택에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판단의 주체로서의 인간이 늘 이성적이라고 보기는 어렵기에 당위와 현실 사이에 괴리가 생겨나고는 한다.


인간 증발은 1960년대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잇달아 일어난 집단 실종 현상에 대한 비유로부터 시작되었다. 증발은 정부 등에 의해 발생한 납치 및 살해인 강제 실종과는 다르게,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현재 신분을 포기하는 것을 일컫는다. 타인의 평가가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사회 속에서 부락민, 재일조선인과 같은 선천적인 신분은 스스로가 결정하지 않은 요소임에도 자신에게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게 되어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극 중에서 타니구치 다이스케를 사칭하여 새 삶을 살아가려고 한 하라 마코토와 하라 마코토가 처음으로 사칭했던 소네자키 요시히코의 명의로 살아가던 진짜 타니구치 다이스케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라 마코토의 스케치북에는 눈을 그리지 못한 얼굴이 남겨져 있고, 이는 그의 아버지가 그린 그림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은 얼굴을 인식할 때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자, 눈을 바라본다는 것은 떳떳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 아버지 코바야시 켄키치의 살인 현장을 목격한 하라는 어딘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고, 그때마다 역겨움과 공포에 질린 그는 공황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눈을 볼 수 없었고,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살인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그러한 꼬리표들로 인해 그는 복싱 신인왕 결정전을 앞두고 증발을 선택하고 만다.

타니구치 다이스케는 유명 온천장의 둘째였다. 그러나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가족 사이에서의 무시를 견디지 못한 채 증발한다.

가짜 타니구치 다이스케의 사망 사건을 맡아 증발한 이들을 찾아 나선 변호사 키도 아키라는 이들의 증발을 조사하며 그들과 자신 사이에서 동질감을 느낀다. 키도 아키라는 재일한국인 3세로, 일본으로 귀화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자이니치 출신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만다. 사람들의 무의식 저변에 깔린 자이니치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그에게 있어 지우고 싶은 자신이다.

하라 마코토는 아버지와 닮은 자신의 얼굴을 벗겨낼 수 없었고, 타니구치 다이스케는 자신의 가문을 없앨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을 온전히 자신이 선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반에 깔린 사회문화적 구조의 틀을 표백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코바야시 켄키치의 아들 하라 마코토가 사라지기로 결심하였으며, 군마 이카호 온천장의 아들 타니구치 다이스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나답기 위해서 나로서 살기를 포기한 것이다. 동시에 나로서 살기를 선택한 것이며.


또한 이 이야기는 자발적 디아스포라의 서사이다.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디아스포라. 증발은 스스로에게서 디아스포라 하는 것이며 디아스포라 되는 것이다.

키도 아키라의 민족적 정체성은 디아스포라 한국인이다. 자이니치 3세. 일제강점기 한국으로부터 디아스포라 한 한국인의 손자. 그러나 그는 자신을 일본인으로 정의한다.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믿음과 실질적 정체성인 재일한국인 사이의 괴리는 그가 자이니치 차별 문제로 인해 항상 괴로워하는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또한 스스로로부터의 디아스포라를 택한 이들은 고향으로부터 디아스포라 해야만 했다. 군마현의 마에바시시에서 자란 하라 마코토는 오사카에서 소네자키 요시히코가 되었고, 소네자키 요시히코는 다시금 타니구치 다이스케가 되어 미야자키 현에 정착했다. 타니구치 다이스케 또한 하라 마코토와 같은 군마현 출신으로, 시부카와 시에 위치한 이카호 온천에서부터 오사카로, 그곳에서 소네자키 요시히코가 되어 아이치현의 나고야로 떠났다. 마지막으로 키도 아키라까지 오사카에서 타니구치 다이스케가 되어 디아스포라 하였다.

이러한 지역 변화로 말미암은 디아스포라는 각 지역 등장인물들의 사투리를 통해 확실히 드러난다. 타케모토 리에와 그 일가족의 미야자키벤, 군마의 니시간토 억양, 많은 등장인물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던 간사이벤 그리고 표준 말씨까지. 이러한 지역색은 증발한 이들이 옮겨간 곳들이 얼마나 다른 곳인지를 알려주는 문화적 지표로 작용한다.


타케모토 리에는 그이의 이름을 굳이 찾아야 했을지 묻는다. 하라 마코토는 하라 마코토이기를 포기했다. 하라 마코토는 그에게 선고된 존재였을 뿐이다. 하라 마코토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는 하라 마코토보다도 타니구치 다이스케가 자신에게 가까운 존재였으며, 하라 마코토는 스스로 폐기한 자아였다. 그는 타니구치 다이스케이기를 원했으며, 타니구치 다이스케로서 행복했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타니구치 다이스케로 남고 싶었을지도 모르며, 그에게 다시 하라 마코토로 존재하기를 선고한 것은 가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라 마코토가 우려했던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타케모토 리에와 유우토 모두 하라 마코토로서의 타니구치 다이스케마저 받아들이며, 그들은 그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사랑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여담으로 영화의 포스터를 장식한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은 비비안 솝책의 저서 《The Address of the Eye》의 표지에 등장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뒷모습을 재현한다는 것은 우리가 전면에 내세운 우리의 페르소나가 아닌 우리의 진실되지만 바라볼 수 없는 면을 재현한다는 것이며, 그러고 싶더라도 그럴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눈은 그 곳을 향하지 않기 때문에.


관람 일자


2024/05/20 - 디아스포라영화제 인천아트플랫폼 C 공연장

keyword
작가의 이전글#29 「스테이션 7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