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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Sep 30. 2022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스라이팅

여인의 초상(The Portrait of a Lady, 1996)

사랑이라는 감정은 일종의 소유욕이다. 사람은 물건이 아닌데, 어떻게 소유한단 말인가.


"사랑한다" 보단 "사랑에 빠진다" 누군가에게 끌리는 마음을   담은 듯하다. 누군가에 대해 강하게 이끌리는 어떤 사람의 모든 것을 샅샅이 알고 싶은 마음,  곁에 두고 원할 때마다 보고 듣고 만지고 싶은 마음,   한마디에  사람의 몸과 마음 전체가 반응하는  확인하고픈 마음.  정도가 불타는 사랑을   인간이 느낄만한 본능일 것이다.


다만 이런 욕구를 현실에서 이상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나이는 갓난아기 정도이다. 아기는 자신이 필요할 때마다 부모를 소유할 수 있다. 밤낮으로 울어재끼며 부모를 힘들게 해도 괜찮은 존재니까.  


그런데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는 성인 남성의 경우에도 여성의 사랑을 소유하는 게 어느 정도 가능했다. 태어나서부터 신분, 직업과 정체성이 거의 정해진 시대. 이 시절에는 신분에 맞게 결혼하는 건 합법적으로 연인을 나에게 구속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당시 남성이 여성에게 구애하여 결혼하는 과정은 적당한 집안 출신에 지참금이 충분하며 나의 아내 역할을 할 만한 여성을 확보하는, 일종의 전략적 행동이었다.



(이제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www.themoviedb.org



결혼이
도박이었던 시절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이 영화는 어떤 여성의 비극적인 결혼 이야기이다. 1800년대 후반, 산업 혁명 이후 서양의 사회 구조를 뒤흔들만한 변화의 파도 속에서도 아직 여성에겐 자유로운 삶이 허락되지 않았다. 장거리 여행을 가더라도 반드시 동행이 있어야만 세간의 부정적 시선을 피할 수 있었던 시절, 이자벨(니콜 키드먼 역)은 보수적인 사회의 통념에 대해 답답함을 느끼고 자유로운 삶을 동경한다.


그녀는 눈부신 미모를 갖추었기에 청혼을 하는 남자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를 거절하느라 그녀는 고통스럽기만 하다. 그녀에게 결혼이란 인생의 족쇄로 보인다. 자신의 미래가 누군가의 아내 역할로 제한되는 걸 뻔히 아는데 이 답답함을 어찌 견디겠는가. 당시 결혼은 내 삶의 모든 결정을 남편이 대리하도록 내맡겨야 하는 위험한 도박이기도 했다.



뱀처럼 교묘한

매력 속으로


그녀는 결혼을 두려워하면서도 우연히 알게 된 오스먼드(존 말코비치 역)라는 남자를 뿌리치지 못한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가난한 예술인이었다. 세상사에 아직 순수한 그녀는 다른 조건을 따지지 않고 이 남자의 언변과 카리스마에 푹 빠져버린다. 그녀가 자신을 거절할 수 없도록 성적으로 유혹해 버린 오스먼드. 마치 먹이를 낚아채려는 교활한 뱀처럼, 배고픈 짐승은 먹이를 보면 절대 놓치지 않는 법.


이미지 출처: www.themoviedb.org


오스먼드는 결혼 후 그녀를 정신적으로 조종한다. 결혼 이전과는 180도 달라진 이 남자, 알고 보니 자식이 있었다. 옛 연인 사이에서 낳았던 딸의 장래를 위해 부유한 남성과 결혼시키기 위한 모종의 작전에 이자벨을 투입한 것.


결혼 후에야 남편의 교활한 실체를 알게 된 이자벨. 그녀는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이 달가워하지 않는 이 역할을 남편 몰래 소극적으로 수행한다. 결국 오스먼드는 자신이 원하는 부유한 남성과 딸의 결혼이 성사되지 못하자 이자벨이 수치심을 느끼도록 마음껏 분풀이를 한다.



인간을 비정상적으로

조련하다


이미지 출처: www.themoviedb.org


오늘날 오스먼드처럼 타인을 조종하는 언행은 일종의 가스라이팅에 해당한다. '가스라이팅'은 한 인간을 비정상적으로 조련하는 행위이다. 즉, 누군가의 육체와 정신을 완전히 소유하려는 비틀어진 소유욕이다.


