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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Sep 25. 2023

게임 덕후가 최정상 카레이서가 된 실화, 비결은 몰입법

그란 투리스모(Gran Turismo, 2023)

방구석 겜돌이를
진짜 카레이싱 대회에
출전시킨다고?


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은 현실이 되었다.



운전석은 60도까지 올라간다.
중력 가속도는 우주선의 2 배지.
그런 압박 속에서도
옳은 결정을 해야 해!"


레이싱 드라이버는 인간 한계를 뛰어넘는 조건에서 정확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런 극한 체험은 상상조차 힘들다. 기대도 안 하고 그냥 봤는데 진짜 재밌다. 스크린이 큰 상영관에서 보면 더 좋다. 스타라곤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올랜도 블룸 정도고 나머지 배우들은 인지도가 고만고만해 보인다. 그런데도 평범한 사람이 자기 한계를 넘어선 성공 신화는 그 자체로 가슴을 울린다.


카레이싱은 그야말로 돈을 쳐 발라야 하는 귀족 스포츠다. 야만성으로 따지자면 현대판 '글래디에이터(Gladiator)' 경기다. 고대 로마처럼 동물이 살인 무기가 되는 게 아니라, 차(Car)로 바뀌었을 뿐이다. 레이싱 서킷에서 인명 사고가 생기는 건 다반사다. 드라이버가 죽어나가도 관중들의 뇌리엔 금세 잊힌다. 람보르니기니, 애스턴 마틴, 페라리... 수많은 명차들이 앞을 다투며 질주하는 걸 지켜보는 쾌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잔인함이 큰 스포츠일수록 관중이 느끼는 전율도 배가 된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 실전 경기에 영국 소년 '잔 마든보로' 기꺼이 운명을 걸었다.


맷 데이먼,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한 <포드 V 페라리(2019)>를 재미있게 보았다면 아마 이 영화도 즐길 만하다. 큰 스크린에 쫙 펼쳐지는 레이싱 서킷, 그 위를 질주하는 수많은 명차들을 보면 내가 저 차를 탄 것도 아닌데 저절로 손에 땀을 쥐게 된다.



(이제부터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만, 줄거리 자체가 실화입니다.)



내 차로

로켓처럼 달려보고 싶다..!


차를 애마(愛馬)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내 차로 속도계 바늘이 최고점을 찍을 때까지 한 번이라도 액셀을 밟아보는 게 꿈이다. 심장이 터질듯한 엔진 굉음이 내 몸속을 관통하며 전해오는 진동은 어떤 느낌일까?


 상상도 못할 쾌감을 간접 체험이라도 하고픈 이라면 기꺼이 돈을 내고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볼 만하다. 시뮬레이션 레이싱 게임 ‘그란 투리스모(Gran Turismo)’ 미쳐있던  소년이 세계적 카레이싱 대회인  24(The 24 Hours of Le Mans) 포디움에 오른 실화를 만든 동명 영화가 현재 상영 중이다.


닛산(NISSAN)에서 개발한 ‘그란 투리스모(Gran Turismo)’는 세상에서 가장 정교한 레이싱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소년 '잔'은 아르바이트비를 아끼고 아껴 카레이싱 게임용 핸들 휠을 새로 사면 “아름답다”라고 경탄할 만큼 차에, 그리고 이 게임에 미쳐 있었다.


게임 속에서 '잔'은 최고의 레이서였다. 차 내부 부품에 대해서도 빠삭했다. 마치 엑스레이 투시도처럼 자동차 내부를 훤히 꿰고 있었기에 뼈대부터 엔진까지, 하나하나 원하는 부품으로 짜 맞추는 것도 게임이 주는 묘미였다.




우리 게이머들을

카레이서로 키우자!



이 게임을 개발한 닛산은 또 하나의 비전을 꿈꾼다. 세계 정상급 게이머들에겐 실제 레이싱에 참여할 기회를 주는 프로젝트를 구상한 것이다. 만약 이들이 좋은 성적을 낸다면 그란 투리스모 게임은 실전 경험을 완벽히 재현한다는 극찬을 받으리라고 닛산(NISSAN)은 예상했다.


