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 김대중(2024)
정치는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
이 진부한 질문에 대해 김대중 씨가 살아있다면 어떻게 답할까. 아마 자신이 왜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는지에 대해 청년기 시절을 회고하진 않을까.
정치는 우리 삶을 좌우한다. 정치를 지인끼리 대화 주제로 꺼내놓으면 '정치병' 환자로 바라보는 풍토는 언제부터 두드러졌을까. 하지만 이렇게 정치를 혐오하며 시민들이 거리를 둘 수록 결국 이득을 보는 건 법과 제도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는 가진 자들이다.
살면 살 수록 느끼는 거지만 의식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게 바로 정치다. 내 집 마련을 하려면 부동산 제도를 들여다봐야 한다. 몸이 아플 때 큰돈이 없으면 의료보험제도가 큰 힘이 될 수 있다. 방사능 오염수 때문에 먹거리가 걱정된다면 한일 관계를 들여다봐야 한다. 정치인들이 입법 활동을 제대로 못하면 내가 낸 세금으로 혜택을 보긴커녕 손해를 보기 십상이다.
김대중이 청년기였던 시대에도 정치는 지금처럼 중요했다. 그는 원래 사업가였다. 그는 6.25 전쟁에 휘말려 생명을 잃고 삶이 무너진 사람들을 목도하며 정치판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거창한 계기가 아니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이념을 내세우지만 결국 자기네 이득을 위해서라는 걸 깨달아서였다.
이렇듯 그는 실용적인 이유로 정치를 시작했다. 이념 뒤에 가려진 민생 정책들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는 본의 아니게 오랫동안 독재 권력에 대항해야 했다. 처음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박정희라는 쿠데타 세력과 맞서야 했고, 뒤를 이어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 정권에도 저항해야 했다. 그가 독재에 맞섰던 여정은 곧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가 되었고, 김대중이란 개인이 거쳤던 삶의 여정과도 겹쳤다. 스스로 원했던 원치 않았든 간에 그는 한국 현대사라는 거센 풍파 속에 자기 삶을 내맡겼다.
이렇게 근현대사를 오롯이 살아내며 그는 서서히 존재감을 빛냈다. 양심에 따라 민주주의를 외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목숨을 걸 만큼 힘들었나 보다. 그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게 단지 운 때문이었을까.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자가 세월이 흐를수록 민중에게 무게감을 더해 왔기에, 그래서 권력을 틀어쥔 자들도 그의 목숨줄을 함부로 자를 수 없었기에, 그는 끝내 살아남았다.
영화에선 그가 남긴 명연설들을 짧은 토막이나마 들어볼 수 있다. 그의 언어는 쉽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국민이 정부에 무엇을 바라는지를 콕 집어 말한다. 우아한 언변을 구사하지만 음흉한 사리사욕을 숨기려는 정치인들이 구사하는 말과는 다르다. 속내를 숨기려는 위정자들일 수록 고상하게 어려운 단어를 쓰거나 우회적인 표현을 쓰거나 말꼬리를 흐린다. 하지만 그는 속을 터놓고 말한다. 들으면 들을수록 속이 시원해진다.
그리고 이젠 이런 영화가 나올 정도로 그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견인한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우선 이 영화는 좋은 시청각 자료다. 일제 강점기 해방 이후 한국사를 쉽게 훑어볼 수 있다. 개인이 어떤 정치적 선호도를 가졌건 간에 일단 한 번 보라고 말하고 싶다. 중고등학교에서 동영상 보교재로 써도 좋다고 생각한다.
김대중은 시대가 불러낸 사람이었다. 자기 사업체를 가졌을 정도로 부유했지만 자기 몫만 챙기려 하지 않았기에, 사형 선고를 받았음에도 원한을 복수로 되갚으려 하지 않았기에, 오직 민주주의가 이 땅에 자리 잡기를 고대했기에, 그래야 우리가 함께 잘 살 수 있다고 믿었기에 민중은 그를 택했다. 이런 사람이 정치판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다. 김대중처럼 가진 재산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내려놓으며 신념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또 나타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며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기시감이 들어서다. 언론이 여론을 매도하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서였다. 왜곡 보도로 인해 김대중은 빨갱이,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자로 낙인이 찍혔다. 그는 명석했기에 군부 독재를 자행했던 집권층에겐 두려운 존재였다. 이들은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김대중 이란 암초를 일찌감치 제거하려 했다. 이들이 아무리 김대중이란 이름에 똥물을 뒤집어씌우려 해도 민심은 속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이젠 검찰 독재 시대다. 과거처럼 총을 직접 겨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건 불가능하니 이제는 법 기술자들이 권력을 비호하고 나서는 판국이다. 가진 자들이 여론을 오도하고 국민들을 갈라치기하는 방식은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이들은 노련하게 위법을 피해 가며 정권에 해가 되는 요주의 인물을 공공연히 매스컴을 통해 인격 살해한다. 뉴스 헤드라인을 흙탕물처럼 오염시키는 방법으로 사람 이미지에 먹칠을 해오다 노무현이 죽었고, 이재명 야당 대표가 살해될 뻔했다.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하는 국회의원은 입막음을 당한 채 국정 장면에서 무력으로 끌려나간다. 고 이선균 배우도 정치 이슈를 가리려는 세력 때문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힘없이 당했다.
시민이 자유로운 삶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받으려면, 민주주의가 정착하려면 아직도 지난한 세월이 필요할지 모른다. 제2의 김대중 혹은 노무현이 혼탁한 한국 정치계에 과연 나타날 수 있을까. 이번 영화는 8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광주로 내려가는 장면까지를 담은 다큐멘터리 1부라고 하니 2부도 기다려진다.
https://headla.it/articles/zyWreLr_H0ycV9sF4WcB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