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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ading Lady Aug 03. 2023

주부의 탄생

어쩐지 매일 요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30년 평생을 부모님과 살다가 결혼한 나는, 결혼 전에 요리라는 것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외동딸인 나에게 우리 엄마는 요리나 설겆이를 거의 시키지 않았었고, 정말이지 김치찌개 한 번을 안 끓여보고 살았다. 그래도 결혼하고 나니 신랑과 함께 일주일에 한번 쯤은 장도 보고 식사를 만들어 먹었고, 그제서야 비로소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부추 삼겹살 볶음 같은 난이도 낮은(어떻게 해도 대충 맛있게 되는) 요리도 해 보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다양한 식재료를 접하게 된 것은 첫 아이의 이유식을 준비하면서부터다. 아는 게 하나도 없었던 나는 세간에 떠도는 이유식 블로그에서 식단표와 레시피를 다운받아 그대로 했다. 처음엔 3일에 한 번 만들면 되던 이유식 사이클은 아이가 점점 많이 먹게 되면서 곧 이틀에 한 번, 하루에 한 번으로 빨라졌고, 급기야 유아식에 들어가면서 하루 세 끼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모든 것이 서툰 새댁이었던 나에게 하루 세 끼는 정말이지 투 머치였다. '삼식이 세끼'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 실감했다. 하루 종일 밥만 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허덕이면서 고작 돌쟁이 아이 1명이 먹을 이유식을 만든 후 남는 식재료를 제대로 소진할 능력이 나에겐 없었고, 못 쓰고 버리는 재료들로 냉장고는 터져나갔다. ([냉장고를 부탁해]글 참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기, 아이는 먹을 수 있는 것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어서 매일같이 새로운 맛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고, 나는 내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으면서 왜 이걸 하고 있나.. 대체 왜 이유식을 사먹이지 않았는지 땅을 치고 후회했다. 다시 돌아가게 되면 무.조.건. 사먹이리라!!! 다짐을 하고 또 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사먹일까?

라는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다. 그런데 ‘이유식’이라는 상품은 재료는 정말 조금 들어갈지언정 그 재료의 위생과 안전성(원산지, 무농약, 유기농 여부 등등)을 필요로 하고, 만드는 이의 시간과 정성까지 구매하는 개념인 데다, 판매처가 많지 않아 초과수요인 재화이다. 그래서 내가 만들면 한 끼에 500원정도면 만들 수 있는 것을 시중에서는 약 10배로 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처음부터 사먹이는 상태였으면 나는 그것이 한 끼에 얼마든 기꺼이 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어영부영 이유식의 세계에 들어와 집에 이유식 조리도구들과 기본 재료들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이제 와서 사먹이자니 각종 구매한 조리도구들이 아깝고 지금까지의 노력 또한 아깝게 느껴졌다. 이 쪼끄만 아이에게 200ml 먹이는 데 5천원을 낸다는 것이 길에 버리는 돈 같이 느껴지지 뭔가. 한편으론 휴직해서 수입도 없는데, 노동력이라도 써야 조금이나마 내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유식 한번 하면 힘들어서 맥주 따고 그랬더랬다.
아이 10~15개월 너무 힘들게 꾸역꾸역 했던 유아식들

그런 생각으로 첫 아이의 이유식 이후 유아식까지 내 손으로 계속했고, 이후 27개월 터울로 둘째가 태어나서 이유식 시기에 접어들면서는 '둘째는 무조건 사먹이겠다'는 이전의 다짐을 상기시키려 노력했지만 결국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앞서 언급한 유사한 이유로 결국 사먹이지 못했다. (둘째 해먹일 때의 생각: '에잇 어차피 첫째 밥 해줘야 하는데 그 재료 쪼끔 떼어서 그냥 하고 말지...') 그렇게 둘째도 이유식부터 유아식까지 모두 직접 해먹였다는 슬픈 이야기.



Life Goes On.

그렇게 시간이 차곡 차곡 쌓여 갔다. 아이들이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면서 최소한 점심 한 끼는 기관의 균형잡힌 식단으로 먹일 수 있음에 안도했다. 회사에 복직한 이후 하원 이모님이 계셨어도 저녁은 매일 직접 했고, 허둥대고 늦을 때도 많았지만 그런 날들도 결국 아이들은 내가 만든 밥을 먹었다. 애가 둘이 되니 이상하게 하나일 때 보다 잘 해먹고 살았다. 먹을 사람이 늘어나니 책임감이 늘어나기도 했고, 한 번 요리를 하면 3~4명이 먹으니 효율이 좋기도 했고, 그 동안 나도 좀 노하우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계속 밥을 했던 건 (아직도 정체를 알기 힘들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희생하게 되는 마음, 모성애 때문 아니었을까. 겨우 다섯 살, 두 살인 나의 아이들을 인스턴트와 배달음식으로 살찌울 수 없다는 생각에 근본 없는 요리실력으로도 이것저것 하게 되는 것이었다. 감사하게도 우리 아이들은 내가 해준 음식을 잘 먹었다. 엄마가 만들어 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고 몇 번이나 말해주는 첫째, 아직 말은 못해도 먹는 양으로 맛있음을 표현하는 둘째를 보는 것은 큰 뿌듯함이자 보람이었다.


그러던 중, 매일 이렇게 음식을 하는 게 나로서는 굉장히 의지와 노력이 많이 필요한 일임에도 이것이 그저 주부의 흔한 일상으로 평가되는 것이 왠지 아쉬워졌다. 그래서 어느 날 학원을 등록했고 곧 양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조리사 자격증의 여부는 요리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는 전혀 아니었지만, 그 이후 아이들 먹일 밥을 할 때에도 괜히 자신감이 붙었다. 조리사 자격증은 내가 하는 이 매일의 굴레가 단지 아이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명분을 추가해 주었다. 매일의 과업이 조금은 덜 힘들게 느껴졌던 것 같다.

양식조리사 시험의 꽃 ‘오믈렛’ 연습한 흔적들


요리하는 이유

아이들이 7살, 4살이 된 요즘도 퇴근하고 요리를 한다. 아이들을 하원시켜 와서 급히 밥을 올리고 식재료를 해동하고 칼질을 하는 것이 일상이다. 물론 어떤 날은 냉동해 놓은 리조또 데워 줄 때도 있고, 마트에서 사온 즉석식품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에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물어보면 엄마의 파스타, 엄마의 카레, 엄마의 계란말이. 아아, 사실 이제는 그만할 수 있는 방법을 아예 모르겠다.


나중에 이 아이들이 커서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이다가 문득 엄마밥이 먹고 싶어 찾아올 생각을 하니 눈가가 시큰거린다. 네가 아무리 커다래져도 익숙한 맛의 밥 한그릇 앞에서는 나의 작은 소녀이기를.

너에게도 평생 그게 위안이기를.


울 아이들의 최애 ’엄마 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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