이젠
실제 레이싱 드라이버에
도전하세요!


이런 신박한 제안을 실제 카레이싱 게이머들이 받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것도 신나게 레이싱 기록을 경신한 후, 곧바로 게임 종료 화면에서 이런 초대장을 받는다면 말이다.


'잔'은 이걸 운명으로 여겼다. 수없이 반복했던 레이싱 서킷을 질주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목숨도 걸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카레이서 선발을 위한 GT 아카데미에 입성한다. 유럽 최정상급 게이머 19명과 함께.


하지만 실전 레이싱은 게임과는 달랐다. 카레이서 양성 대상자로 선발된 이들은 게임에서 최단 주행 시간(Lap Time)을 기록한 최상위급 게이머들이었다. 다만 이들은 말 그대로 게이머일 뿐, 실제 카레이싱을 할 만큼 경쟁력 있는 새싹 선수들이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그래서 원석을 가려내기 위해 닛산은 실력파 미케닉(mechanic)을 영입한다. 게이머들, 아니 이제 병아리 카레이서들이 실력을 키우도록 안전을 보장할 만한 전문가를 찾는 건 어려웠다. 유명 레이싱 팀에서 수석 엔지니어로 일하던 잭 숄터는 닛산이 이런 제안을 해올 때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GT 아카데미에 합류한다.


엔지니어 잭은 소위 겜돌이 20명 중에서 싹수가 보이는 진짜배기를 가려내려 했다. 실전 무대에 설 만한 자질을 가진 진짜 레이서가 누구일지를 알려면 강한 훈련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잭은 지원자들을 강하게 밀어붙인다. 체력 훈련은 기본이고, 서킷을 도는 기술을 전수하는 과정에서 하나둘씩 도태되지만 잔은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하지만 그는 언론 인터뷰 연습도 제대로 못 해낼 정도로 숫기가 없었고 주행 연습 중 그만 사고까지 낸다.



차 충돌 사고로 사실상 아카데미 탈락이 확실시되는 상황. 하지만 그는 오히려 엔지니어 잭의 눈에 들었다. 사고를 계기로 잔이 자동차에 대해 본능적인 청각을 가졌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브레이크가
유리화되었어요.


브레이크 결함이 의심되는 소리를 사고 직전 분명히 들었다는 걸 엔지니어인 잭에게 고백한 순간, 그리고 이게 진짜 사실임을 알게 된 순간 잭은 직감했다. ‘잔’은 새로운 원석이란 걸.


잭은 잔에게 어떻게 브레이크 결함을 알았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잔은 말했다.


그랑 투리스모에서
수없이 차를 세팅했으니까요.


결국 잔은 아카데미 입학생 중 일인자에 오른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 입문하는 건 이후로도 쉽지 않았다.




카레이서 몰입법,

그건 '심상법'


생애  레이싱 대회에 참가하던 순간, 잔은 경기장 대기실에서 볼륨을 키운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아일랜드 가수 엔야(Enya) 캐리비언 블루(Caribbean Blue) 아주 크게 들으면서 말이다.



사실 GT 아카데미 최종 1인 선발전 당일에도 그는 색소폰 연주자 Kenny G 노래를 듣고 있었다. 리듬감이 없이 공간을 울리는 몽환적인 소리들을 흡수하며 그는 머릿속을 비우는 듯 보였다. 마치 두뇌 속 조그만 잡념도 남기지 않고 완전한 진공 상태로 만드는 듯, 귀 속으로 흘러오는 노래를 들으며 무념무상에 빠지는 듯 보였다. 그리곤 그는 혼자 되뇌었다.

난 할 수 있다.
이건 단지 게임일 뿐이야.


이건 게이머 출신 잔에게 맞는 특별한 몰입법이었다. 중요한 순간에 실패에 대한 걱정은 티끌만큼도 내 정신에 침범하지 않도록, 마치 진공청소기로 내면의 먼지를 다 빨아들이듯, 혹은 매끈한 음악을 걸레 삼아 온갖 잡념을 쓱쓱 닦는 듯 보였다.


