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의 마지막 자기소개서 - 난 이방인입니다

썬다운(Sundown, 2021)

by 녹색광선

태어나서 가장 글쓰기가 싫었던 순간은 자기소개서를 쓸 때였다. 그 다음으론 좋은 점수를 따기 위해 입시용 논술을 쓸 때가 그랬다. 이때 내가 글쓰기를 한건 순수한 행동이 아니었다. 결국 어떤 이득을 취하기 위해 글을 쓴 게 아니겠는가. 좋은 대학에,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굳이 나를 설명하고 내 주장을 개진한다는 게 고역이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글을 쓸 때 약간의 허풍을 가미하는 건 거짓말은 아니라고 내 모습을 합리화하곤 했다. 이렇게 내 정체성을 상대가 원하는 로봇이나 부속품처럼 글로 재단하는 데에 점점 익숙해지며 난 사회에서 성인이 되었다.


여기 어떤 미지의 남자가 있다. 그는 두 조카의 삼촌이며, 한 여자의 친오빠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종의 사건을 겪는다. 서로 얽히고설키며 나머지 가족은 결국 이 남자가 도통 어떤 인간인지를 '모르게' 된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가족에게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 점이 이 영화의 위대한 매력이다.


아마도 위의 포스터만 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을 떠올릴 듯하다. 나 역시 그랬고 예상대로 이 영화는 이방인의 훌륭한 변주곡이다. 충격적인 82분이 지나면 이 남자의 마지막 자기소개서가 완성된다.


(이제 이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이 영화의 줄거리에는 몇 가지 중요한 변곡점이 있는데 모두 소설 이방인의 구조와 닮아 있다. 어머니의 사망, 이 남자에게 죄 아닌 죄를 묻는 상황, 그리고 남자의 죽음. 하지만 줄거리 전개에 있어서 이 영화만의 독특한 변주도 있다.


남자는 여동생 및 두 조카와 고급 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 그들은 호화롭게 자연을 즐기는 도중 갑자기 모친의 사망이라는 비보를 듣는다.


그런데 여동생은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비통해하지만 이 남자는 왠지 담담하다. 서둘러 이들은 공항에 다다르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떠나려 하는데 남자는 여권을 빠트리고 왔다면서 먼저 가족을 보낸다. 그리고 그의 진짜 휴가는 시작된다.



지금 태양이

내리쬔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가족들이 공항을 떠나자마자 그는 다시 택시를 타고 관광지로 돌아온다. 허름한 호텔에 자리를 잡자마자 그는 여유롭게 맥주를 마시고 한낮의 해변가에 앉아 있다. 며칠 지나 그는 어떤 젊은 여성과 친해진다. 여동생의 다급한 연락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오지만 그는 여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늘어놓을 뿐이다. 얼마 안 가서 급기야는 스마트폰을 꺼버린다. 사실 여권은 그의 가방 속에 있었다.


지금 태양이 그에게 내리쬔다. 작열하는 햇빛을 눈으로도, 귀로도 느낄 수 있다. 화면에는 쨍한 빛이 퍼지며 눈이 살짝 아픈데 어떤 진동음(ambience sound)이 두 귀에 꽂히며 먹먹해진다. 태양을 눈과 귀로 느끼면서 이 남자의 현재에 나도 같이 들어가 버렸다. 그의 몸을 따스히 감싸고 있는 햇빛의 온도도 느껴지는 듯하다. 눈앞의 바다는 바람을 일으켜 그의 윗옷을 시원하게 펄럭인다. 지금 그에게 아찔한 햇빛에 마취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결국 그는 모친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현실이라는

감옥을 떠나다


그는 여동생에게 장례를 가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거액의 유산 또한 포기하고 동생에게 양도한다. 장례를 마치고 다시 휴가지로 날라 온 동생은 그에게 온갖 비난을 퍼붓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다. 결국 일련의 재산 양도 서류에 서명을 마친 후 그들은 영원히 헤어진다. 그런데 이들의 돈을 노린 뜨내기 패거리에 의해 동생은 차에서 총을 맞고 즉사한다. 알고 보니 주인공의 집안은 언론의 소재가 될 만큼 워낙 유명한가 보다. 신문 뉴스에서는 이 사건의 배후자로 그를 지목하는데 이유인즉슨, 남자가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장례식은 엄정한 사회적 규범으로 가득 찬 의식이다. 보통 자식은 부모의 사망을 슬퍼해야만 한다. 가족의 실제 사연이 어떠하든 방문객의 겉핥기 시선은 잔인한 법이다. 그들의 통념으로 보기에 자식의 반응이 상식에서 벗어나면 그 가족은 구설수의 대상이 된다. 오죽하면 옛날 우리 조상들은 장례에서 곡소리를 하는 이들을 임시로 부리기도 했으니. 친족들이 이 모든 곡소리를 다 하기엔 힘이 들었기에 자식으로서 장례의 형식을 갖추기 위한 고용 행위였다.


