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The Foggy Town, 1967)
그렇지 않고서야 소설 「무진기행(김승옥 씀)」 도, 이 영화도 이해하긴 어렵다.
얼마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헤어질 결심’ 기획전이 열렸다. 올해 개봉한 박찬욱 감독작 ‘헤어질 결심’을 볼 때 마음을 스치는 여러 영화들을 한 데 묶어 상영하는 자리다. 아마도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이라면 놓치기 아까운 소중한 기회였다. 그중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소설인 「무진기행」을 영화로 옮긴 이 작품은 마치 움직이는 수묵화가 눈앞에 나타난 듯 장면마다 풍경이 아름답다.
영화가 바탕으로 한 원작 소설은 무진이라는 가상의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 속 이곳은 안개로 유명하다. 왜 하필이면 안개일까. 어떤 땅에서, 어떤 기후를 접하며 사는지에 따라 사람이 사는 방식은 매우 달라진다. 무진은 안개가 그득한 마법 같은 공간이다. 이 신비로운 곳을 소설에서 얼마나 낭만적으로 그렸던가. 「무진기행」이 명작이 된 건 바로 자연이 사람 마음에 미치는 마법을 오감이 느껴지는 글로 경이롭게 풀어내어서이다. 그리고 영화 또한 말 그대로 ‘안개’가 다했다. ‘안개’라는 노래는 영화 곳곳에서 다양한 악기로 변주되며 분위기를 더한다.
이 영화는 흑백 영화다. 컬러 영화가 익숙한 눈이기에 흑백 화면이 답답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잠깐 했지만, 이런 상상은 쓸데없었다. 오히려 영화에서 안개가 자욱한 시골, 무진은 아득하고 신비로운 곳으로 새로이 태어난다. 소설 「무진기행」 속 풍경이 거의 상상 그대로이다. 시골버스가 정차하는 읍내에는 신문사, 음식점, 시골 술집이 자리하는 허름한 1-2층짜리 건물 몇 개가 전부이다. 이 시절엔 함바구(아마도 ‘햄버거’), 비후까스가 약 100-130원 정도 되었나 보다. 희뿌연 안개는 가난한 이 시골 마을을 거니는 학생과 아낙네, 아저씨들, 저 너머에 있는 산과 들을 모두 감싼다. 6.25 전쟁 이후 서울과 지방 시골 간의 격차가 컸던 그 시절, 윤기준(신성일 역)은 현재 사는 서울을 뒤로 하고 잠시 무진으로 향한다.
그는 소위 벼락 출세한 남자다. 옛날에 폐병에 걸린 채 무진에서 쓸쓸히 답답한 삶을 견디던 시절, 기준은 이 구질구질한 안개 낀 촌구석을 탈출하고만 싶었다. 운 좋게 서울에 상경한 후 그는 어찌어찌하여 제약회사를 갖고 있는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한다. 그가 이렇게 고향에 내려오자 모두 금의환향한 그를 부러워한다. 옛날에 함께 공부하던 학교 동창들과 오랜만에 술자리를 하던 중, 그는 같은 자리에 있던 음악 교사 하인숙(윤정희 역)에게 반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이런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보기 좋게 예의 바른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오히려 죽마고우인 동료 교사가 인숙에게 호감을 갖고 있음을 알고 친구를 격려해주기까지. 그뿐만이 아니다. 술자리가 끝난 후 기준과 인숙은 나란히 밤 산책을 즐긴다. 자신의 집까지 조금만 더 바래다 달라는 인숙의 청을 기준은 거절하지 않는다. 어느새 이들이 밤안개에 취한 걸까. 아무도 시골길을 거니는 이 남녀를 바라볼 수 없다. 자욱한 안개는 그들을 커튼처럼 가려준다. 안갯속 이들은 거리낌 없이 속내를 보이는데.
밤 12시 전에는 이 개구리 소리가 안 들렸어요.
