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타고 30일, 아프리카 - 23
룩소르-카이로 구간은 야간 버스를 탔다. 비행기, 침대칸 기차에 비하면 버스는 너무나 저렴하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비해 이집트는 그래도 대중교통을 예약할 수도 있고 이용할 때 별 걱정이 없겠구나 싶었지만 아차차.. 방심했다. 왜 하필이면 내가 탄 버스는 고장이 난 걸까.
머리로 신나게 헤드뱅잉을 하며 쪽잠을 자던 중이었다. 갑자기 버스가 작은 터미널에 멈추는 게 아닌가. 창 밖 풍경을 봤을 땐 카이로에 거의 다 와간다 싶었는데 버스가 서 버렸다. 그리곤 모든 승객들은 내려야 한다는 소리를 한다.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알고 보니 자동차 바퀴에 문제가 생겨서 더 이상 운행을 못한다는 거다.
이걸 고치려면 2시간쯤 걸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수리하는 사람들이 이 이름 모를 터미널에 도착하기까지 이 정도 걸린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니 그 후에 버스를 고치기 시작하면 언제쯤 수리가 끝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였다.
간만에 여행 중 미아가 된 기분이랄까. 과거 종이 지도로 여행하던 시대였다면 좀 더 아찔한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단숨에 졸음은 달아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승객들은 이미 모두 내린 뒤였다. 어쩌나. 서둘러 구글 맵을 켰다.
내 위치를 파악해 보니 오늘 목적지인 기자 피라미드(Giza pyramid complex)로 가려면 대중교통으로 약 40-1시간 정도 걸리는 지점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 광화문에서 경기도 과천까지 가야 하는 느낌이랄까? 거리 가늠이 되자 서둘러 배낭을 둘러매었다.
다행히 여행을 준비하면서 한국인들이 지하철로 카이로에서 기자 피라이드 지역으로 이동하여 당일 관광을 했다는 수기를 읽은 게 생각났다. 일단 버스 터미널을 빠져나온 다음 길가를 스치는 사람 중 아무나 붙잡고 가까운 지하철 역이 어디쯤인지 물어보았다. 다행히 거리는 차와 행인으로 붐볐다. 현지인이 영어로 해준 설명으론 기자(Giza) 지하철 역은 내 위치에서 여섯 정거장 거리에 있었다.
기자 전철역을 빠져나온 후 로컬 미니버스를 10파운드에 탔다. 기사님께 내가 예약한 숙소 주소를 보여주며 근처에서 내려달라고 부탁하고 버스에서 내렸는데 구글 맵을 뚫어지게 보아도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또 길을 지나가는 누군가를 붙잡아 숙소 주인에게 전화 통화를 시도해야만 했다.
You're Lucky.
마침내 도착하자 숙소 주인이 처음 건넨 인사말이다. 그가 한 말이 맞았다. 조금 전까진 불운이었지만 숙소 투숙객인 일본인 청년 S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그는 오늘 체크아웃 후 기자 피라미드를 구경할 예정이었다. 숙소 주인이 제안한 대로 외톨이 여행자인 우리 둘은 함께 기자 피라미드 구역을 다 돌면서 편하게 구경을 했다.
이곳은 1박에 22달러쯤 하는 작은 호텔이다. 많은 이들은 피라미드 야간 쇼를 루프탑에서 볼 수 있는 숙소를 예약한다. 나도 큰 마음을 먹고 거금을 썼다. 여긴 1박 30달러가 넘었던 다르에스살람 공항 근처의 허름한 호텔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깨끗하고 전망이 좋다. 말 그대로 기자 피라미드가 눈앞에 보인다. 여태까지 아프리카 전역을 여행하던 중 최고로 깨끗하고 화려한 호텔급 숙소다. 게다가 무려 샴푸 등 어메니티가 있다니..!! 드디어 한 달 만에 비누가 아닌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 이 상쾌한 기분이 얼마만인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어마어마했다. 특히 푸쿠 왕 피라미드는 다른 2개에 비해 월등히 컸다. 좀 더 후대에 완성된 멘카우라왕, 카프레왕 피라미드는 겉 벽돌이 꽤 바스러졌건만 푸쿠 왕 피라미드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자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피라미드 전체를 눈 안에 담는 건 불가능하다. 고개를 과감하게 뒤로 꺾어서 위를 쳐다보아야 뾰족한 꼭짓점을 내다볼 수 있다. 다른 이들처럼 벽돌 하나를 겨우 기어올라가 보았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거리는 꽤 멀다. 뙤약볕 아래를 걸을 때마다 사막 모래 속에 발이 푹푹 꺼져 들어간다. 평지를 걷는 것보다 몇 배는 힘이 드니 금세 갈증이 나고 어질어질하다. 찬 생수 페트병을 가지고 다녀도 내 목구멍에 닿는 물 온도는 뜨거워서 불쾌지수가 올라간다.
