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2022)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낸시는 홀로 호텔 방에 들어왔다.
가벼운 화장에 정장 차림.
약간 들떠 있는 표정.
여행가방을 천천히 끌며 방에 들어와선 뭔가를 할까 말까 머뭇거리는 몸짓.
이 첫 장면만 봐서는 그녀가 어떤 이유로 이곳에 머물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잠시 후 어떤 남자가 이 방에 입장.
낸시와 그는 서로 처음 만나는 사이처럼 보인다. 그의 이름은 '리오 그랜드'. 둘은 서로 화사한 표정으로 간단히 인사를 나눈다. 잠시 후 남자는 낸시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는지를 묻는데...
낸시는 좌불안석이다. 얼굴은 점점 홍조가 되고, 샴페인을 딴 후 자신의 옷 매무새를 가다듬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땐 잠시 후 그녀가 곧 공황발작(panic attack)이라도 일으킬 것만 같다.
이 영화의 주요 무대는 이 호텔 방이다. 주요 내용이 낸시라는 중년 여성의 '섹스(Sex) 도전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곳에서 촬영한 장면들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스릴이 넘치고 지루할 틈이 없다.
낸시는 평생 엄마와 아내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나름대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듯하다. 하지만 그녀에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다. 사실 그녀는 남편과의 성관계에서 단 한 번도 만족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남편과의 섹스는 결혼 생활 내내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평생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왔기에 자신의 솔직한 욕구를 말로 표현해본 적이 없었나 보다. 남편이 타계한 후 그녀는 큰 결심을 하고 리오 그랜드라는 낯선 남성이 제공하는 퍼스널 서비스, 섹스를 신청한 후 드디어 이 호텔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공황감을 느낄 만하다. 이 영화는 단순히 성적 만족에의 도전기라기 보다는 개인의 자존감을 다루고 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 중 가장 큰 고통을 주는 건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수치심(shame), 혹은 부끄러움(shyness)'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아담과 이브가 각자 신체를 자각하면서 잎사귀로 몸을 가리는 본능적인 행동은 인간 의식의 발달에 있어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 모습은 바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태동하는 순간이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렇기에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를 미리 가늠하고 스스로 말과 행동, 외모의 매무새를 적절히 다듬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타인의 시선을 오랫동안 의식하며 살아오다 보면 어느새 나는 두꺼운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있다. 이 가면은 너무 두껍고 나와 밀착되어 있기에 본래 내 모습을 잊어버리기 쉽다.
단 한 번도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낸시는 리오 그랜드에게 고백한다. 이 부끄러운 사실을.
인간은 무엇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가? 바로 몸을 통해서이다. 심장 박동을 느끼고, 폐로 숨을 쉴 때의 호흡 감각을 느끼고, 음식의 맛을 느끼고, 주변의 소리를 듣고, 성대를 울려서 말을 하고, 좋아하는 사람의 피부를 만지고, 그 사람의 체온을 느껴야 비로소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알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은 이러한 육체의 즐거움을 생애 초기에 만끽한다. 놀이터에서 꼬슬꼬슬한 모래 덩어리를 만지면서, 엄마의 따뜻한 품에 안기면서, 새로운 음식이 혓바닥에 닿을 때의 신기한 맛을 느끼면서, 부모의 다정한 음성을 들으며 아이들은 세상을 탐험한다.
그런데 아동기를 지나 학령기에 다다르면, 나의 욕구보다는 체면을 생각해야 하는 어른이 되면, 더구나 정신노동을 해야 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면 몸을 통해 내가 '나'임을 자각할 수 있는 자유를 자주 만끽하기란 힘들다. 익스트림 스포츠, 춤추기, 악기 연주, 요리,... 몸으로 하는 여가를 즐기는 게 재미있는 이유는 바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낸시'와 같은 사람은 아주 많을 것이다. 사회에서 거친 평가를 받으며 생존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몸 조차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남보다 멋지게 태어나지 못했다고, SNS 속 지인이나 연예인들의 사진을 보며 자신과 비교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육체를 창피해하며 숨기기 쉽다.
그녀는 마지막 장면에서 거울 속 자신의 나체를 바라본다. 영화 초반에 그녀는 자신의 늙은 육체를 부끄러워하지만 이젠 거울에 비친, 수많은 세월이 담긴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낸시 역할을 맡은 엠마 톰슨이 적지 않은 나이에 헌신한 이 모습이 존경스럽다.
"낸시는 평생을 규칙대로 살아왔지만, 인생은 완벽과 거리가 멀고 공허함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사회 구조에 너무 길들여졌다.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무얼 하고 싶은가? 낸시는 자유롭게 섹스를 즐길 만해 보이지 않는 평범한 여자다. 깊으면서도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낸시와 리오 그랜드의 모습은 전에 본 적 없는 이야기다. 나는 몸에 대한 비판을 끊임없이 들어왔다. 충분히 예쁘지 않고 이상적인 몸을 갖고 있지 않다고. 이제 미디어를 통해 보여지는 여성의 몸은 달라져야 한다. 있는 그대로 나의 몸을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힘들었지만, 62세에 자연스러운 내 몸을 보여줬다는 것은 이 영화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 낸시 역 엠마 톰슨
(영화 전단지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