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8 「괴물 (2023)」

by 전율산
AKR20231124009200005_09_i_P4.jpg

「怪物」 83/100


진실이 침묵으로 대체되었을 때, 침묵은 거짓말이 된다.

Когда истина заменяется молчанием, молчание становится ложью.

예브게니 옙투셴코 (Евгений Евтушенко, 1933-2017) - 러시아의 시인


살면서 때때로 우리는 누군가를 오해하고는 한다. 사소한 오해들은 쌓이고 쌓여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게 되고, 깨달았을 때 오해는 이미 진실이 되어 있다. 영국의 심리학자 피터 와슨(Peter Wason)은 1960년 《실험심리학에 관한 계간지 (Quarterly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에 「가상 과제에서의 가설 제거 실패에 관한 연구 (On the Failure to Eliminate Hypotheses in a Conceptual Task)」라는 제목의 논문을 투고한다. 스물아홉 명의 심리학과 학부생들을 상대로 진행된 이 연구에서 왓슨은 그들에게 간단한 규칙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숫자가 있음을 알려주며, 스무고개 놀이처럼 그들은 계속하여 세 개의 숫자 집합을 선택해, 선택한 이유와 함께 제시하고, 왓슨은 이것이 규칙에 부합하는지 알려주는 간단한 실험을 진행하였다. 실험 시작에 앞서 왓슨은 이 실험이 단순히 규칙에 부합하는 숫자를 찾는 것이 아닌 규칙 자체를 발견하는 것이며, 최대한 적은 도전만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강조하였다. 그 결과 스물아홉 명 중 열세 명의 피험자는 한 번, 아홉 명은 두 번 이상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였다. 왓슨은 두 번 이상 잘못된 결론에 도달한 피험자들은 자신의 가설을 검증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할 의사가 없었다 (unwilling to test their hypotheses)'고 결론 내렸다. 그들은 그들이 도출한 가설의 개념을 수정하기보다는 그저 설명 방식을 바꾸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설명 방식을 바꾸는 방식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규칙 그 자체를 바꾸었다고 믿도록 했다. 훗날 '확증 편향 (Confirmation Bias)'이라고 이름 붙여지는 이 논거의 오류는, 사람들이 자신의 결론과 맞지 않는 근거는 배제하고, 자신이 원하는 정보만 취사선택하는 경향을 말한다. 여기에 몇 가지의 사례만으로 전체를 성급히 일반화해버리는 경향이 더해질 때, 오해는 이윽고 사실이 된다.


영화는 동일한 사건을 세 명의 시선에서 보여준다. 미나토의 어머니 무기로 사오리, 미나토의 선생님 호리 미치토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기로 미나토 본인.

영화는 미나토의 어머니 시점에서 시작된다. 아들을 홀로 키워온 어머니는 어느 날, 아들이 차에서 뛰어내리자 아들이 학교에서 누군가에게 괴롭힘당하고 있다고 믿게 된다. 아들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그의 선생님 호리 미치토시. 분노한 어머니는 학교에 찾아가 교장 선생님께 따지지만, 그들은 어떠한 책임도 없이 죄송하다는 말만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옆의 선생이 써주는 대로 미나토의 코와 선생의 손이 '접촉'하는 일이 있었을 뿐이라며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수동적으로 늘어놓는다. 이에 분노한 어머니는 자신이 지금 사람과 대화하고 있는 것이 맞냐며 따지지만, 그들은 여전히 형식적일 뿐이다. 그녀는 사람 '후시미 마키코'가 아닌 직책 '교장'과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가해자인 선생은 사과하러 온 자리에서 억지로 사과하는 티를 내거나, 사탕을 먹거나, 심지어는 웃으며 사오리가 싱글맘이라 예민하다는 식으로 말하며 미나토가 학급 친구인 호시카와 요리를 괴롭히고 있다고 말하고, 어머니는 이에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호시카와 요리가 미나토는 자신을 괴롭히지 않았다고 증언하며 호리는 학부형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폭언 교사로 신문에도 실리나, 미나토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연락을 받고 찾아간 학교에서 그는 미나토가 호리를 피하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한다.

