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 55/100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요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클레어 하너 (Clare Harner, 1909-1977) -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사랑한다는 것은 경험이 필요한 일이다. 미숙한 첫사랑은 때로 맹목적이고 때로 이기적이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것은 관계맺음이다. 너와 나 사이에서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로 거듭나는 그 독특한 관계성에서 사랑은 정의된다. 그렇기에 사실 사랑에 있어 형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미와 하은의 사랑도,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는 아주머니의 사랑도.
하지만 가끔 우리는 사랑에 있어 필수요소가 '나'뿐만이 아닌 '너'에게도 있다는 것을 잊고는 한다.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이기적인, 감정의 일방적인 흐름을 만든다. 영화 초반부 하은에 대한 세미의 일방적인 감정 표현은 아직 가다듬어지지 못한 사랑의 이기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동시에 그 사랑이 얼마나 풋풋한 날 것인지를 관객들이 느끼도록 한다. 이러한 고등학생 다운 면모는 박혜수와 김시은의 마치 진짜 고등학생인 것 같은 연기와 어우러져 그 캐릭터들에 관객들이 조금 더 몰입할 수 있도록, 캐릭터들을 관객들이 조금 더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이기심은 상대에게 사소한 오해와 상처들을 불러일으켜 관계의 어긋남을 초래하기도 한다. 나와 너의 관계에서 '너'의 이러한 존재의 표현은 관계에 있어 순간적인 위기가 되지만, 상처가 아무는 과정에서 '나'는 '너'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그러한 이해를 통해 관계는 성숙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세미가 하은을 찾으며 자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하은에 대해 모르고 있었는가 깨달으며 자신의 이기심을 되돌아보고, 하은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사랑이 관계맺음에서 나오기에, 우리는 사랑으로 인해 지독한 불안에 시달리기도 한다. 하은에게 자꾸만 표현하지 못할 마음을 주고 다시 돌려받지 못한 조바심, 그리고 좌절, 하은의 마음이 다른 누군가를 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투, 그리고 꿈 속에서 죽은채로 누워있는 부재하게 되어버릴 '나'에게 마음을 돌려줄 '너'가 없어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로 인한 상실감. 「너와 나」는 그런 사랑의 부정적인 면모들을 서사적인 측면에서만 표현해낸 것이 아니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흔들리는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된 듯한 화면은 마음의 동요와 불안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그런 부정적인 면모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진실됨을 효과적으로 호소하여냈고, 이는 공감을 이끌어냄으로써 역설적이게도 그 사랑을 더욱 긍정적으로,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이도록 한다.
이러한 사실적이고도 가감없는 표현들은 관객들에게 그 사랑이 얼마나 순수하고도 진실된 것인지 충분히 이해시키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그 풋내나는 감정들을 다시금 꺼내어 곱씹어보게 한다.
영화에서 반전은 하나의 즐거움이요 서사의 긴장감을 높여주는 훌륭한 기법이다. 그러나 종종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못한 반전은 그 시점까지의 서사를 무너뜨린다. 풋풋하고 밝은, 미소짓게 하는 이야기는 그 결말의 비극을 알게 된 후로 그저 가슴을 더욱 세게 짓눌러오는 압박감으로 작용할 뿐이다.
안산이라는 무대와 수학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 상황이라는 배경 상 어느 정도 예상할만한 단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미숙한 페이드 인처럼 충분히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큰 개연성 없이 찾아오는 세월호 사건으로 인한 세미의 죽음은 관객들에게 충격과 슬픔을 안겨준다.
이 영화의 목적 자체가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한 위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영화란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품이다. 극장에서 사람들이 '뭐야 뭐야'하며 웅성였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것이 추모를 위한 작품이라는 인지적 필터 없이 관람했을 것이기에, 감독이 의도했던 추모를 위한 순수한 사랑이라는 소재의 이용이라는 인과관계는 관객들에게 순수한 사랑의 강조를 위한 세월호라는 소재의 이용이라는 뒤집힌 인과로써 와닿는다. 의도와 전혀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다.
관람 일자
2023/10/29-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