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세계(Under the Open Sky, すばらしき世界, 2020)
어렴풋이 마음에 품었던 어린이 시절 궁금증. 이 영화를 보고 답답했던 초등학교 때 기억이 떠올랐다.
밤하늘에 둥둥 떠 있는 별을 보면서 창가에 걸터앉아 우주에 비해 한없이 모자란 내 나이를 셈해보며 어른의 경계선이 될 만한 순간을 떠올려보곤 했다. 20살이라는 기준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비로소 어른에 도달했다는, 되도록 정확한 증거를 알고 싶었다. 한 살 더 먹으면 그만큼 어른스러워져야지! 라는 부모의 잔소리가 심해질 즈음이었다.
미카미 마사오. 그는 겉으로 보면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중년 아저씨로 보인다. 하지만 속으로 그는 혼란스럽다. 자신이 이제 어른으로 불릴 만한지, 이 세상이 과연 한 번 살아볼 만한 멋진 곳인지를 아직은 모르는 듯하다.
이 영화는 일생 동안 사회와 불협 화음을 일으키며 살아온 한 남자의 일대기이다.
(이제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첫 화면부터 분위기가 희한하다. 교도소 영상 다음엔 난민촌 수준의 거주지가 나오기까지 감미로운 컨템포러리 재즈(contemporary jazz)가 흐른다. 현실은 시궁창인데 이런 멋진 음악이 왜 세상을 가리는 포장지가 되는 건가. 알고 보니 우리가 사는 모습도 이럴지도 모르겠다. 생활에 절망할수록 이를 잊을 만한 쾌락을 찾는 건 인간의 본능이니까.
그의 모습도 뭔가 나사가 빠진 기계 같다. 교도관에게 군인처럼 우렁찬 대답으로 존대하는 등 예절을 엄격히 지키는 현재와는 달리 그에겐 또 다른 과거의 자아가 있는 건가. 교도관과 공손히 대화를 나누다가도 불편한 주제로 옮겨가면 순식간에 날카로워진다. 누구와 순탄히 말을 주고받다가도 뭔가 수가 틀리면 욱 하고 주먹이 나와 버리는 시한폭탄처럼. 그에게 갈등이란 마치 불 붙일 준비가 된 불쏘시개를 마주하는 격이다.
미카미, 그의 인생은 왜 이리도 고단했을까.
출생 때부터 그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세상과 섞이지 못하고 겉돌았다. 사실 그의 엄마는 게이샤였고,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식인 그를 낳은 후 보육 시설에 맡겨버렸다. 하지만 단체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그는 스스로 뛰쳐나왔다.
누구라도 나를 칭찬해주고 받아주기만 하면 마음 누일 만하다 여겼던 어린 시절. 그는 야쿠자 조직에서 14세부터 채권, 도박 행위를 일 삼다가 소년원 신세를 진다. 이후 그는 다수의 범죄를 저지르며 험한 조직원 생활을 해 온 듯하다. 험한 나날을 보내던 중 그에게도 연인이 생겨서 결혼을 하게 되지만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어쩌다 찾아온 행운은 막을 내렸다.
사실 13년 전, 그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를 죽였다. 배우자를 지키려는 절박한 충동으로 일으킨 사고였기에 이 사건은 당연히 과실치사로 결론날 줄 알았다. 그런데 재판이 이상하게 꼬여서 그는 긴 시간을 살인죄로 복역해야만 했다. 그 후 사회로 복귀.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힌 그에게 세상은 잔인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건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왕 태어난 거 한 번 제대로 살아봐야지.’하고 마음먹어야 비로소 출생의 우울을 벗어던지고 삶의 이유를 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건 무엇일까?
'사람답게'라는 표현은 많은 모습을 의미한다. "쟤는 사람답게 살긴 글렀어."라는 속된 말을 떠올려 보았을 때의 이 문구는 단순한 생존 능력 이상을 뜻한다.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인간, ‘어른’이라는 호칭은 그만큼 의미가 무거운 단어다.
교도소 출소 후 그는 참 열심히도 살아보려 한다.
운전면허를 회복해서 운전 일을 해보려고도 하고, 교도소 수감 시절 익힌 손재주를 바탕으로 검도 관련 소도구를 만들어 보려고도 한다. 혼자 음식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병원 진료를 받으며 건강도 챙기려 한다. 그런데 이렇게 아등바등 애쓰는 모습은 남들에게 드러나지 않는다. 뭐 하나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을 때마다 폭발하듯 울화가 치미는 순간.
그가 이렇게 욱 하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투정이 떠오른다. 야단을 맞으면서도 어른들의 말에 수긍할 수 없고, 그래서 또다시 야단맞을 만한 행동을 하는 어린아이의 모습.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수많은 타인과의 부딪힘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나를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다듬어야 한다. 어느 누군가가 나의 행동거지가 이상한지, 괜찮은지, 내 모습이 남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지를 확인해 주는 과정. 즉, 내 곁의 타인이 나의 모습을 조망할 만한 거울의 역할(mirroring)을 해 주는 과정. 이를 딱딱한 단어로는 사회화(socialization)라고 요약할 수도 있겠다.
타인은 계속 내 모습을 비추며 내가 세상에서 세련된 매무새로 처신하도록 다듬어준다. 이런 타인 중 가장 중요한 대상은 나를 쑥 낳아준 바로 엄마, 혹은 주 양육자이다. 하지만 성장기에 그에겐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이런 거울이 없었다.
현실을 버티는 게 괴로울수록 신기루를 찾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는 잠시 비행기를 타고 옛 야쿠자 동료에게 날아가 이전의 생활로 복귀하고픈 유혹을 느낀다. 친구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을수록 바로 이전까지 식비를 아껴가며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던 독거남인 자신의 처지와 지금이 대비된다. 하지만 부의 유혹을 이겨내고 다시 허름한 주거지로 복귀.
우와, 뽕 맞은 거처럼 기쁘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취업을 해냈다. 기쁨에 취해 거리를 달려가는 이 모습은 영락없는 개구쟁이의 몸짓이다. 그의 내면에 있는 어린아이는 아직 세련된 어른으로 자라질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제 미래가 보이는 듯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중에서
미카미,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기에 그는 마침내 꽃으로 피어날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미지의 꿈을 다 피우지 못한 꽃봉오리로 끝날 운명이었던 걸까. 너무나 허무하게 끝난 그의 인생이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