이 장면을 지켜보며 역도 선수였던 장미란이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 실제 트레이닝을 했다고 하던 ‘심상법(Visualization)’이 떠올랐다. 예전에 보았던 어떤 프로그램에서 장미란 선수는 올림픽을 대비하여 자신이 무거운 역기를 번쩍 드는 심상(imagery)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훈련을 진지하게 반복했었다. 무조건적인 긍정적 자기 암시, 운동선수가 오로지 승리만을 상상하며 경기 직전 정신을 무장하는 방법을 잔은 본능적으로 체득했는지도 모른다.




카레이서만이 느끼는

'절대 고독'



무한 속도로 질주할 때, 레이싱 중 드라이버는 어떤 정신상태에 있는 걸까? 일반인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그런데 엔지니어 잭과 드라이버 잔은 그걸 교감한다.


나 빼곤 모두가 느려지고,
세상에 나만 남는 기분이야.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고,
차가 마치 선로 위에 있는 것 같고,
절대 이탈하지 않을 것 같지.
공허함과 충만함이 동시에 느껴지고.
너도 그걸 느껴봤니?


 

시공간을 잠시나마  마음대로 주무르는 듯한 환각. 모두와 떨어진  오직 나만이 혼자만의 천국에 잠시 머무르는 느낌,  천국을 나만이 창조할  있다는 쾌감,  모두가 버무려진 무아지경(無我之境) 상태가 아닐까. 오로지 극한의 속도를 견디는 이에게만 허락되는 몰입감. 이건 오직 드라이버만이 누릴  있는 특권이다. 그게 이들이 달리는 이유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포디움에 오르다



잔은 두바이 레이싱 대회에서 4위로 입성하며 성공적으로 데뷔를 했다. 하지만 이런 건 깜짝 성취는 아니었다. 그전에 여러 레이싱 대회를 경험하며 27위부터 시작해서 차츰 순위를 높여나간 결과였다. 관객의 조롱, 다른 선수들이 '심레이서(시뮬레이션 게임 출신 레이서)'라고 비아냥거리는 놀림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같은 팀 엔지니어가 자신을 개무시하는 소리까지 강한 정신력으로 참아낸 결과였다. 젊은 레이서 잔에겐 꽃길만 있진 않았다. 그는 가시밭길을 밟았고, 아픔을 견뎠다.


뒤이어 나간 뉘르부르크링 레이싱 대회에서 그는 주목받는 루키 레이서였다. 그러나 차 속도를 지나치게 올리며 추월을 거듭하다 강한 맞바람을 맞으니 차는 종잇장처럼 뒤집혀 버렸다.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경기장 안에 착륙한 헬기로 실려나가 병원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정도로 큰 사고였다. 잔은 천만다행으로 부상 없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야외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관객 1명이 숨졌다. 잔은 자신이 살인병기를 조종했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레이싱을 그만두어야 할까..?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앞둔 순간, 같은 경험을 했던 선배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수석 엔지이너이자 과거 유명 레이서였던 잭은 잔에게 충고한다. 이 순간을 넘기면 다시는 레이서가 될 수 없음을, 그리고 사고 책임이 레이서에게 있던 게 아니었음을 상기시킨다.


결국 그는 꿈에 그리던 <르망 24> 레이싱에 출전한다. 사고 당시 악몽이 떠오를 만큼 시야가 순간적으로 흐려지는 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단순한 미케닉이 아닌 코치이자 정신적 멘토인 잭은 항상 잔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화 그대로다.




나를 뛰어넘은 자,
아름답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철학자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구절이 기억난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라는 , 자기 한계를 극복하려는 자의 치열한 투쟁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그린 문장이  있을까. 인간은 나를 넘어서지 못하면 짐승처럼 먹이를 축내며 생명을 이어갈 뿐이다.  한계를 뛰어넘은 , 초인(超人) 되고자  삶에서 얼마나 도전했던가.


이 평범한 소년은 자기 한계를 극복했다. 그는 이젠 샴페인을 터뜨릴 자격이 있다. 브라보.





*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영화관심(關心)_Kino Psycho] 2023.09.25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https://m.oheadline.com/articles/L13IqZR75UKdUqA6i8eE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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