낙타꾼들은 이렇게 지친 관광객들에게 인생 사진도 건지고 낙타로 이동하라고 호객을 한다. 일본인 청년 S와 난 서로 힘내자고 말해주며 이들을 구경만 했다. 대신 몰래몰래 사랑스러운 낙타 얼굴을 찍어보며.
여행이 길어질수록 만족할 만한 먹거리를 찾는 게 그날의 행복을 좌우하게 된다. 나도 S도 마찬가지였다. 기자 피라미드 근처 골목을 거닐다 보면 금세 피자헛 간판이 보인다. S와 피자로 점심을 때우며 유적이고 나발이고 우리는 계속 음식 얘기에 집중했다. 당시 궁금증은 이거였다.
야채가 빨리 시드니까
여기에선
팔기 힘든 걸까?
S는 세계 여행 중이라고 한다. 이집트를 오기 전에 인도를 거쳤는데 두 나라 모두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맛보기가 너무 어렵다고 했다. 그는 신선한 일식과 야채를 그리워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토양이 척박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나라에선 신선한 야채를 먹는 게 쉽지가 않다. S가 신선한 생선 요리를 간절히 그리워하던 게 기억난다.
나도 이집트에 머물면서 굶주림이 누적된 상태였다. 여러 숙소를 전전할 때마다 내주는 음식들이 죄다 굽거나 튀긴 요리들이다. 차라리 아무런 양념을 가하지 않은 오이와 토마토를 얇은 조각이라도 접시에 담아주면 다행으로 여겼다. 위 사진처럼 호스텔급이든 저렴한 호텔이든 숙소에서 차려주는 아침은 대게 이런 구성이다. 이슬람 식 야채 절임, 전통 빵, 과일 차, 커피, 계란 요리. 아침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S는 숙소 주인 할머니가 정성껏 만들어 준 이집트식 저녁을 먹고 300 파운드인가를 냈다고 했다. 그가 보여준 음식 사진으로 보았을 땐 내가 룩소르 숙소에서 먹었던 식사와 구성이 동일해 보였다. 이집트에선 호스텔이나 저렴한 호텔에서 저녁 메뉴를 주문할 경우 보통 난 같은 빵과 곁들여 먹을 만한 메인 요리, 음료(차 혹은 주스)가 함께 나온다. 다만 숙소가 바뀌어도 아침과 저녁 메뉴는 이런 식으로 한결같다. 그러니 질릴 수밖에.
사실 이집트에선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보다는 좀 더 깨끗하고 건강한 할랄 푸드를 즐길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웬걸. 거리에서 파는 현지 음식들을 체험해보고 싶어도 청결이 의심되어 사 먹기가 힘들다. 배탈이라도 나면 낭패라는 생각에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이슬람 향신료 냄새에 익숙하지 않다면 이집트 현지 음식엔 호불호가 갈리기 쉽다.
이집트는 더러운 나라였다. 여행 후기를 보면 다들 웅장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사진이 담겨있지만 기자 피라미드 초입에는 거대한 쓰레기 산 피라미드가 있었다. 이걸 치우기 전까진 아마 계속 높아지겠지?
물론 청결에 대한 기준은 개인 차가 있다. 또한 어느 나라든 낙후된 지역이 있기 마련이다. 다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 옆에 놀라울 정도로 이런 폐기물들이 방치되어 있다는 게 안타까웠다.
왜 이렇게 거리 정비가 안 되는지를 조심스레 숙소 주인에게 물어보자, 이곳 근처 교통망을 국가에서 개발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숙박업 종사자로서 그는 큰 포부를 갖고 있었다. 피라미드 근처에 전망이 좋은 건물을 이렇게 선점했고, 앞으로 사업을 키워가고 싶다고 했다.
