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녹색광선 Apr 03. 2023

내 젊음을 온통 저장한 비디오테이프처럼

해피 투게더(1997)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극장에서 누구랑 어떻게 보는가가 사실 영화의 완성이거든요.
누구랑 어떤 길을 걸어가서 어떻게 보고 나왔느냐 까지가 영화의 완성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왕가위 감독이 내한해서 국내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했던 말이다. 인터뷰 내용 중 가장 인상 깊게 들었던 문장이었다. 일상에서 영화를 보는 순간을 특별한 기억으로 만드는 건 결국 영화를 보는 관객 자신이 아닐까. 왕가위 감독 말처럼 그의 영화팬들에게는 이 영화를 처음 어디에서 누구와 어떻게 보았는지가 중요한 기억이 될 듯하다. 그래서 이 글은 영화심리칼럼이라기 보단 영화 에세이가 된다.


내 경우엔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축축함'이다. 1998년 한국 개봉 당시, 비 오는 날 종로에 자리한 어느 허름한 극장에서 보았기 때문일까. 그날따라 거리엔 습기가 가득했다. 당시 갓 성인이 되었던 나는 다행히 연령 제한을 넘겼지만 내면에서 중2병스러운 삐딱함은 아직 남아 있었다. 혼자 저녁 상영 회차를 보며 투박한 화면 질감에 사로잡힌 채 정신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상영관 안에 울려 퍼지는 해피투게더 OST를 들으며 심장이 터질 듯했던 두근거림은 잊을 수 없다. 영화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 영화를 본 기억은 줄거리 자체보단 감정과 신체 감각으로 내 마음에 저장되어 있다.


명작이라고 일컫는 영화는 관객이 자기 마음을 투영할 수 있는 훌륭한 피사체가 된다. 그리고 관객인 내가 그 영화를 보던 순간에 느꼈던 감정, 생각, 당시 살던 모습을 마음에 저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징이 된다. ❰해피투게더❱ 팬들이 이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오직 청춘이기에 내 안에 끓어올랐던 모든 감정과 사랑했던 기억을 영원히 이 영화에 저장할 수 있어서가 아닐까.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주인공 보영과 아휘가 지구에서 고향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낸 시간은 우리에게도 있었던 과거일지 모른다. 우리도 그들처럼 인생에서 막다른 코너에 몰렸다고 느꼈던 순간이, 가진 것 하나 없이 앵벌이로 그날그날 버티며 방황하던 나날들이, 무작정 어느 날 이과수 폭포처럼 미지의 공간까지 다다르고픈 충동이 용솟음치던 순간이, 세상의 끝이라던 우수아이아까지 이유 없이 그냥 달려가고픈 설렘이 있었을지도, 텁텁한 질감의 비디오테이프 영상처럼 흐릿해진 이 모든 기억들은 우리 과거의 한 조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엔 온전히 저장되어 있다. 애인과 사방팔방 거리를 거닐던 겨울날 아침 공기가, 건물 옥상에서 찌는 듯이 더운 날 내리쬐는 태양이, 동네 청년들이 축구를 하던 거리에 비치는 햇살이, 연인과 연습하던 탱고 선율이, 사랑하던 이에게 내 곁에 있어달라고 술김에 부르짖던 치기가, 연인에게 느꼈던 애증과 질투, 우울이, 혼자 남겨졌을 때 온몸을 관통했던 외로움이.


모든 기억은 주관적이다. 영화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특별했던 영화를 보며 관객은 자신만의 개인적인 역사들을 떠올린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나를 살아 숨 쉬게 했던 모든 감정과 기억들이 강한 낙차로 용해되어 물속 깊숙이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이 영화는 관객들을 마음 밑바닥까지 인도한다. "다시 시작하자"라고 되뇔 수 있는 희망의 지점까지. 어쩌면 이 영화의 팬들이 그리워하는 건 영화 자체보다는 이 영화를 처음 보며 사랑과 고통 모두에 휩싸였던 과거의 '나' 일지도 모르겠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이제 사람들이 볼 건 너무 많아졌고, 웬만한 건 본 것도 잘 기억을 하지 못한다. OTT와 DVD 등을 통해 홈시어터 수준의 훌륭한 시설로 집에서도 영화 감상이 가능한 시대다. 영화를 본다는 건 과거처럼 특별한 일상이 아닌 흔한 일과가 되었다. 이런 시대에도 왕가위 영화는 생명력을 잃지 않고 관객의 부름을 받으며 올해도 재개봉을 한다. 장국영이 우리 곁을 떠난 지 20년째, 그는 아직도 ❰해피투게더❱에서 방황하는 청년으로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아직도, 거짓말처럼.






*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영화관심_Kino Psycho] 2023.04.01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더 많은 글은 ‘헤드라잇’ 에서.

https://m.oheadline.com/articles/pUNHChf7etG3vMjYzi48Sg==?uid=743e351dfb3f41898a3018d22148c7f0

https://m.oheadline.com/articles/gjhNNhhIgwssUfekLeR1YA==?uid=743e351dfb3f41898a3018d22148c7f0

https://m.oheadline.com/articles/6ZRMpXPj03GYNWRmUe2h8g==

https://m.oheadline.com/articles/fOdqlQRMzYFAsJ5hJN8H7Q==?uid=743e351dfb3f41898a3018d22148c7f0


매거진의 이전글 듣기 싫은 소리와 다투지 말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