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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Sep 10. 2023

수면 장애가 평범한 부부를 괴물로 만들다

잠(Sleep, 2023)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잠을 자는 동안 우리 몸은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안전하게 생존하려면 의식이 없을 때 함부로 움직이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잠시 벗어나 잠을 잘 때는 섣불리 운동하지 않도록 진화했다.


그런데 최근 비정상적인 수면 행동을 소재로 재미있게 만든 영화가 개봉했다. 어떤 유부남이 갑자기 수면 장애를 겪으며 단란했던 부부를 파멸로 이끈다. 명배우를 목표로 열심히 노력 중인 유부남 현수(이선균 역)가 NREM수면 각성장애를 겪으며 아내 수진(정유미 역) 또한 정신적으로 피폐해진다. 제대로 잠 못 자는 남자와 가족이 겪는 고통을 생생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몽유병,
부부를 공포에 몰아넣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남편 현수는 갑자기 자다가 일어나서 먹고, 말을 하고, 희한한 행동을 한다. 배우자가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린 아내 수진은 남편을 지켜보느라 오감을 곤두세우며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운다. 첫아기 출산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수진은 밤마다 공포에 질리지만 이 불안을 애써 잠재우려 한다.


현수가 보이는 언행들은 비급속안구운동수면 각성장애(Non-Rapid Eye Movement Sleep Arousal Disorders) 중 수면 보행장애(Sleepwalking Type-몽유병)에 해당하는 증상들이다. 이름이 너무 기니 보통은 'NREM수면 각성장애'라고 말한다.


가족 중 이런 장애가 있다고 상상해 보자. 현수는 자다가 갑자기 깨서 무표정한 얼굴로 냉장고 문을 열어 날고기를 먹거나 창문에서 뛰어내리려 한다. 당사자는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가 아니니 같이 사는 가족들은 현저한 고통을 느낀다.



미신에 기대어
공포를 통제하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출산 후 첫 아이 엄마가 된 수진은 점점 예민해진다. 괴물처럼 변한 남편을 감시하고 밤엔 방 안에 가두는 것도 모자라 수면장애 치료제를 과다 복용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남편 행동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다. 이 모든 기이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의학적 이론이 없으니 담당 의사도 사기꾼으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아이를 지키려면 수진은 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시도해야만 했다.


인간이 가진 힘으론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일까? 끝없는 절망 속에서 부부는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다. 수진은 친정 엄마가 소개해준 무속인까지 영입하는 지경에 이른다.


무엇보다 아기를 지키기 위해선 수진에겐 완전한 해결책이 필요했다. 이렇게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완벽히 설명할 수 있는 논리도 필요했다. 수진과 같이 통제 욕구가 솟구쳐 오를 때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낄 때면 우리는 미신처럼 마법 같은 대안에 솔깃해지기 쉽다.


무속인이 설명하는 논리는 이성적 잣대로 보면 궤변으로 들릴 만하다. 하지만 저 옛날 원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미약한 인간들을 위해 미신은 여전히 존재한다. 공포에 질린 수진에겐 자신이 데려온 남자 귀신이 남편에게 붙었다는 무속인 말이 명쾌한 진리로 들릴 수 밖엔 없다.


수진에게 미신은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극강의 치료제였다.




잠,
뇌가 쉬는 시간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현수 같은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수면-각성 주기가 무너진 경우다. 아내 수진처럼 긴장을 이완하지 못하고 장시간 오감을 각성시키면 감각 기관에서 뇌로 전달하는 정보들을 오해석하기도 쉽다. 그렇게 점점 통제할 수 없는 불안에 압도되어 수진은 자신만의 견고한 망상(delusion)을 쌓아가며 남편에 이어 또 다른 괴물이 된다.


우리가 제정신으로 살려면 잠을 꼭 자야 한다. 잠은 신체 피로 해소에도 좋지만 근본적으로는 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잠은 뇌가 휴식하는 시간이다.


잠은 깊이에 따라 4단계로 나뉜다. 뇌가 휴식하는 단계인 서파 수면까지 도달해야 진정한 의미로 '개운하게 잠을 잤다'라고 말할 수 있다. 서파 수면(徐波睡眠, SWS, slow wave sleep) 단계는 의미대로 뇌파가 느린 수면 상태이다. 이 단계에서는 뇌 활동성이 낮아지고 근육 긴장도도 떨어진다. 심박 수, 호흡 수, 혈압도 모두 낮아지는 등 신진대사가 저하된다. 한낮에 정신노동을 열심히 한 우리 뇌가 제일 푹 쉬는 단계다.


서파 수면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잠에서 깨면 양적으로 긴 시간을 잤다고 해도 제대로 잔 것 같지가 않다. 소위 얕은 잠만 자다가 깬 느낌이다. 이렇게 수면 질이 떨어지면 잠에서 깨어도 낮 시간에 피로감은 이어진다.


잠자는 동안 꿈도 편안히   있도록 우리 몸은 신비롭게 진화했다. 꿈을 꾸는 REM 수면 단계 동안 우리 몸은 '근육 무긴장증(REM Atonia)' 상태가 된다. , 몸에 힘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REM 수면 동안만 근육 활동이 정지되는 현상이다.


이렇게 해야 우리는 꿈속에서 안전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꿈 내용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꿈을 꾸는 도중 절벽을 뛰어내리는 행동과 비슷하게 곧바로 내 몸을 움직이면 큰일이 나지 않겠는가.



미신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아내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수진은 급기야 정신의학병원에 입원까지 하며 비합리적인 망상과 불안에 압도된다. 알고 보니 남편 현수가 잠을 자는 동안 수진은 이미 굿까지 치렀다. 그녀는 통제할 수 없는 공포를 과학과 이성의 논리로 억누르지 못했다. 결국 망상의 힘을 빌려야 했다. 미신에서 해답을 찾은 수진은 남편을 향해 자신 있게 그동안 추리한 궤변을 펼친다. 예전에 아파트 아래층에 살았던 할아버지가 지금 귀신이 되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는 거다.


망상에 휩싸인 그녀에게 이성적인 대화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마치 인격이 변해버린 듯한 수진을 말리기 위해 평소 갈고닦은 연기력을 바탕으로 남편 현수는 그녀의 망상 속 배역을 연기한다. 아니, 실제로 남편에게 그 할아버지 귀신이 씐 건지 아니면 남자 노인 연기를 한 건지 우린 끝까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애매한 결말이 마지막 한 방을 먹은 듯 인상적이다.





*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영화관심_Kino Psycho] 2023.09.10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https://m.oheadline.com/articles/tjhPEJYglwuSrUOWZCMr1w==?uid=743e351dfb3f41898a3018d22148c7f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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