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잘된 거야(Tout s'est bien passé, 2021)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 영화를 보고 갑자기 소설가 프랑스아즈 사강(Francoise Sagan)의 말이 생각난 이유는 왜일까? 그녀가 마약 복용 혐의로 재판을 받았을 때 했던 유명한 말이다. 이 발언은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행위가 어디까지 가능할 지에 대한 담론을 일으켰다.
노부모를 간병하거나 부양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마치 프랑스판 '인간극장'처럼 보일 듯하다. 안락사는 가벼운 소재가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망설임을 뒤로 하고 중년이 된 소피 마르소의 매력에 푹 빠지고픈 기대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사실 간단하다. 뇌졸증 치료를 받는 아버지가 안락사를 원하여 이를 결국 두 딸이 성사시키는 내용이다. 85세인 아버지는 육체의 능력이 이미 쇠락해서 자존심 강한 정신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다. 힘이 없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 깐깐한 요구를 해대는 모습이 늙은 꼰대이다. 하지만 아비의 요구는 절대로 거역하면 안 되는 관계로 성장한 큰 딸 임마뉘엘(소피 마르소 역)의 고민.
나 포기하지 마.
이렇게 살게 두지 마.
이건 내가 아냐.
그녀는 너무나도 안락사를 원하는 아버지의 고집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한 때 집중치료를 받을 만큼 위독했을 때는 그가 가엾어 보였지만 약간의 기력이라도 회복하자 곧바로 스스로 죽고 싶다고 외친다. 자식이 어릴 때부터 아버지란 존재가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해 온 역사를 생각해보면 임마뉘엘이 감당했을 만한 고통은 미처 헤아리기 어렵다. 그녀는 아버지의 거친 말을 들을 때마다 응어리진 감정을 꾹꾹 마음에 담아두듯 음식을 마구 씹어 위 속에 우겨넣곤 했던, 참을성 강한 여성으로 성장했다.
아버지의 고통은 육체의 쇠락이다. 반대로 그의 정신은 아직 온전하다. 육체와 정신 간의 간극이 벌어지며 노년의 비극이 시작된다. 최소한의 신체적 품위도 유지할 수 없다니 얼마나 절망적인가. 말 그대로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아 대소변도, 목욕도, 손으로 글씨 쓰기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데에서 느끼는 수치심. 그가 일생을 굳건하게 유지해왔던 자존감과 품격이 신체 기능이 다함으로서 한 순간에 무너진다면 이 고통도 가늠하기 어렵다.
어른들이 "늙으면 죽어야지, 벽에 똥칠하기 전에"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실 때 어린 시절 막연하게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왜 저리 죽는다는 말을 단호하고 쉽게 하시나. 하지만 이 가족은 모두가 각자의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아버지의 강건한 의지로 결국 안락사에 대해 합의했다.
'만족'이라는 단어가 아이러니하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안정된 이성적 사고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가능했다. 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만족해했다. 그는 두 딸과 이승에서 작별하는 순간 묵직하지 않은, 따뜻한 애정의 눈길을 교감할 수 있었다. 사실 영화를 보니 존엄사도 꽤 비용이 드는 것 같다. 품위 있고 고통이 없이 죽으려면 어느 정도 재력도 있어야 하는 건가. 씁쓸하다.
나와 내 가족이 만족한다 해도, 이 영화에서처럼 개인이 마음대로 자기 육체를 소실시키는 건 현대 사회에서 범죄 행위이다. 그렇다면 이 행동이 범죄임을 규정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안락사는 생명의 소중함을 경시하는 행위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안락사를 금지하는 실제적이고 냉정한 이유들을 따져볼 필요도 있다. 예를 들어 국가에서 구성원이 죽는다는 건 귀중한 노동력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요즘의 저출산 문제가 국가 위기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은가. 출산을 아무리 장려하더라도 '헬조선'에서 젊은이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다. 여기에 존엄사를 허용한다면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한 다양한 이유로 자살을 용인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년의 고통을 방치한다면 이 또한 잔인한 행위이다.
사회에서 개인에게 죽음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건 진정 타당한가? 그렇다면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이들에게 사회 차원에서는 어떻게 배려할 수 있을까.
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구성원의 죽음은 노동력의 상실을 의미하겠지만, 개인에겐 행복 추구권이 있다. 스스로 세상을 떠난 이 남자 노인은 재산이 많기에 좋은 병원에서 요양과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까지 해당하는 상당수는 노년에 다다르면 닭장 같은 요양 시설을 반강제적으로 이용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선택을 선뜻 원하는 개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느 날 일상에서 작은 피로감을 느낄 때 죽음이 내 곁에 좀 더 가까이 왔음을 알아차리곤 한다. 문득 예년에 비해 체력이 떨어졌음을, 운동을 해도 보완이 안됨을 느낄 때가 있다. 육체가 젊음으로부터 멀어졌음을 서늘하게 깨닫는 순간이다. "예전 같지 않아."라는 누군가의 말이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들리는 순간,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살고 마감해야 하는지 고민해본다. 이 남자는 파킨슨병에 걸린 아내가 조각가 일을 그만둔 모습에 대해 "그녀는 이미 죽었어"라고 말하지 않는가.
#안락사 #존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