이후 영화의 시선은 호리 미치토시에게로 넘어간다. 걸즈 바에 다닌다는 소문과는 다르게 건실한 사회 초년생인 그는 의욕에 찬 선생님이다. 그것도 꽤나 좋은 선생님이다. 그러나 그는 미나토가 요리의 물건들을 집어던지고 있는 장면을 보고 그를 말리던 와중 실수로 미나토의 코를 쳐 코피를 쏟게 했고, 이후 여러 장면들을 목격하며 미나토가 요리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에 미나토의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왔을 때, 그는 직접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위해 나서려 했으나 교장을 비롯한 선생들이 이를 막아섰고, 교장의 기계적 대응은 사오리의 화만을 더 돋우며 일을 악화시킨다. 그렇기에 원치 않는 사과를 강제로 해야 했던 그는 요리에게 증언을 부탁하나 요리는 미나토에게 괴롭힘당한 적이 없다며 말하고, 다른 아이들에게 도움을 청해도 돌아오는 것은 자신은 그런 말 한 적이 없다는 냉담한 답변일 뿐이었다. 그렇게 공개적 사과를 강요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집 앞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그를 덮치고, 이를 본 여자친구는 그를 떠나버린다. 심지어 직업을 잃고 의기소침해져 있던 그의 집 문에 누가 돼지 뇌를 걸어놓고 도망치는 등, 극한까지 몰려버린 그는 학교에 찾아가 미나토에게 왜 그랬냐며 끝까지 미소 띤 얼굴로 묻지만 미나토는 도망치고, 그러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다. 망연자실한 그는 맨발로 학교 지붕에 올라가 마을을 바라보고, 트롬본과 유포니엄 소리가 뱃고동처럼 울려 퍼지며 시선은 전환된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무기로 미나토에게로 넘어간다. 요리는 반에서 괴롭힘당하는 아이로, 요리의 아버지는 매일같이 술을 마시며 아들에게 네 뇌는 돼지의 뇌라서 사람이 아니라는 식의 이야기를 한다. 미나토는 그런 요리와 친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알까 봐 그에게 학교에서는 자신에게 말 걸지 말라며 모질게 대한다. 그러나 요리가 괴롭힘당하자 미나토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며 난동을 부렸고, 반 아이들의 주의를 분산시키는데 성공하지만 그 선생님이 그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이후에도 누군가 요리를 화장실에 가두고 도망갔을 때 우연히 화장실에 갔다가 선생님과 마주친다거나 하는 식으로 오해를 샀던 것이다. 그래도 둘은 사이가 좋아 산속 폐 철도 위에 버려진 기관차를 비밀 기지 삼아 놀지만, 요리가 미나토를 위로해 주기 위해 그를 끌어안자 그는 그것을 오해하고 그와 다투고 만다. 이후 요리에게 미안하다 전해주기 위해 비밀 기지로 향하나 요리를 마중 나가던 길 그를 걱정하던 어머니가 그를 발견하게 된다. 어머니의 차를 타고 가던 미나토는 제대로 사과하지 못한 채 요리를 남겨두고 왔다는 죄책감에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여기서부터 모든 일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후 영화는 잠시 교장 선생님의 시점을 보여주다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날 호리가 미나토의 집으로 찾아가 미나토에게 자신이 오해했다며 사과하고, 없어진 미나토를 찾으려 버려진 기관차로 향해 창문에 쌓인 진흙을 닦아내 보지만 닦아도 닦아도 진흙은 계속해서 창문을 가릴 뿐이다. 마치 그들이 처한 사건의 현실처럼. 그렇게 빈 기관차를 보여주며 시점은 다시 미나토로 향하고, 두 소년이 진흙 묻은 채로 버려진 철도 위를 달리며 영화는 끝난다. 아이들이 계속해 환생을 언급했다는 점, 빅 크런치로 이 우주가 곧 끝날 것이라 했다는 점, 폭풍우가 갑자기 멎고 날씨가 화창해졌다는 점, 닫혀있던 교량이 열려있고 아이들은 끝을 모를 길을 뛰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아마도 그들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러모로 「더 헌트 (2012)」 , 「미세스 노이지 (2019)」 이 두 작품이 생각나는 영화였다. 결과를 정해두고 원인을 찾아나갔을 때의 부작용. 오해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연쇄 작용. 그리고 그러한 오해를 잘 들어맞게 편집하고 재확산시키는 사람들. 사오리, 호리, 미나토 셋 모두가 모두를 오해했고, 모두가 모두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심지어는 영화를 보던 관객들마저도 영화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맞추어 계속해 누군가를 오해하고 비난한다. 사오리의 시점에서는 분노한 어머니 앞에서 기계적인 사과만을 거듭하는 교장과, 그녀를 비웃는 호리에 대해 오해하게 된다. 호리의 시점에서는 계속하여 침묵하는 미나토와 동정심을 사기 위해 죽은 손녀의 사진마저 이용하는 모습을 보며 교장을 오해하고, 그러다가 결국 미나토의 시점, 교장의 시점에 이르러 그 누구도 크게 잘못함이 없음을 깨달을 때, 지금까지 품어왔던 분노는 공허한 것이 되며, 우리는 이러한 파괴적인 오해가 비단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은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도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잘못했다. 사오리의 어머니는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로 아들에게 무관심했던 것으로 보이며, 호리는 이리저리 휘둘리며 미숙한 상황 대처로 사오리의 화를 돋웠고, 미나토는 진실에 대해 침묵했으며, 교장은 사건을 조사할 생각도 없이 그저 자신의 안녕을 위해 사건에 대처했다. 그리고 여러분마저도 한 사람의 시점에서 이차원적으로 투사되어 제시된 사건의 편린들, 그것에 대한 개인의 시선에서의 해석을 의심하지 않으며 그대로 내면화해버리고 만다. 그 결과 누구의 악의도 없이 누군가는 상처받게 된 것이다.


보는 내내 영화 등받이에 등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계속해 옥죄어오는 이 영화는 시점을 계속하여 전환해가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건의 진실을 낱낱이 확인시켜준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에 대해 얼마나 모르는지, 그러면서도 또 우리는 스스로가 얼마나 쉽게 진실을 자의적으로 재단해낼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그 누구도 괴물이 아니다. 괴물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관람 일자


2023/11/29 - 롯데시네마 인천아시아드 1관

keyword
작가의 이전글#7 「아라마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