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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Nov 04. 2022

듣기 싫은 소리와 다투지 말기

메모리아 (Memoria, 2021)

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이유는 순전히 폭발머리증후군(Exploding Head Syndrome)이 뭔지 궁금해서였다. 전공이 임상심리이기에 현업에서 접해보지 못한 장애를 영화에서나마 간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영화가 워낙 지루하고 어렵다는 후기를 읽었기에 상영 전 생존 음료로 커피를 들이켰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특별상영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본 결과.


이 영화는 마치 EHS를 경험하는 여성, 제시카(틸다 스윈튼 역)의 브이로그 같다. 원치 않는 소리로 고통받는 어떤 중년 여성의 이야기이다. 이름도 낯선 증상을 겪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제시카가 자신이 겪는 증상이 왜 나타나는지를 탐색하는 여정이 시작된다.


(이제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듣기 싫은 소리가
계속된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소리는 취향이다. 사람마다 듣기 좋은 소리가 있고 싫은 소리가 있다. 이 말은 소리라는 감각이 내 의식에 입력될 때 인간은 저도 모르게 그 소리에 대한 호불호를 가늠한다는 얘기다. 즉, 내 욕구에 따라 어떤 소리를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큰 소리가 별로 거슬리지 않을 거다. 그러나 중년 여성 제시카는 잠을 잘 때 큰 폭발음을 듣는다. 갑자기, 그것도 반복해서 이런 일이 계속되니 너무 괴롭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제시카는 답답하다. 점점 예기불안이 심해지는지 낮에 들리는 온갖 소리에 예민해진다. 길거리를 지나가면 자동차 엔진 소리 같은 온갖 잡음에 휩싸이곤 한다. 이럴 때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긴장한다. 그녀의 몸이 목석처럼 뻣뻣하게 굳어질 때 관객인 나는 깜짝깜짝 놀라며 자동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든다.


관련 국내 논문을 뒤져보니, EHS 대체로 남성보단 여성에게 많이 발병하고 머릿속에서 갑작스러운  소음이 생기는  특징이다. 보통은 아주  폭발음을 많이 듣는다고 한다. 입면기, 그러니까 잠에 빠져들 무렵에 이런 소리를 듣는 빈도가 많은 듯하다. 입면기에는 본격적으로 잠에 빠져들 만큼 사람의 신체는 충분히 이완된다. 어떤 사람은 너무 피곤해서 잠을 자고 싶은데 막상 누우면 잠이   오는 경우가 있다.  이유는 보통 정신적 각성 상태가 계속 유지되어서 몸이  이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제시카는 수소문해 만난 음향 기사에게 자신이 듣는 폭발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콘크리트로 만든 큰 공이 금속으로 된 우물에 떨어지는 소리 같아요.


그녀가 비유하는 말로 간접적이나마 폭발음이 어떤 질감인지, 얼마나 큰지를 짐작해본다.

EHS는 아직 국내외에서 관련 연구도 충분하지 않은 듯하다. 예기치 않은 큰 소음이 머리 안에서 폭발할 때 당사자는 완전히 소리에 압도당할 테니 얼마나 괴로울까. 검색해보니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실제 EHS를 경험하면서 느낀 점을 작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 후반부부터 결말까지는 나름대로 이 증상을 이해해보려는 감독의 의도가 담겨있다.


제시카는 온갖 소리를 체험한다. 그녀의 귀는 매 순간 쫑긋 서 있다. 또 어떤 소리가 나를 힘들게 할까. EHS를 겪는 사람이라면 이런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을게다. 운전을 할 때도, 거리를 걸을 때도, 식당에서 여동생 부부와 밥을 먹을 때도 머리 안에서 갑작스럽게 폭발음이 들리니 그야말로 그녀는 소리와 전쟁 중이다.



소리와 싸우기보단
받아들이기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듣고 싶은 소리만 듣고 괴로운 소리는 차단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입맛대로 소리를 완벽히 가려낼 수 있겠는가. 통제 욕구가 과도할수록 내가 원하지 않는 소리는 듣기 괴롭다. 마치 병에 걸린 환자가 통증에서 빨리 벗어나고픈 마음이 들 수록 더욱 아프다고 느끼는 것처럼. 제시카도 어느 순간 자신이 미쳐가는 건 아닌가 넋두리를 한다. 그러면서도 이 증상이 왜 나타나는지를 탐험하는 여정은 계속된다. 그녀는 우연히 어떤 이웃 남자를 만나면서 소리에 대해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경험은 해로워요.
내 기억을 날카롭게 휘저으니까요.


이 남자는 보는 것마다 잊을 수 없기에 TV나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 망각을 할 수 없다는 건 비극이다. 사람은 온갖 방어기제를 발휘하여 괴로운 기억은 억누른다. 그래야 제정신으로 살 수 있다. 고통을 피하려는 인간의 본능은 이렇게 진화했다. 그런데 모든 걸 기억한다니, 그에게 연민과 동질감을 느끼며 제시카는 자신의 고통을 말한다. 원치 않는 어떤 소리가 계속 들린다고.


난 일종의 저장장치예요.
당신은 안테나로군요.


그는 모든 걸 싫어도 기억하는 사람이었고, 제시카는 온갖 소리를 잡아내는 더듬이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집에서 제시카는 신비로운 체험을 한다. 그녀는 머릿속에 폭발음이 울릴 때마다 어린 시절의 어떤 이야기를 기억해 낸다. 그렇기에 예전엔 소리를 피하고 싶어 신경안정제까지 처방받았건만 이젠 이 소리를 계속 듣고 싶어한다. 그녀에게 이 소리는 혐오 자극이 아닌, 아련한 기억으로 자신을 인도하는 신호(trigger)가 되어 버렸다. 한 마디로 소리에 대한 태도가 바뀐 것이다.


제시카와 이 남자가 왜, 어떤 인연으로 우연히 만나서 이런 대화를 나누기까지 할까. 영화에서는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감독은 그저 밀림 속에 울려 퍼지는 온갖 자연의 소리를 엔딩 크레딧 끝까지 펼쳐놓는다. 마치 ASMR를 있는 그대로 만끽하라는 말 같다. 내 주변의 소리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저 들리는 데로 지나치면 그리 괴롭지 않을 거라는. 소리는 호불호가 덧붙여진 자극이라기 보단 그저 소리 자체일 뿐이라는.




*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영화관심_Kino Psycho] 2023.03.20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https://m.oheadline.com/articles/fOdqlQRMzYFAsJ5hJN8H7Q==?uid=743e351dfb3f41898a3018d22148c7f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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