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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Apr 06. 2023

"사람이 너무 싫은데 사람이 좋아요"라는 괴짜 꼰대할배

오토라는 남자(A Man Called Otto, 2022)

어쩌란 말인가. 죽지 못해 사는 오토 할아버지. 이 나이가 되니 사람이라면 지긋지긋한데도 사람이 좋다니. 오토는 마음이 두 개라서 하루하루 괴롭다. 마음이 두 개니 그때그때 두 모습으로 변신한다. 꼴 보기도 싫은 인간들에겐 상꼰대 진상으로,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겐 츤데레 어르신으로.


2023년 3월 29일 개봉하는 이 작품은 스웨덴 소설 『오베라는 남자(프레드릭 배크만 저)』를 바탕으로 한다. 스웨덴에선 인구 10%에 해당하는 90만 명이 읽었고 뉴욕타임스 93주 연속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한국에서만 50만 부가, 전 세계로는 800만 부가 팔린 작품이다. 이미 2015년에 개봉한 동명 영화가 있는데도 한국으로 치면 안성기 배우급 인지도를 가진 톰 행크스를 주연으로 미국판 리메이크작이 또 개봉한다. 무엇이 사람들 마음을 후벼 파기에 이토록 인기 행진을 이어가는 걸까?


(이제부터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상꼰대'로
변신하는 순간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오토 할배는 증오한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놈들을. 제대로 지킬 걸 지키지 않는 족속들을 보면 화를 참을 수 없다. 이런 인간이 맹~한 표정으로 친절하기까지 하면 "어이가 없네" 표정으로 추가 변신도 가능하다.


그런데 오토가 화 나는 게 이해는 간다. 예를 들면 고객이 원하지도 않는데 친절을 베풀려 하는 점원을 볼 때다. 해야 할 일이나 똑바로 하지 정작 물건값 계산도 똑바로 못하니 암산 능력자인 오토가 손수 계산까지 해줘야 하나. 계산을 틀려 놓고 웃는 얼굴로 응대하는 꼴을 보니 더더욱 혈압이 끓어오른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머저리들!


지킬 걸 제대로 안 지키는 인간들은 곳곳에 널렸다. 분리수거를 제대로 안 하는 놈들, 우리 집 앞에서 오줌 싸는 놈들은 욕먹어도 싸다. 오토는 아침부터 재활용 쓰레기를 손수 재분류하며 대충대충 사는 놈들을 향한 육두문자를 웅얼거린다. 주차 금지 구역에 지 마음대로 '잠시만' 주차하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혼자만 편하자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모르면서 오토를 보곤 다정하게 인사를 하면 뭐 어쩌자는 말인가. 단연코 개꼰대로 변신해 주겠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는 속담은 오토 할배에겐 통하지 않는다. 그에겐 이런 속어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문장이다. 기본을 무시하는 족속들이 변명할 때 자주 써먹는 대화법일 뿐. 이런 족속들에게 오토는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날린다. 근데 지켜보는 관객인 내가 속이 시원한 건 왜인가?



싫지만
'츤데레' 이웃남으로
재변신!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오토는 뭔가 잘해보려 하지만 능력이 모자란 사람에겐 퉁명스런 슈퍼맨이 된다. 자타공인 베스트 드라이버이기도 하다. 평생직장이었던 회사에서 얼마  퇴직하기까지 오토는 공학도였다. 온갖 기계가 작동하는 원리에 빠삭할 수밖에. 어느  오토는 새로 이사  마리솔 부부가 주차에 애먹는 꼬락서니를 보곤 답답함을 참지 못한다. 이거 하나 못하면서 무슨 운전이냐고 호통을 날리며 단숨에 대신 주차를 시켜주고 오토와 마리솔 내외는 이웃이 된다.


사실 오늘은 오토가 자살하기로 마음먹었던 날이었다. 평생 부지런히 직장과 가정을 오가며 철학자 칸트처럼 시간표 대로 살아왔기에 오토는 죽음도 사전 계획한다. 콜센터와 싸워가며 여태까지 이승에서 사용한 전기와 전화요금도 지불 완료. 가게에서 사 온 밧줄을 천장에 매달고, 바닥을 더럽히지 않으려 마루엔 신문지까지 다 깔았다. 이제 매달리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난다. 근데 웬걸? 천장 시공 하나 똑바로 못해놓은 놈들 때문인지, 육중한 몸무게 때문인지 천장이 뚫렸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항상 이렇게 쌀쌀맞으세요?