인숙은 이렇게 말한다. 그녀에겐 지금 우상 같은 기준의 목소리 만이 들릴 뿐이다. 그리고 그에게 부탁한다. 제발 자신을 서울에 데려다 달라고. 이 답답한 무진을 떠나고 싶다고.
더빙으로 대사를 입히고 장면 속 소리들도 나중에 일부만 추가하는 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일까. 남녀가 말하는 소리, 개구리 소리 외엔 발걸음을 낼 때 나올 만한 작은 부스럭거림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 잡음 없는 고요한 시골 밤길이 묘하게도 구식 영화 기술이 가진 한계 덕에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인숙과 헤어진 기준은 읍내에서 밤길을 혼자 걷는다. 밤엔 온갖 짓을 해도 왠지 용감해지는 법. 누구라도 날 쉽게 알아보진 못할 거라고 안심하는 시간. 안개는 이 남녀에게 한숨 돌릴 만한 자유를 허락한다. 서울에 어떻게든 진출해보려는 그녀는 기준이 과거에 그랬던 모습과 똑같다. 그녀는 그의 자화상이었다.
반면 그들에게 낮은 오히려 갑갑한 시간이다. 태양이 쨍쨍하게 비치는 동안 열심히 일하고 주변 시선도 의식하며 체면을 차려야 하는 피곤한 때, 그게 낮이다.
하루의 피로를 털어내며 술집 작부와 남자가 농담을 섞는 풍경, 조명이 닿지 않는 골목 구석에서 뒤엉킨 남과 여. 기준은 밤안개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탈을 구경한다. 얼마나 안전한가. 거리낄 것이 없다. 자연이 인간에게 잠시 마법을 부린 걸까. 날씨는 사람이 사는 모습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나 보다.
‘안개’라는 노래는 다양하게 변주된다. 두 기타로 빚어내는 연주곡일 때 그 선율은 따뜻하게 들린다. 색소폰 독주로 장면에 더해질 땐 마치 억양이 과장된 변사 목소리처럼 매끈하고도 조금은 느끼하다. 두 주인공이 데이트하는 순간, 윤정희 배우가 부르는 ‘안개’(립싱크일 듯 하나 확실치 않음)는 인숙이 품은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뇌에 빠진 기준. 서울에 놔두고 온 안정된 지위, 부를 다 버리고 다시 아무것도 없던 초라한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역할에만 충실한 삶에서 이미 그는 현기증을 느끼지 않았는가. 결재 서류 위에 개미들이 싸돌아다니는 환각을 보며 어지러움을 느꼈던 기억은 이곳 무진에 내려오며 잠시 잊었던 걸까.
쾌락이 잠시 넘쳤던 밤은 끝났고 웬 술집 여자는 자살했는지 논두렁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저 언덕 너머에는 또 누가 죽었는지 장례 행렬이 지나가고. 사람 사는 게 별 게 없구나. 삶이 이리도 허무할 줄이야. 기준은 이제야 진짜 사랑을 알게 된 자신이 한심하다. 그러나 하찮은 인생이라 해도 더 고생하고 싶진 않아서일까. 기준은 이런 자신에게 환멸을 느낀다.
짧은 연애가 끝났다. 아내가 보낸 전보를 받자마자 기준은 중요한 회사 회의를 참석하려는 핑계로 무진을 떠난다. 촉촉한 안개를 벗어나 삭막한 도시로 복귀하는 순간. 기준은 인숙에 대한 사랑을 지켜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상경 전 구구절절 사랑을 고백한 편지를 쓰곤 바로 찢어버리다니. 사람이 자기 위치에서 얻어야 할 게 많으면 많을수록 모험을 할 만한 용기는 줄어드나 보다. 이렇게 허무하게 사랑이 끝나다니. 안개가 겉힌 곳에서 남은 건 아프고도 아련한 감정뿐. 그는 아마 건조한 도시 날씨처럼 감정도 메마른 채 살아가겠지. 이 모든 게 결국 안개처럼 사라질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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