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Zone of Interest」 90/100
무고한 시민은 없다.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커티스 르메이 (Curtis LeMay, 1906-1990) - 미국의 前 공군 참모총장
예술이란 드러내고 싶은 열망과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의 경계에 서있어야만 합니다. 드러내기만 하는 것은 진술이요, 감추기만 한다면 공허함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지금까지 그 어떠한 영화가 보여준 것보다도 더욱 큰 예술적 성취를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집의 모습, 평화롭고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 비추어지는 시선은 어찌나 평온한지 목가적이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포도 덩굴로 감추어둔 그 집 담벼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된다면, 영화의 배면에 숨어있는 기의는 보여지는 것의 그 정반대 극단에 서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루돌프 회스. 회스에게는 아내 헤트비히와 다섯의 자식이 있죠. 그들은 아름다운 집에 삽니다. 잘 정돈된 깔끔한 실내, 아늑한 침실과 많은 방, 아름다운 꽃들이 만개한 정원에는 온실과 수영장까지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아버지입니다. 아이들과 강에 가 물놀이를 하거나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동화책을 읽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요소들이 우리를 거슬리게 합니다. 먼저, 헤트비히가 친구들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그들이 유대인의 옷을 가져와 입고 있으며, 그들이 쓰던 치약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시체를 끊임없이 태우는 소각장에 대해 회스에게 브리핑하는 세일즈맨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금니들, 강을 따라 떠밀려오는 잿더미, 그리고 그 잿더미 속에서 건져올려지는 턱뼈 등등… 그렇습니다. 그 아름다운 가족은 아우슈비츠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폴란드의 작은 도시 오시비엥침(Oświęcim)에 위치했던 나치 독일의 수용소입니다.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 1940년,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정치범 수용을 목적으로 지어진 노동 수용소였습니다. 그러나 1941년, 소련의 참전으로 인해 다수의 포로가 발생하고, 이들을 처리하기 곤란했던 나치 독일은, 비르나케우 수용소로도 알려진 아우슈비츠 II 수용소를 지으며 유대인을 비롯한 포로들의 절멸을 목표로 가스를 이용한 학살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는 이미 원주민들과 동화된 유대인들이 다수 존재했고, 이들을 구분하기란 거의 불가능했기에, 이러한 선별 과정에는 어느 정도 자의적인 해석이 개입되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헤트비히의 어머니가 집에서 놀고 있는 동네 아이들을 보며 유대인 아이들이냐고 묻기도 하니까 말이죠.
어쨌든 각설하고, 이 절멸 수용소는 나치 독일의 패망 직전인 1945년까지도 운영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1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학살당했습니다. 영화는 이러한 모습을 수용소 굴뚝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연기와, 밤에도 붉은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루돌프 회스는 이 모든 일의 총책임자입니다. 하지만 회스에게도, 회스의 가족들에게도, 영화를 찍는 카메라의 시선에서도 이 모든 일들은 관심 영역 바깥(out of thier zone of interests)의 일들일 뿐입니다. 유대인들을 태우는 불과 연기가 창밖으로 자꾸만 번뜩이고, 그들의 고함과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데도 말입니다. 심지어는 회스가 아들에게 새소리가 들리냐고 물어보는 장면에서도 관객들에게는 비명과 신음 소리가 뒤섞인 괴기한 소리만이 들려올 뿐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많은 소리가 뒤섞여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관심 있는 소리만을 들을 수 있죠. 이를 칵테일파티 효과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있어 그러한 비명소리는 관심 영역 바깥의 일인 것이죠.
하지만 딸 헤트비히의 집에 방문한 리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낍니다. 바깥에서 잠에 들었다가 깨어보니 자꾸만 기침이 나오고, 한밤중에 일어났을 때, 창밖은 황혼이 지는 것처럼 오렌지빛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녀는 짐을 챙겨 사라져버리죠. 같은 시각, 유대인 보모는 자꾸만 우는 아기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시간은 이미 한밤중, 그녀는 잠들지 못합니다. 이와 동시에 회스는 유대인 하인과 성관계를 갖습니다.
그러나 회스는 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 공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공감이나 연민을 보내지 못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가 아우슈비츠를 떠나는 것이 확정되었을 때, 회스는 잠도 자지 않고 마구간에서 그가 아끼는 말을 끌어안으며 교감하고 연민의 시선을 던지니까요.
영화의 제목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관심의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카메라는 아우슈비츠라는 잔인한 배경들을 비추면서도 놀랍도록 건조한 시선을 보냅니다. 어찌 보면 회스 가족에게 우호적인 시선으로 비추어질 정도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카메라의 관심 영역에는 수용소의 그들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카메라의 시선은 어찌 보면 회스 가족의 관심 영역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수용소 안 유대인들은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을 특별히 증오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인간이건 아니건 회스 가족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굳이 주류의 의견을 거스를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우리의 관심 영역 속에는 유대인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같은 인간임을 알고 있으며, 얼마나 비참한 경험을 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분명히 기표가 폭력을 배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회스 가족의 생활에서 비인간성을 연상하게 됩니다. 이러한 감정은 특히 아우슈비츠 박물관의 직원들이 수백만개의 신발이 쌓인 진열장 앞을 청소할 때 폭발적으로 다가옵니다. 건조한 텍스트로 존재하던 그들 하나하나가 실증적인 증거를 통해 제시되는 순간이니까요.
철저히 수용소를 시야 바깥으로 격리시키는 이러한 방식은, 지금까지의 사건 중심적 서술을 통해 비추어진 주동자 남성들에 의해 가해진 폭력의 역사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카메라가 사건을 포착하기를 거부함으로 인해 자연스레 사건의 주변 인물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며, 나치 독일의 반유대적 학살에 있어 그동안 조명되지 않았던 부분인 민간인들과 여성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그들의 폭력에 동참하였는가에 관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습니다. 죽은 유대인들의 유류품을 자신들이 나누어 가지는 모습, 유대인을 하인으로 부리며 가하는 폭력, 심지어는 그들이 아름답게 가꾼 텃밭에 뿌리는 비료마저 유대인의 재 가루였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들이 그저 방관자의 지위에 있던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폭력을 긍정했음이 폭로되는 순간입니다.
그래도 한 가지 흠결을 짚고 넘어가자면, 영화는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고통을 소비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지난 날의 영화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말할 때 그 비극을 마치 포르노그라피처럼 자극적으로 노출시킨 것과는 상반되어 있죠. 이는 어찌보면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에 대한 소비 그 자체에 관한 비판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결국 극장에 걸려 소비되고 있고, 결국 매체의 상업성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홀로코스트의 소비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은 감독 스스로도 그러한 역사를 소비하도록 공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가당착이라 볼 수 있습니다.
평화로운 기표로부터 구성되는 잔혹한 기의 사이의 대조를 통해 회스 가족의 인간적인 모습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지 폭로하는 한편으로, 악이 꼭 악인으로부터 유래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드러내며 감독이 의도한 바를 확실하게 전달합니다. 영화에서 시도된 가장 성공적인 역설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드러내고 싶은 욕구와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의 투쟁, 우리는 그 간극에 서 있는 것을 예술이라고 부릅니다. 악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며 악을 말하는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예술적입니다.
관람 일자
2024/06/09 - 메가박스 인천논현 1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