그가 만약 슬프지 않은데 장례에 가서 슬퍼한다면 그건 거짓말이 될 것이다. 반대로 그가 만약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슬퍼하는 척하면 무난한 예의를 차리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건 자신을 속이는 행동이 아닌가.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낙인이 찍혔다. 이런 세간의 오해로 인해 그는 결국 여동생의 살해 용의자로 몰려 현지 감옥에 잠시 수감된다.


그는 외부의 시선으로 보았을 땐 천하에 없는 불효자 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 때 묻은 사회인으로서 그의 모습이 내게는 정상으로 보였다. 그가 왜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았는지 관찰자인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건 그 만의 사적인 진실이다.


영화의 말미에는 그가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게 된 사연이 나온다. 사실 이 남자는 불치의 종양을 판정받고 여생을 충만하게 보내는 중이었다.


그는 장례에 불참함으로써 사회가 부여한 자신의 정체성을 버린다.



가족에게

그는 이방인이었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그는 여동생과 두 조카에게 자신의 불치병을 숨겼다. 어쩌면 가족이 자신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를 원했기에 침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평소 여동생은 그에게 매사를 많이 의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엄마가 돌아가셔도 이리 절망하는데 오빠의 병까지 알게 된다면 어찌 허물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여동생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고 병의 치료 과정을 관장할지도 모른다. 여동생의 성향을 고려해 보았을 때 그녀가 만약 오빠의 병을 알게 되면 왠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 같다. 그가 자신의 여생을 병원 밖에서 보내는 게 소원이라 해도.


우리는 종종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에 대해 나의 의지보다는 주변의 기대를 따르곤 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닌,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게 오히려 정상으로 통하는 경우가 있다. 진정한 부조리란 여기에 있지 않은가. 거짓된 마음으로 장례의 형식과 예의를 차리는 게 적절한 행동이라는.


어쩌면 나중에 내 부모님이 돌아가실 땐 가급적 금요일에 영면하시길 바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의미 없는 손님을 치르느라 진이 빠지지 않고 휴일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가족장을 치르며 온전히 애도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 이상적인 바램을 공개한다면 이기적인 놈이라고 욕을 들어먹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며칠간 부모 상을 치른 후 곧바로 돈을 버는 생활에 복귀하는 게 진정 잔인한 현실이 아닐까.


그는 자신의 순수한 의지에 따라 온전히 매일을 살았다. 마지막으로 쓰러질 때까지.

연인의 돌봄을 받으며 그는 병원에 입원한다. 하지만 의식이 깨어나자 아무도 모르게 병실을 빠져나오는 그의 뒷모습.


다시 어떤 집, 어떤 의자가 보인다. 의자엔 그 남자의 남방이 걸려 있다.


그리고 바닷소리. 그 남자는 이제 바다가 되었다.



내가 바다인지,

바다가 나인지


이 영화의 결말을 보니 장자(莊子)호접몽(胡蝶夢)이 생각난다.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막상 깨어나 보니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 꿈을 꾼 것인지 모르겠더라는 짧은 이야기.


이 영화에는 여러 죽음이 나온다. 가만 생각해 보니 막강한 재력을 가진 여동생의 죽음이 가장 적나라하고 허무했다. 조금 전까지 그토록 바삐 알차게 살았던 그녀의 인생이 이렇게 순간 삭제되다니. 이런 개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남자와 여인이 태양 아래 해변에서 여유를 즐기는 도중, 바로 옆에서 낯선 이가 총격으로 피살되기도 한다. 하지만 몇 초 전까지도 온전히 삶을 살았던 어떤 이의 죽음에 대해 군중은 관심이 없다. 인간의 식량으로 포획된 물고기처럼, 어떤 도살된 돼지처럼, 영화에 나온 인간들도 그저 죽음으로 인해 생명이 다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세상을 퇴장하는 모습은 여운이 남는다. 그는 마치 꿈을 꾸듯 바다로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바다가 되는 꿈을 꾸며, 그 누구도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을 소개하며.


영화를 본 후 예상치 못하게 기분이 개운해졌다. 나이가 들면서 내 죽음이 어떠했으면 좋겠는지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죽음이 내게 다가오기 직전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그 누구에게도 움직임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있고만 싶다. 삶을 온전히 즐기고 싶다.







#알베르카뮈 #이방인 #장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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