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최후의 밤(Long Day's Journey Into Night)
정말 지구가 최후를 앞두고 있다면? 그땐 뭘 해야 “한 세상 충분히 즐겼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럴 때 우린 모두 사랑 지상주의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다룬 영화가 이런 제목이니 그야말로 사랑에 목숨 걸 만한 사람이 지은 건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또한 사랑에 목마른 남자다. 그가 외로움에 취해 방황한 기억과 잠을 잘 때 꾼 꿈이 각각 1부와 2부 내용이다. 재미있게도 1부에서 이 남자가 기억하는 자신의 과거가 멋대로 조각나서 그가 꿈을 꿀 때 새로운 이야기로 짜 맞추어진다.
이 영화는 음식으로 치면 샐러드, 미술로 보자면 꼴라쥬 같다. 온갖 이질적인 일들을 버무려서 원래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없게끔 희한하게 하나로 합쳐 버렸다. 영화를 보다 보면 도무지 ‘전체 줄거리가 뭐지?’ 하며 알쏭달쏭해진다. 그런데도 이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에 저절로 취해 버린다.
이렇게 되면 관객으로선 조각난 장면들을 나름대로 맞춰서 전체가 하나의 모자이크 그림이 되게끔 조립하고픈 욕구가 생긴다. 요리라고 치면, 도대체 이 맛난 음식이 뭘로 만들어졌는지 낱낱이 분해하고픈 충동이 올라오듯 말이다. 천천히 한 입 음미해 보자. 양념과 원재료가 뭔지 알아내고픈 궁금증을 안고.
(아래부터 영화 내용이 있습니다.)
미러볼이 회전한다. 어떤 여자가 노래를 부르려 한다. 순간 잠에서 깬 남자 뤄홍우.
알고 보니 그는 꿈을 꾼 거였다. 가까이 있어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처럼 꿈에서 본 여인은 신비롭다.
그는 고향 카일리로 간다. 아버지의 부고를 들어서다. 고향으로 향하며 이 땅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했던 몇몇 사람들이 생각난다. 어릴 적 나를 떠난 어머니, 어릴 적 고향 친구 백묘, 그리고 완치원이라는 여자. 이들과 얽힌 기억들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깜박깜박. 불빛이 점멸하듯,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듯 기억도 점멸한다. 오래된 기억일수록 그렇다. 의식으로 떠올라도 전체 기억은 조각나서 이어지지 않고 뚝뚝 끊긴다. 외로운 남자 뤄홍우도 마찬가지다.
시간은 잔인하게도 결국 지우개처럼 인간의 기억을 지워버리게 마련인걸 어떡하겠나. 하지만 뤄홍우는 소중했던 찰나의 순간을 되새김질하려 애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억을 떠올리며 엄마에 대한 추억, 그리고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단서들을 찾아 헤매는 모습. 이게 바로 1부 줄거리이다.
그가 어렸을 때 엄마는 아들과 남편을 떠나버렸다. 아버지는 왜 죽기 전 오래된 시계 속에 엄마의 사진을 숨겨 놓았을까. 담뱃불로 얼굴을 지진 채 낡아버린 사진. 엄마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알 길이 없다.
왜 그가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도무지 정체를 알기 어려울까. 꿈속에 자꾸 나타나는 그녀도 마찬가지다. 뤄홍우는 경찰인 전처를 통해 사진 뒤에 적힌 주소를 수소문해 찾아간다. 알고 보니 그곳은 교도소였다.
뤄홍우는 면담을 신청해서 어떤 여죄수를 만난다. 이 사람은 옛날에 완치원이란 여자(탕웨이 역)와 함께 빈 집 털이를 하곤 했다. 여죄수는 어느 연인이 살던 집에서 완치원과 같이 훔친 책을 떠올린다. 내용은 반 밖에 없는 초록책. 완치원은 그 책을 유독 좋아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다는 말도 했었다.
속표지에 있는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애인의 집이 회전한데요.
그 초록색 책의 말을 믿으세요?
현실에서 뭔 뚱딴지같은 얘기인가. 뤄홍우가 떠올리는 의식의 흐름대로 장면이 흘러가기에 자꾸 생뚱맞은 만남과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대화가 이어진다. 내 눈앞에 보이는 화면도 꿈인지 상상인지 알 수 없다. 다만 1부 사연이 끝나면 관객 마음에는 진한 감정이 남는다. 주인공 뤄홍우가 느꼈을 법한 상실감, 엄마 혹은 미지의 여인 완치원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기억에 대해 착각하기 쉬운 점이 있다. 보통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 줄거리를 기억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살면서 중요했던 순간은 사실 감정과 감각으로 기억한다. 사실 자체보다는 당시 나를 사로잡았던 강렬한 기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졌던 감각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래전에 누군가와 싸운 기억을 떠올려보자. 그 상대와 어떻게 해서 싸우게 되었는지처럼 자세한 전후 맥락이나 실제 주고받은 말보다는 분노에 불붙은 내 기분, 누군가가 나를 쏘아보는 눈빛처럼 오감으로 흡수한 기억이 보통 더 또렷하다. 감정과 감각 기억은 줄거리 식으로 내 머리에 저장된 기억보다는 훨씬 더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꿈에서는 현실 기억이 내 무의식과 얽혀 나도 알지 못하는 내 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내 안에 있는 온갖 기억과 욕구, 생각, 감정이 제멋대로 식 샐러드 재료처럼 버무려진 꿈은 내 무의식을 보여주는 지도이다. 이제 뤄홍우의 꿈에서도 마법이 시작된다. 현실감과 무의식이 뒤섞여 버린 채.