쌀쌀맞을 수밖에. 자꾸 현관문을 두드리는 이웃집 마리솔은 목매달고 죽으려는데 방해물이다. 젠장, 오늘은 수다쟁이 마리솔이 고맙다고 건네준 치킨 요리나 먹어야겠다. 먹어보니 맛은 있다. 아쉽지만 오늘은 죽긴 글렀다. 근데 그다음 날도 요리를 해주며 미소 띤 얼굴로 도움을 청하니 이걸 어쩌나. 게다가 자살 무대인 마루에 깔아 둔 신문지에 떡 하니 박힌 <8달러에 생화 두 다발!> 쿠폰. 이건 놓칠 수 없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만나러 묘지에 갈 때 요긴하게 써야지.


이미지 출처: IMDb.com


당신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되는 게 없어.


그는 하루빨리 세상을 등지겠다는 속마음을 단 사람에게만 고백한다. 옆 집 신랑 루벤. 아내 쏘냐와 결혼 후 정착한 동네에서 줄곧 라이벌 관계였던 남자다. 누가 포드 차를 사면 다른 쪽도 포드를 사야 하고, 또 누가 쉐보레를 사면 역시 쉐보레를 사야만 했던 앙숙. 오토에게 염장을 질러대던 루벤은 기어코 도요타 차를 뽑고 오토에게 뽐내며 K.O. 승을 거두었다. 그랬던 루벤도 지금은 산송장이다. 휠체어에 앉아 말도 못 하는 신세니 오토가 결심한 걸 막을 도리가 없다.



또 '싫지만'
정의의 사도가 되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오토는 마리솔 부부를 비롯해 이웃들 덕에 점점 칭찬 지옥에 빠진다. 성질은 있는 데로 다 내면서 이웃들이 부탁하면 또 다 들어주니 오토는 괴로울 뿐이다. 마리솔 남편이 병원 신세를 질 땐 베이비 시터가 되어 두 딸들을 대신 보살펴 주고, 얼어 죽기 직전인 고양이를 떠맡아야 한다. 초보 운전자인 마리솔이 운전하는 꼴을 보면 불안 불안해서 못 봐주겠으니 운전 교사까지 자청한다. 루벤 부부가 집을 뺏기지 않게끔 따끔하게 부동산 투기 회사를 혼내주는 일도 똑똑한 오토 몫이다. 죽기 전까지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오토는 호시탐탐 죽을 기회를 노린다. 마침내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려고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세었지만 다리가 비실비실한 어떤 노인네가 갑자기 나보다 먼저 선로에 뛰어드는 게 아닌가. 오늘은 꼭 죽고 싶은데 저 영감탱이를 먼저 구해놓고 죽어야 하니 운도 더럽게 없다.


설상가상으로 오토가 극혐 하는 SNS에 누군가가 이 광경을 영상으로 업로드해 버렸다. 졸지에 영웅이 되어버린 그를 찾아 소셜 미디어 기자까지 찾아오니 골치만 아플 뿐. 그는 왜 이리도 죽으려 하는 건가. 이렇게도 간절한 자살 충동을 밀쳐놓는 게 괴로우면서 왜 기어이 누구를 도와야만 하는 걸까?



숙맥 남자의
사랑이라는 일탈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청년 오토가 열차 역에서 소냐를 만난 건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법 없이도 살 만큼 정직한 오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규칙을 어긴다. 그는 소냐가 길 위에 떨군 책을 들고 그녀를 쫓아 열차표도 없이 기차에 오른다. 그리고 인연은 시작되었다.


소냐가 먼저 제안한 저녁 식사. 오토는 단정한 양복 차림으로 그녀를 마주한다. 그러나 온갖 기계가 작동하는 원리만 떠들어 대는 자기 모습이 한심할 뿐이다. 오토는 스스로 긴장을 견디지 못해 데이트 중 먼저 떠나려 한다. 역시 여자를 대할 줄도 모르는 숙맥은 어쩔 수 없다고, 입담도 모자란 바보 멍청이라고 자책하며. 소냐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오토를 붙잡고 물어본다. 왜 그녀에겐 정식 요리를 시켜주면서 그는 전식만 시키는지.

