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잡는 사람
기획자인데 AI가 기획을 대신 한다는 얘기, 어떻게 들리나요.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조금 불쾌했다.
아니, 정확히는 불안했다.
"그럼 나는 뭘 해야 하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니까.
근데 실제로 AI를 써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AI는 확실히 빠르다.
기획서 초안 뽑아달라고 하면 10분도 안 돼서 나온다.
경쟁사 분석해달라고 하면 구조 잡힌 표로 정리해준다.
PPT 목차도 잡아주고, 회의록 요약도 해주고, 보고서 문장도 다듬어준다.
그게 다 기획 업무 아닌가, 싶다.
근데 잠깐 생각해보자.
그 초안을 가지고 무슨 회의를 하고 싶은 건지, 이 기획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건지, 의사결정권자를 어떻게 설득할 건지 - 그건 AI가 스스로 정해주지 않는다.
AI가 만든 기획서는 '구조가 있는 문서'다.
기획서가 되려면 방향이 있어야 한다.
그 방향을 잡는 게 기획자의 일이다.
기획 업무를 크게 나눠보면 이렇게 된다.
① 정보를 정리하고 구조화하는 일 자료 수집, 경쟁사 분석, 현황 정리, 회의록 요약…
② 형식에 맞춰 문서를 만드는 일 기획서 작성, 보고서 초안, PPT 슬라이드 정리…
③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일 우선순위 결정, 이해관계자 설득, 방향 설정, 리스크 판단…
솔직히 말하면, ①과 ②는 AI가 잘한다.
지금도 잘하고 있고, 앞으로는 더 잘할 거다.
그럼 ③은? AI도 답을 내놓는다.
근데 그 답이 우리 조직 맥락을 아는 판단인지는 내가 검증해야 한다.
AI는 "이 중에 뭘 먼저 해야 해?"라는 질문에 그럴듯한 답을 준다.
근데 그게 조직의 상황, 의사결정자의 성향, 팀의 리소스,
지금의 우선순위를 실제로 반영한 판단인지는 내가 확인해야 한다.
그 판단을 잘못하면 멀쩡한 기획서가 방향 없는 문서가 된다.
처음에 AI 쓸 때는 뭔가 대단한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좋은 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해보니까 반대였다.
AI에게 잘 물어보려면 내가 먼저 잘 정리돼 있어야 한다.
문제가 뭔지, 어떤 맥락인지, 어떤 결과물을 원하는지를 내가 먼저 알아야 AI가 제대로 달린다.
예를 들어 이런 프롬프트를 써봤다고 치자.
"기획서 써줘."
이게 나오는 기획서는 그냥 기획서처럼 생긴 문서다.
틀은 있는데, 우리 팀 상황도 없고, 고객 문제도 없고, 왜 지금 이걸 해야 하는지도 없다.
반면 이렇게 바꾸면 달라진다.
"우리 서비스의 핵심 고객은 물류 스타트업 운영팀이고, 이번 분기 목표는 API 이용률 30% 향상이야. 이 목표를 위한 기획서 구조를 잡아줘. 의사결정권자는 기술보다 비용과 성과에 민감해."
이걸 쓸 수 있으려면 내가 먼저 알아야 한다.
고객이 누구인지, 목표가 뭔지, 의사결정권자가 어떤 사람인지.
AI를 쓸수록 기획자에게 필요한 능력이 더 선명해진다는 게 이 얘기다.
'잘 만드는 능력'보다 '잘 정의하는 능력'.
조금 다른 각도로 생각해보자.
예전에는 기획자가 리서치도 하고, 자료도 만들고, 문서도 쓰고, 발표도 준비했다.
시간의 절반 이상이 '만들기'에 들어갔다.
AI 덕분에 만들기의 비용이 확 줄었다.
그 시간이 어디로 가냐고? 생각하는 데 쓰면 된다.
기획의 본질은 만들기가 아니라 생각하기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풀 건지, 누구를 설득해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우리의 책임인지.
이 생각하기에 쓸 시간이 생긴 게 AI 시대다.
근데 현실에서는 많은 사람이 AI 덕에 생긴 시간을 '더 많은 문서 만들기'에 쓴다.
같은 시간에 기획서를 두 배로 뽑을 수 있으니까.
다섯 개짜리 슬라이드 덱을 열 개로 늘리는 식으로.
거기서 갈린다고 나는 생각한다.
AI를 '빠르게 만드는 도구'로 쓰는 사람과, AI를 '더 잘 생각하기 위한 파트너'로 쓰는 사람.
요즘 내가 AI를 쓰는 방식은 이렇다.
문서를 만들기 전에 먼저 AI한테 묻는다.
"이 기획이 해결하려는 핵심 문제가 뭔지 내가 이렇게 정의했는데, 빠진 게 있거나 더 날카롭게 만들 수 있는 게 있어?"
내가 가진 생각의 허점을 먼저 찾는 거다.
그리고 AI가 반박하거나 보완 질문을 던지면, 거기에 대답하면서 내 생각이 더 단단해진다.
문서는 그 다음에 만든다.
이미 머릿속에 기획이 잡혀 있으니까 AI가 초안을 뽑아도 크게 고칠 게 없다.
이 순서가 중요하다.
AI로 초안 만들고 → 그걸 붙들고 씨름하는 게 아니라,
내 기획을 먼저 정리하고 → AI로 형식을 완성하는 방식.
전자는 AI의 구조에 내 생각을 끼워 맞추는 것이고, 후자는 내 생각을 AI로 표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고 싶다.
기획자의 본질은 '문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판단을 내리고 방향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 판단에는 맥락이 필요하다. 조직의 상황, 고객의 말, 시장의 흐름, 이해관계자의 생각.
그걸 종합해서 "우리는 이 방향으로 간다"고 말하는 것.
AI는 그 판단을 대신하지 않는다.
판단에 필요한 재료를 더 빠르게 가져다줄 뿐이다.
그 재료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떻게 설득할지는 기획자의 몫으로 남아있다.
오히려 AI 시대에 기획자는 더 기획자다워야 한다.
다음 기획서를 쓰기 전에, AI한테 먼저 물어봐라. "내가 이 문제를 이렇게 정의했는데, 허점이 있어?" 라고.
기획서를 만들기 전에 생각부터 다듬는 연습.
그게 AI 시대 기획자의 첫 번째 습관이다.
다음 화에서는 AI에게 어떠한 역할을 줘야 결과가 달라질까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다음화 예고 : AI에게 역할(페르소나)를 부여하면 어떤식으로 바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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