타인을 온통 지배하고픈 욕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한 번쯤 해볼 만한 낭만적 상상이다. 하지만 타인은 '나'와 다르다. 가스라이팅을 하는 사람은 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계속 껌딱지처럼 타인에게 달라붙는다. 그리곤 상대방이 마치 무선 조종 로봇처럼 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도록 집요하게 괴롭힌다.


당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나여야 해.
내 곁에서 당신은 행복해야 해.



오즈먼드가 다가오기만 하면 부르르 떠는 불쌍한 이자벨. 그녀는 온몸으로 공포를 느낀다.


가스라이팅을 하는 이는 보통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있다. 그 매력을 무기로 누군가에게 전략적으로 접근한다. 자신으로 인해 상대방은 괴로워하지만 가해자는 연민을 느끼지 못한다. 타인을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부속품처럼 취급해 버리는 오스먼드처럼.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피해자인 이자벨은 점점 위축되고 가해자를 두려워한다. 삶의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은 젊은 나이인 이자벨처럼 오즈먼드와의 결혼을 통해 한 남자의 아내로 종속되면 가해자인 남편의 영향력을 벗어나기란 어렵다.



심리적
지배-종속관계


이미지 출처: www.imdb.com


이 영화는 연인 사이에 일어나는 가스라이팅을 다룬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가스라이팅을 당할 수 있다. 부부 사이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에 나오는 JMS 등 사이비 종교에서도.


가스라이팅 관계에서 지배자는 소위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에게 정신적 공격을 가한다. 내 의사결정에 대해 "네가 문제야, 네 잘못이야."라는 표현을 자주 쓰며. 너를 위해 이런 말을 한다는 식으로 강하게 조언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상대에게 각인시킨다. 어느 순간부터 피해자는 자신의 부끄럽고 불완전한 모습이 가해자에게 민낯으로 노출된 듯한 두려움에 휩싸인다. 이런 식으로 가해자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피해자 정신에 자리를 잡게 되어 지배자로 군림한다.


이때부터 피해자는 가해자 눈치를 본다. 무슨 말을 또 들을지 모르는 조마조마한 기분에 사로잡히기 쉽다. 가해자는 보통 피해자의 결점을 찾아내는 게 능숙하다. 피해자가 자기 말에 반박하지 못할 만하게 피해자 결점을 콕 집어서 직면시키면 피해자는 언어로 반박하는 게 어렵다. 특히 평소 자신에게 엄격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상대가 자신의 결점을 찾아내고 가차 없이 조언을 빙자한 공격을 가하며 피해자는 '내가 더 우울해진' 느낌을 가진다.



지배자로부터
탈출하다


이미지 출처: www.imdb.com


결혼 이전에 이자벨은 육체는 여인이었더라도 정신은 소녀에 가까웠다. 세상을 바라보는 도식(schema) 자체를 건드리는 강력한 존재가 악의를 품고 순진한 여인을 소유하려는 과정은 잔인하다. 아직 어려서 세상을 모르는 여인은 지배자에게 종속된 후 서서히 파멸되어 간다.  


다행히 그녀는 오즈먼드를 벗어난다. 자신을 진정으로 조건 없이 사랑해 주고 보살펴 주었던 사촌이 폐결핵으로 죽어가자 기어코 오즈먼드로부터 탈출한다. 그녀는 결국 남편의 지배를 벗어나지만 그의 딸은 정략결혼 실패 후 오즈먼드에 의해 수녀원에 유배되듯 쫓겨나 있다. 가엾은 그녀들.


누군가와 가까워질 수록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마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자연스럽다. 연인과 부부 사이에 잔소리를 하는 모습처럼. 그러나 조언이 적절한 정도를 넘어섰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바로 감정이다. 불쾌함, 당황스러움, 수치심, 모멸감 등등. 상대가 심리적 경계를 넘어서서 내 마음에 집요하게 침투하려는 걸 눈치챌 수 있는 순간은 이런 불편감을 느낄 때이다. 


누군가가 나를 지배하려 할 때 나를 지키려면 내 감정에 좀 더 민감해지자.








#가스라이팅 #소유욕 #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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