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을 마주할 만한 그녀의 용기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

by 녹색광선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이 영화의 원어 제목을 찾아보니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Verdens verste menneske, 2021)이다. 즉,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 정도 되겠다. 아무래도 현재의 한글 문장이 이 영화의 주제를 잘 표현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 ‘나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길래?



성취욕은
시시한 거야



율리에. 그녀는 의대생이다. 이 전공을 택한 이유는 단지 의대 입학이 어렵다고 들어서였다. 그래서 의대 입학을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높은 성적을 받고 성취욕을 해결하니 공부라는 게 허무해진다.


그래서 의대를 때려치웠다. 그 다음 율리에는 패션 사진작가 일을 충동적으로 해 본다. 겉보기에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택한 듯하다. 그녀는 그저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재미있다.


이 즈음 율리에는 자주 파티를 즐기며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는 데 매 순간 그녀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나고 그 미소는 사랑스럽기만 하다. 삶에 생기가 느껴지는 29살의 나이라니. 얼마든지 시행착오를 즐길 준비가 된 그녀는 갓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처럼도 보인다.


어느 날 그녀는 파티를 즐기던 도중, 어떤 남자에게 반한다. 그의 이름은 '악셀', 웹툰 만화작가이다.




사랑도 발효되면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걸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40세가 훌쩍 넘은 악셀에게 그녀는 그야말로 매력덩어리이다. 단지 얼굴과 몸매가 예뻐서가 아니라, 그녀는 젊은이의 패기로 엉뚱한 짓을 잘하는 괴짜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금세 반해서 동거를 시작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서로의 관계에는 균열이 생긴다. 그에게는 그녀가 자신과 아이를 낳고 고정된 직업을 가진 후 미래를 같이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자신이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뭐 언젠가는 아이를 갖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현실적인 나이의 무게에 짓눌려 자신의 잠재력을 시험해보지도 못한 채 미래를 위한답시고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게 싫을 뿐이다.


당신을 사랑해, 근데 사랑하지 않아.


어느 날 그녀는 그에게 이렇게 이별을 고한다. 이 모순된 마음을 어떻게 분석하며 설명할 수 있을까.


연인 간에 헤어질 순간이 왔음을 그녀는 그냥 이렇게 느낄 뿐이다. 그러나 이 감정은 즉흥적인 상태는 아니다. 서로 꿈꾸는 미래가 다르다는 걸 실감하면서 율리에는 악셀에 대해 점점 마음의 벽을 느꼈다. 이 즈음 두 사람은 일상적인 일로 짜증과 독설을 내뱉기도 한다. 하지만 서로의 생각과 기분을 정의하고 설명하며 화해를 시도한다는 게 이 즈음에는 구차해질 때가 있다. 어느 지점이 지나면 연인 사이에 서로를 돌보려는 에너지가 고갈되는 순간이 다가오고야 만다.


그녀는 분명 악셀이란 남자를 지금도 사랑하지만, 이젠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끝내 헤어지고픈 것이다.


사실 이 즈음 그녀는 새로운 남자를 만났다. 어떤 파티에서 마주친 남자의 이름은 에이빈드. 그녀가 임시로 일하는 어떤 서점에서 그를 또다시 마주친다. 이것은 운명일까? 에이빈드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완전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남자가 율리에의 영원한 반려자가 될지...?


사랑이 발효되면 썩은 곰팡이 같은 냄새가 날 수 있을 거다. 이 시점에 보통 연인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연인 간 최악의 모습을 보았을 때 차라리 헤어지는 게 나을 지에 대해 정답은 없다.

단지 율리에는 악셀과의 고정된 미래에 갇힌, '새장 속에 갇혀 있는 새'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인간이란

원래 모순덩어리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그녀는 어느 날 어머니 등 여러 가족을 만나러 간다. 이때 영화에서는 자신의 할머니, 그리고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 현조할머니, 그보다 더 이전의 할머니 사진들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어떤 분은 사랑 없이 결혼을 했고 30대 중반의 나이에 사망했다는 기록을 보여준다.


앞으로 그녀가 얼마나 살 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래는 미지의 시간이다. 아마 율리에는 과거의 할머니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을 살아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앞날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해서 쉽게 불안해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만의 나침반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달려 나간다. 현재 내가 숨 쉬는 순간에 자석처럼 끌리는, 그 미지의 방향을 향해.


'나'라는 인간은 원래 이런 엄청난 오류와 모순을 범하며 성장하는 게 아닐까? 우리 모두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사랑도, 일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서 최악을 경험할 때가 있다. 이런 내 모습은 엉망진창이다. 최악의 순간에는 어떤 말을 하든, 어떤 짓을 하든 끊임없이 자책만을 거듭하며 고통에 시달릴 뿐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저주를 내뿜으며 인간으로서의 바닥을 경험해본 자는 그 다음 밑바닥부터 달라질 수 있다.

율리에의 진짜 매력은 자신의 최악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이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달려간다



그녀는 적어도 스스로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을 받았을 때 자신에게도, 연인에게도 솔직하다. 그러기에 '의사'라는 안정된 직업과 유명세를 떨치는 연인과의 사랑을 포기할 수 있었던 거다.


이 영화의 백미는 에필로그이다. 그녀는 과거에 잠깐 해보다가 중단했던 사진작가로서의 일을 다시 시작한다. 이젠 그녀가 진정으로 그 일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고 여전히 그 미소는 사랑스럽다. 게다가 그녀의 두 번째 애인이었던 에이빈드는 원래 아이를 원하지 않았건만 율리에와 헤어진 후 어떤 여자를 만나서 아빠가 되었다. 과거에는 마주할 만한 준비가 안 되었던 경험을 모두가 지금 씩씩하게 헤내는 아이러니라니.


가끔씩 그녀는 지나간 날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자신의 앞에 놓인 시간들을 어떻게 감내할 수 있을까? 이제 그녀는 성장통을 끝냈으니 자신이 원하는 데로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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