당신이 먹고 싶다는 건
다 사주고 싶어서요.


오토는 집에서 먼저 밥을 먹고 나왔다고 고백한다. 셈이 정확한 그가 돈을 아껴 소냐가 원하는 걸 더 사주고 싶었다고. 이 말을 듣고 소냐는 오토에게 바로 키스한다.

오토는 정말로 바보가 되었다.



매사에 정확한 남자가
분노하는 법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소냐를 만나기 전에
내 삶은 흑백이었어.
소냐를 만나곤 컬러가 되었지.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었던 오토에게 불운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소냐가 임신 6개월 차였을 때 그녀 소원대로 떠났던 여행, 그리고 대형 버스 사고. 결국 둘은 아들을 잃고 소냐는 일생동안 걷지 못하게 되었다. 사고 조사를 해보니 차 브레이크 결함이 원인이었다. 이때부터 오토는 불독처럼 으르렁거리는 싸움꾼이 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오토는 사고 원인을 듣고 분노한다. 작은 결함을 그냥 지나치고 좋게 좋게 넘어간 게 문제라고. 세상에서 부조리한 꼴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반드시 파국적인 참사를 겪는 거라고. 왜 남이 잘못해서 그 피해를 고스란히 내 아내가 입어야 하냐고. 왜 자신은 운 좋게 온전히 살아남았을까. 어떻게 하면 사고를 피할 수 있었을까. 까칠남 오토가 세상을 향해 내뱉는 분노 밑엔 슬픔이, 슬픔 아래엔 살아남은 남편이 느끼는 뼈아픈 미안함이 배어 있었다. 그가 대충 사는 인간을 저주하는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인리히 법칙'을
믿는 남자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어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들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법칙. 1: 29: 300 법칙이라고도 일컫는 원리를 오토는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아내를 향해 느끼는 깊은 책임감과 성실함은 일생 동안 한결같았던 사랑 표현이었다. 소냐가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오늘도 슬프다. 어제도 슬펐다. 내일도 마찬가지일 거다.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오토는 아내를 애도할 것이다. 그저 하루빨리 괴로운 세상을 떠나 그녀 곁에 가고 싶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권총 자살을 시도한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소냐가 속삭이는 듯하다. 이건 그녀가 원하는 게 아니라고. 이 세상에 좀 더 남아 있으라고.


그는 결국 자살 시도를 접고 이제부턴 성실한 이웃으로 살기로 한다. 루벤 부부는 결국 명석한 오토 덕에 집을 되찾는다. 교사였던 아내 소냐가 아꼈던 제자인 트랜스젠더 말콤도 보살핀다. 마리솔 부부의 세 아이에겐 다정한 이웃 할아버지로도 변신한다. 어느 날 그가 아침 루틴(routine)을 어길 때까지.



마지막을 준비하는
어른의 품위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어느 날 아침, 오토는 집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젠 거의 가족인 마리솔 부부가 놀라서 그의 집에 가보니 그는 조용히 침대 위에 엎드려 있다. 선반을 보니 벌써 몇 년 전에 마리솔 앞으로 써 놓은 유서가 보인다. 심장이 선천적으로 커서 돌발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는 의사 설명에 따라 그는 만일을 깔끔하게 준비했다. 사랑하는 이웃이 독거노인 때문에 힘들지 않게끔.


이 세상 온갖 부조리를 보면서도 꿋꿋이 하루하루 사는 사람이 어디 오토뿐이겠는가. 우리 곁엔 고통 속에서도 이 세상을 든든히 받치는 수많은 오토가 있지 않을까.


아마도 우리 대다수는 오늘을 어제와 ‘복사해서 붙여 넣기’ 식으로 비슷하게 살 거고, 내일도 오늘과 비슷할 거다. 이러다 단 하루를 버티는 게 힘들 때가 있다. 어느 날엔 힘들어 죽고 싶은데 그래도 뭔가 사소한 문제가 하나 풀리면 그게 또 내일 하루는 살아갈 힘이 될 때가 있다. 죽고 싶지만 그냥 죽긴 싫은 마음으로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토가 괴로움을 견디며 끝까지 세상에서 숨 쉬었던 것처럼.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오토에게 존경을 보내며.






*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영화관심_Kino Psycho] 2023.03.27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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