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밤의 재즈(Jazz on a Summer's Day, 1959)
1958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스마트폰이 없었던 시절 사람들은 음악을 몸으로 느끼며 마음에 저장했다.
음악을 즐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스트리밍 앱에서, 유튜브에서 '좋아요’를 누를 수도 있고, 반복 재생을 하며 가사와 멜로디를 곱씹을 수도 있다. 좀 더 나아가서 어떤 노래에 대한 소유욕이 뿜뿜 넘치면 LP나 CD, 카세트테이프 등 물리 매체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감상을 넘어서서 내 안에 음악을 흡수하고 싶다면 음악 페스티벌을 가 보는 것도 좋다. 야외의 공기를 호흡하며 하루 종일 악기음과 보컬의 진동을 느끼는 체험은 일생 동안 잊히지 않을 소중한 순간으로 마음에 남는다.
(스포일러라고 할 것도 없지만 아래부터 영화의 내용이 소개됩니다)
이 영화는 일종의 기록물(footage)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공연 기록물과는 달리 주인공은 이 페스티벌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아기들까지 데리고 와서 가족이 함께 흥겹게 리듬을 탄다. 그저 느끼는 대로 몸을 움직이며 춤을 추는 젊은이들. 빠른 리듬을 쫓아가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흔드는 사람. 드러머가 박자를 쪼개며 긴 독주(soloing)를 시작한다. 드럼 소리를 줄였다 키우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리듬의 변주. 힘내라는 응원을 보내는 관객들의 박수 소리.
아이들은 풀밭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다. 놀이공원에서는 연주자들이 기구를 타고 버스킹을 한다. 바다 위에는 요트들이 떠다닌다. 어떤 집에는 지붕과 창가에서 맥주병을 들고 사람들이 음악과 담소를 즐기고 있다. 한낮에 방 안에서 합주를 맞춰보는 뮤지션들도 보인다. 에어컨과 선풍기가 안 보이는 공간에서 연습하는 이들의 얼굴에는 땀이 줄줄 흐른다. 또 다른 집.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혼자 연습 중인 남자.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이 흐른다. 너무 더운지 상의는 벗어던졌나 보다.
그들의 곁에 어떤 무대가 있었다. 단상에는 차례차례로 지금 전설로 불리는 뮤지션들이 올라온다. 지금은 고전으로 남게 된 이 시절의 유행가들. 셀로니어스 몽크가 젊은 신인 뮤지션으로 소개되는 순간. 뒤이어 아니타 오데이, 다이나 워싱턴, 소니 스팃, ... 전설들이 내뿜는 에너지를 담는 무대의 크기는 의외로 소박하다.
공연의 절정이 가까워진다. 마할리아 잭슨의 가스펠이 울려 퍼진 후 드디어 마지막 순서. 루이 암스트롱이다. 사회자가 그와 짧은 만담(漫談)을 나눈 후, 연주를 부탁하는 말.
자, 이제 즐겨주시죠.
이젠 만끽하는 일만 남았다. 관객도, 연주자도, 지금을.
빡빡한 나날을 보내는 누군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한 숨 돌릴 만하다. 음악을 BGM으로 삼으며 그냥 사람들을 구경한다. 춤과 노래를 즐기는 익명의 그들을 보면서 내가 잃어버린 지금을 알아차린다.
이젠 어떤 뮤지션의 콘서트를 가면 스마트폰이 내뿜는 강렬한 반딧불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이 본 공연을 본 기억을 저장하려면 내 눈과 귀, 머리보다는 스마트폰이 정확할 거라는 본능. 스마트폰은 거머리처럼 내 곁에 달라붙어 어느새 내 감각을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이 축제에 온 관객들의 두 손엔 아무것도 없다. 가끔은 무료한 표정. 가끔 한 손엔 담배와 술병, 혹은 음료수. 태양은 뜨겁고 그 아래 바람이 느껴진다. 두 귀를 활짝 열고 지금 듣는 노래도.
너무 볼 게 많고, 생각할 게 많고, 준비할 게 많아 일상에 공백이 없다면 잠깐 쉰다고 생각하고 영화관에 가서 이 시절을 바라보면 어떨까. 눈을 뜨고, 두 귀를 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