뤄홍우는 미지의 여자, 완치원을 찾아서 카일리의 어느 술집에 찾아간다. 하지만 아직 술집은 문을 열지 않았고 저녁이 돼서 극장에 가고 그는 깜박 잠이 드는데.. 여기에서 관객은 그의 꿈속으로 함께 들어간다. 3D 체험이 시작되는 바로 이 순간. 실제 3D 안경을 끼고 영화관에서 이 황홀한 낙하 체험을 언제쯤 해볼 수 있을까.
꿈에선 현실에서 불가능한 마법이 가능하다. 뤄홍우가 현실에서 사랑에 대해 느낀 결핍감은 꿈에서 보상받는다. 보고 듣고 만지고 느꼈던 현실 경험을 재료로 그는 사랑에 빠져들고픈 소망을 꿈에서나마 이룬다. 한 번쯤 연인과의 낭만에 취해 본 사람이라면, 연인과 함께 할 미래가 어떨지 비현실적인 공상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이 남자의 꿈속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아찔함을 느끼리라.
꿈속에서 뤄홍우는 의식 속 시간을 되돌린다. 광산 속 갱도에서 밀차를 뒤로 돌리는 장면이 갑자기 나타나면 우리는 그가 과거로 시간을 되돌리는 중이라는 걸 그냥 직감할 수 있다. 그는 완치원을 다시 만나는 지점까지 과거로 가 버린다. 그리고 그녀와 꿈꾸었던 달콤한 미래에서 자신이 낳은 아들과 동굴 안에서 탁구 시합을 한다.
이 아들은 여인 왕치원(탕웨이 역)이 1부-현실에서 낙태했던 태아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만약 자신이 아이를 낳았다면 커서 운동선수가 되었을 거라고 말했을 때 뤄오홍은 "그럼 탁구는 내가 잘 가르칠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한 적이 있다. 2부-꿈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 소년은 뤄홍우가 여인과 함께 새 생명을 잉태하고 싶었던, 현실에서 채우지 못한 욕구가 반영된 모습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뤄홍우의 자기(self)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자, 동굴 밖으로 문을 열고 나가보자. 이제 그는 어떤 언덕을 내려온다. 그 순간 망고과일 그림을 맞추기 하는 게임 중인 완치원이 보인다. 아니, 완치원이 꿈에서 변신해 버린 낯선 여인을 만난다. 새로 시작되는 그녀와의 만남. 함께 하는 하룻밤 꿈속 데이트는 또다시 시작된다.
라켓을 회전시키면
우린 날 수 있어
꿈속 그녀는 말한다. 계속 이 무슨 정신 나간 대화인가 싶지만 여긴 꿈이다. 무엇이든 상상하는 대로 된다고 믿는다면 실현된다. 라켓을 두 번 회전시켰을 때 두 번째 회전은 성공한다. 이젠 하늘도 날 수 있다.
오늘 달빛이
충분히 밝다고 생각하면
키스해도 좋아요.
하지만 달빛은 아직 충분히 밝지 않다. 뤄홍우는 아직 키스를 안 한다. 그러자 미지의 여인(탕웨이 역)은 자기 제안을 수정한다.
주문을 걸어서
이 방이 회전하면
키스해도 좋아요.
그러자 남자는 주문을 외우고 방이 회전한다. 마치 시(詩)와 같은 대화가 오간 후 남녀는 키스한다.
연인이 서로 사랑을 느끼는 순간은 현실에선 불꽃이 타오르는 찰나처럼 짧지만 우린 그때를 영원히 저장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랑도 변하고 생명도 언젠간 사라질 거다. 그럼에도 순간이 영원이 되길 꿈꾸는 게 인간 아닐까.
사랑은 마음을 아찔하게 만드는 마취제처럼, 나를 마비시키다가도 휘발성이 있어 사라지는 약물처럼 잠시 내게 스며들었다가 사라진다. 이 지구에서 행복하다고, 행복에 취했다고 잠시 말할 수 있는 순간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가 아닐까. 연인이 내 곁에 있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듯 신비롭고, 바라보고 있지만 더 가까이 다가가고픈 답답함이 올라오는 순간, 상대가 내게 건네는 말 한마디는 마치 거대한 수수께끼와도 같다. 나에 대한 해답을 풀어보라는 오묘한 질문처럼 들리며 설레는 이 순간. 우리는 지금이 영원토록 정지되길 바란다.
사랑이 쉽게 변하고 소멸하는 현실을 벗어나 잠시 환상에 취해보면 어떨까, 줄거리를 굳이 꿰어 맞추려 하지 말고 그냥 분위기를 즐기고 싶다면 말이다. 되도록 심야 시간 관람을 추천한다.
덧 1) 이 작품 속 무대가 된 ‘카일리’라는 공간을 소재로 감독이 앞서 만든 영화는 『카일리 블루스(2015)』입니다.
덧 2) 2024년 6월 개봉 예정인 『원더랜드(2024)』 에도 탕웨이가 출연합니다.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영화관심_Kino Psycho] 2023.05.24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