숙소 주인의 아들 M도 만만치 않은 꼬마 사업가 기질이 보였다. 10살인데 벌써부터 숙박객을 대상으로 관광 기념품을 팔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아들은 루프탑에서 가판을 펼치며 만반의 영업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날따라 손님이 나 한 명뿐이었는데도 말이다. 그 모습이 부담되기보다는 귀여웠다. 아버지도 이런 아들이 자랑스럽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소년 M은 장래에 미국에 가는 게 꿈이란다. 미국 어디에 가고 싶은지 물어보니 미국에 어떤 곳이 있는지는 아예 모른다고 한다. 그냥 미국에 가고 싶다고, 자신은 장래에 메르세데스 벤츠를 몰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 이 아이는 이집트에서 살아남는 게 힘들다는 걸 벌써 아는 듯했다.
한편으론 벌써 이 아이가 벌써 자본 지상주의를 꿈꾸는 건가 싶어 착잡하기도 했다. 허긴 이집트뿐만 아니라 한국 학생들의 현실도 마찬가지 아닐까.
소년 M은 번듯한 사업을 꿈꾼다 쳐도 많은 이집트 젊은이들은 이 땅에서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사는 풍경을 보면 이집트가 앞으로 부유한 선진국이 될 확률은 '0'으로 보였다. 청년들은 일찍부터 어른들을 보며 관광객을 등쳐먹는 상술을 익히는 걸까.
척 봐도 미성년자인 아이들이 관광객을 속여먹으려는 상술에 괘씸했던 건 한두 번이 아니다. 카이로행 야간 버스에 탑승할 때도 10대 초반처럼 보이는 짐꾼 소년은 별안간 돈을 요구했다. 버스 아래 칸에 짐을 맡기고 짐 표를 받을 때 10파운드를 내라는 소리를 듣고 버스 회사 직원에게 왜 더 돈을 내야 하는지 물었지만 그는 못 들은 척했다.
다른 외국인 승객들도 모두 거센 항의를 이어가자 그 직원은 마지못해 답했다. 저 소년이 월급이 작아서 그런 거니 그냥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누가 곁에서 불법 행위를 해도 못 본 척, 못 들은 척. 이런 유체이탈 반응엔 당혹스럽기만 했다.
젊은 10대로 보이는 패거리들이 길가에서 바나나 등 과일을 파는 가판을 펼쳐놓았길래 바나나 2개를 먹으려고 가격을 물어보니 내 스마트폰 계산기 위에 70파운드(₩1,990)를 누른다. 원화로는 얼마 안 되지만 이집트 물가로 치면 말도 안 되는 가격이다. 내 얼굴이 그리 순진해 보였던가. 돈 몇 푼을 떠나서 남한테 속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거래를 하는 건 굉장히 불쾌한 일이다.
이슬람 식 거래 문화가 원래 이런 데 이방인 입장에서 적응을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여행자를 봉으로 보고 어떻게든 더 뜯어내려고 상대가 흥정을 시도할 경우 몇 가지를 명심하자.
사고 싶은 물건이 있어도 먼저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먼저 다른 물건에 1순위로 관심이 있는 척 가격을 물어본다.
그다음 그 물건이 비싸다고 말하며 2순위로 내가 사고 싶은 물건 가격을 슬쩍 물어본다.
상대가 부르는 가격의 1/10을 제시한다.
당신이 생각한 적정 물건 가격까지 협상이 안 된다면 단호히 그 자리를 떠난다.
상대는 당신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거의 대부분 가격을 깎아줄 것이다.
덧 1. 많은 관광 가이드북에 나오는 것처럼 불꽃놀이까지 펼쳐지는 기자 피라미드 라이트 & 사운드(Light & Sound) 쇼는 때를 잘 맞춰가야 한다. 다만 숙소 주인 말로는 매일 밤 다양한 색깔로 야간 조명이 기자 피라미드를 비춘다고 하니 별도로 쇼를 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즐길 만한 경치였다.
덧 2. 카이로 근교에선 우버(Uber)가 흔한 교통수단이다. 우버 택시는 앱으로 쉽게 잡을 수 있다. 다만 요금을 계산할 때 팁을 추가로 내야 한다. 우버 택시 앱에서는 요금 계산 시 고객이 팁을 설정하도록 하는 화면을 끼워 넣었다. 최소 이집트 5파운드는 내도록 되어 있다. 고객이 팁 금액을 직접 입력하도록 하는 기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