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있는 사람(A Tour Guide, 2023)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제목이 왜 이럴까? 누가 누구를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바라본 걸까? 무심코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호기심에 영화 속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지 찾아보니 짐작이 된다. 이 작품은 젊은 새터민이 남한 땅에 정착하는 과정을 다룬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박한영입니다.
성의를 다해 가이드할 테니,
저를 믿으시고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딴 새터민 한영은 열심히 살아보려 한다. 수습생부터 출발해서 가이드 일을 열심히 배워보려 하지만 직장 선배는 한영이 자기 노하우를 빼먹도록 내버려 두진 않는다. 하지만 이런 텃세도 감당해야만 내 힘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다.
영화는 이 젊은 여성이 관계를 맺는 다른 북한이탈주민들도 남한에서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영이 만나는 사람들을 쫓아가다 보면 이 땅에 꽤 많은 새터민들이 내 가까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다만 이들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새터민들은 주로 블루 칼라(blue color) 직종에서 일한다. 생산직 노동자, 청소 용역, 요양 보호사, 관광 가이드, 음식점 아르바이트... 몸을 쓰는 고단한 일이지만 대체로 급여가 낮은 업종이다.
영화를 보며 새터민들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 곳곳에 숨어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서 이들이 '살아간다'는 표현보다는 '숨어있다'는 표현이 더 맞다.
나를 드러낸다는 건 이들에겐 좀처럼 어려운 일이다. 안 그래도 이 땅에서 조선족이나 외국인 등이 일으킨 범죄가 사회 문제가 되는 마당에 토종 남한인 들은 곧잘 색안경을 끼고 새터민을 바라보곤 한다. 이럴 때마다 사람들은 ‘새터민’이 곧 ‘믿기 힘든 사람’이라는 과잉 일반화
(overgeneralization)를 하기 쉽다. 혹은 자극적인 언론 보도 때문인지 자연스레 ‘조선족 범죄’ 같은 문구를 연이어 떠올리는 등 인지적 오류에 빠지곤 한다.
검은 머리, 이목구비가 똑같은 생김새인 이방인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남한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아직 모른다. 저성장 고물가 경제 구조 하에서 일자리가 없어 허덕이는, 전 세계 자살률 1위 국가인 대한민국 토박이들도 살기 퍽퍽한 건 마찬가지다. 이들이 자처한 선택이니 고생은 당연한 거라고, 돈 벌기가 쉽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한영은 돈을 쉽게 버는 방법을 터득해 나간다. 패키지 관광 고객들 앞에서 화장품 값을 뻥튀기하고 중국인 관광객들이 기분 좋아하게끔 유적지에 대한 설명도 거짓으로 꾸민다. 경복궁은 자금성을 본떠서 지었다거나, 교태전은 교태를 부리기 위해 지은 곳이라는 19금 냄새가 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기까지. 그녀는 가이드 선배가 이런 식으로 중국인들 비위를 맞추는 걸 따라 하며 요행을 터득했다.
하지만 일할 땐 정석을 따르는 또 다른 새침데기 가이드 선배가 경찰에 고발한 탓에 한영은 금쪽같은 직장을 잃는다. 그 후 그녀는 술집에서 서빙하는 일을 임시로 얻으며 안정된 직장을 찾아 전전한다. 그러나 이게 어디 쉬운가.
한영은 분명 직업인으로서는 문제가 되는 행동을 했다. 그녀는 그릇된 역할 모델을 따랐고 자본주의 생존법을 잘못 익혔다. 이런 실수로 인해 직장을 잃는 등 위기를 겪게 되면 이들이 남한 사회에서 재기하도록 시행착오 과정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
한영은 재기할 발판을 찾지 못한다. 절친이었던 새터민 친구도 남자친구와 함께 해외 이민을 준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녀 또한 이 땅을 떠난다. 겉으론 같은 민족이지만 실제로는 차별이 공공연한 이 땅에서 정신적 상처가 커서였을까.
영화는 한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새터민이 남한에서 겪는 정신적 어려움을 보여준다. 새터민은 남한 땅에선 이방인이다. 무늬로는 같은 민족이라곤 하지만 똑같은 말과 생김새를 가진 다른 종족 취급을 받는다. 이들이 자신을 영화 제목처럼 봐주길 바라는 바람이 영화엔 오롯이 녹아 있다.
영화를 보니 새터민들이 정신적으로 남한에서 버티기 힘든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이들은 정작 돈 때문이 아니라 시선 때문에 힘들지도 모르겠다. 관련 통계를 보면 매년 새터민 중 남한 적응에 실패하고 600-700명 정도는 제3국에 망명하는 추세이며 심지어 재입북하는 사람도 꾸준히 있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뿌리내리기 거친 땅이다.
'기차에서 만난 이방인 현상(Stranger on a train phenomenon)'이라는 사회심리학 용어처럼 이 영화는 주인공 한영을 통해 새터민이 가진 고민을 말한다. 이 이론은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직 루빈(Zick Rubin)이 설명했다. 때론 기차 안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처럼, 나를 전혀 모르는 이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기 쉬울 때가 있다. 친구나 가족처럼 나를 너무 잘 아는 사람에겐 중요한 말을 하기가 부담될 경우 우리에겐 내 사적인 정보를 전혀 모르는 이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고민을 나누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이 현상은 서로 낯선 타인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만날 때 어떤 정신적 치유 효과가 생기는 지를 보여준다. 익명의 누군가를 만날 때, 비록 잠시 스치는 얕은 관계라도 서로 진실한 고백을 통해 공감과 위로를 얻을 때가 있다. 일상에서 이런 마주침은 힘들 때 의외로 큰 힘이 된다.
새터민들은 남한에 발을 디디기 전부터 이미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겪었다. 일종의 트라우마(trauma) 상태로 낯선 땅에 입성한 후에도 이들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정신적 긴장, 기존 인간관계를 상실한 후 느끼는 외로움 등을 이겨내야 한다. 힘겨운 삶 속에서 주인공 한영도 이 낯선 남한 땅에서 어떤 타인을 만나든, 새터민이란 이방인을 편견 없이 바라봐주길 바라진 않을까. 서로가 스치듯 얄팍한 인연이라도 색안경을 끼지 않고 이들이 사는 모습을 바라보며 위로를 건넬 만한 시선을 가진다면 이들이 좀 더 이 땅에서 버티는데 힘이 되지 않을까.
우린 모두 서로에게 이방인이다.
참고문헌 :
「북한이탈주민 탈남 실태분석 및 대응방안 연구」
한국경찰학회보 2021, vol.23, no.3, 통권 88호 pp. 49-76 (28 pages)
*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영화관심_Kino Psycho] 2023.10.24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https://headla.it/articles/zSfH487mYz45sN2NY6m5G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