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니오: 더 마에스트로(2023)
그는 음악가이자 건축가이자 혁신가였다. 또한 클래식 주류 음악계를 벗어났다는 자격지심에 시달렸던 이방인이기도 했다.
영화음악 업계에서 자리를 잡은 후에도 오랫동안 콤플렉스(complex)를 가졌던 사람,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 그래서 1960년대 시절 서부영화 음악에 참여한 후에도 아내에게 십여 년쯤하고 이 업계를 떠나겠다고 여러 번 말했던 사람. 하지만 2000년 이후 그는 아내에게 이런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음악은 바로 현대음악을 대표하며 소리의 혁신을 시도할 수 있는 장르임을 깨달았기에.
(아래부터 영화 내용이 있습니다만 사실상 그의 일대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시간을 분해하는 메트로놈 소리가 들리며 엔니오가 등장한다. 그는 방바닥 위에 누워 몸을 스트레칭한 후 작업을 시작한다. 그런데 악기를 만지는 게 아니라 마치 글을 쓰듯 책상에 앉아 오선지를 두고 머리에서 떠오르는 데로 음표를 그려나간다. 방 안에 악기는 없다. 오로지 책과 책상뿐이다. 음악가인지 수필가인지 이 장면만 보고선 알 길이 없다.
거장 뮤지션들과 영화감독들이 뒤이어 차례로 등장한다. 펫 메스니(guitar), 퀸시 존스, 쿠엔틴 타란티노, 왕가위, 존 윌리엄스,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세페 토르나토레,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이들이 경의를 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음악은
음(音)을 쌓는
건축과도 같아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마치 이공계 전공자와 같은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곡 작업은 세상 모든 소리를 저장한 머리를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는 평범한 음악도였다.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는 엔니오가 어릴 때 트럼펫 연습을 시키고 음악원에 입학시켰다. 생계유지를 위한 밥벌이를 일찍 준비시킨 셈이다. 하지만 천재들이 모인 곳에서 그는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이 세상이 내뿜는 다양한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다.
학교 졸업 후 그는 편곡자로 본격적인 일을 시작한다. 이 무렵 편곡이란 단순히 노래를 반주하는 방법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는 매체 음악을 편곡하며 색다른 시도를 한다. 밋밋한 노래로 들리지 않게끔 사람들을 붙잡아 놓는 신기한 소리들을 입힌 것이다. 캔, 타자기, 세제 등 일상용품들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하는 가수들도 있었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그는 편곡자로 서서히 유명해졌다.
이런 편곡 작업은 그저 재미있어서 한 일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당대 전위적인 현대음악 앙상블을 시도한다. 악기가 내는 본연의 소리를 벗어나 희한한 음들을 내도록 동료들을 독려했다. 이런 모험에 찬성하는 뮤지션들을 모아 현대음악 팀을 꾸리기도 했다. 그는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라면 악기든 물건이든 가리지 않고 모아서 두드리고 문질러보았던 탐험가였다.
그는 이렇게 편곡을 재정의했다. 이렇게 전위적인 현대음악을 실험한 건 훗날 그가 영화음악 테마를 만드는 기초가 되었다. 즉, 음악 작법에서 이질적인 재료들을 모아 뭉뚱그려 창조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하이브리드(hybrid) 작곡법을 시도한 것이다. 오늘날 K-POP에서 Clue와 Note라는 멜로디 주제를 합쳐 <샤이니-셜록(Sherlock)> 같은 혼합곡을 만들어낸 작법을 그도 젊은 시절 시도했었다. 그도 이런 실험을 할 만한 밑천이 있었다. 음악원 시절 바흐(Bach) 등 고전음악가들부터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명 시절부터 발휘했던 이 자유로운 실험정신이 그가 음악가로서 가진 DNA였다.
이런 작업은 그저 신기해서 한 일이었다. 그저 다양한 소리들을 섞으면 기존에 없었던 노래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당대에는 얼마든지 조롱받을 수 있고 순식간에 업계에서 퇴출당할 수 있었던 위험천만한 시도였다. 그는 이런 식으로 여러 주제의 멜로디를 떠올린 후 변주시키며 상반된 멜로디를 합치는 하이브리드 작곡법을 기초부터 다졌다.
하지만 콤플렉스는 아주 오랫동안 그의 마음속에 무겁게 자리 잡은 듯하다. 자격지심에 시달렸음을 고백하는 그의 표정엔 잠시 고통이 머물러 있었다. 이 모습을 보아도 믿기 어려웠다. 그가 콤플렉스로 힘들었다니.
심리학자 칼 융(Carl G. Jung)에 따르면 콤플렉스(complex)란 우리 마음을 건드리는 아픈 것이다. 내 약점, 아픔, 상처가 되는 뭔가가 콤플렉스이다. 우린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괴로워하며 현재보다 더 나아지려 한다. 그래서 콤플렉스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나를 아프게 하며 성장시키기도 하니 내 콤플렉스를 직면하고 수용하는 건 곧 내가 성숙하는 과정이다.
음악원 재학 시절 그는 다양한 고전 음악 형식에 따라 작곡을 연습했고, 대위법에 기반한 이론을 착실히 익혔다. 당시 만난 은사님은 그를 아꼈으나 영화 '천지창조' 작업 중 감독이 스승이 아닌 엔니오의 작업물을 선택하자 그는 괴로워한다. 스승이 했던 말은 그의 마음을 오랫동안 아프게 붙잡았다.
상업영화에 쓰는
음악을 만드는 건
학계에서 매춘 같은 짓이다.
그는 주류를 벗어나 완전히 혼자 있었다. 고립감과 열등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고독 속에서도 그는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편곡자에서 영화음악가로 진로를 바꾼다. 그리고 훗날 운명의 동반자가 될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을 만난다. 그 유명한 "빠라바라밤~". 서부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멜로디로 각인된 이 휘파람 비슷한 소리는 엔니오가 코요테의 울음소리를 떠올리며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엔니오 모리꼬네가 음악가로서 자기 인생을 설명한 자전적 인터뷰로 이루어져 있다. 약간 마음에 안 드는 점은 그가 노년에 드디어 아카데미에서 음악상을 거머쥔 순간을 서사한 방식이다. 마치 그가 이제야 거장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모습처럼 보일 우려가 있어 보여서 아쉽다. 그는 이미 이런 한풀이식 수상 소감을 할 필요가 없는 거장이 아닌가. 5번 노미네이트 되었지만 낙방하고 6번째 수상한 건 미국우선주의에 사로잡힌 아카데미 심사위원들 때문 아닐까.
물론 쟁쟁한 경쟁자들이 있었다. 천재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행콕(Herbie Hancock),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처럼. 하지만 엔니오 또한 살아있을 때 이미 마에스트로(maestro)였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옥같은 OST들은 일일이 열거해 봤자 입만 아프다. 음악의 'o'조차 모르더라도 이 영화를 보면 내가 일상에서 들어본 노래들이 줄줄이 흘러나온다. 이번에 내가 새로 알게 된 점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세르지오 레오네 감독)>를 찍을 때 이미 엔니오가 대본을 바탕으로 영화 음악을 완성한 후 촬영 현장에 곡을 틀어놓고 배우들이 연기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작품일수록 OTT로 보기보다는 사운드가 좋은 영화관에서 보았으면 싶다. 상영 중인 지금을 놓치지 말자. 상영 시간도 2시간 반 정도로 길기 때문에 음악 마니아들은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필관을 추천하고 싶다.
*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영화관심_Kino Psycho] 2023.07.11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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