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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세상을 모방하는 법

아이의 사과에서 드러나는 미메시스의 세 얼굴

by Leading Lady

사과가 없는 나라에서 사람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까요?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먹는 과일이고, 음식 종류를 배울 때에도 가장 먼저 언급되며, 심지어 A로 시작하는 탓에 책의 가장 앞 장에서 배우는 단어이기도 한 '사과'. 자연스럽게 사과는 기본적인 사물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아이들이 가장 먼저 그림으로 그리는 대상이 됩니다. 사과의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형태는 아이의 예술적, 인지적 발달 과정을 관찰하기에 꽤나 일관된 기준을 제공하지요. 아래는 제 아이가 29개월의 아이가 그린 사과입니다. 이전까지는 무작위적인 선이나 도형이 주를 이루었다면, 어느 날 아이는 자신의 움직임과 평면 위에 나타나는 흔적 사이의 연관성을 인지하며 통제된 낙서를 시작했습니다. 이 사과는 마그네틱 패드의 틀에 있는 사과를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난생 처음으로 스스로 남들도 알아볼 수 있는 형체를 그려낸 소중한 흔적입니다.


생후 29개월의 사과. 패드 주변의 사과를 보고 그렸을 것으로 추정.


아이의 그림이 연령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 기본적으로 모방에 기반하여 인지를 발달시켜 왔고, 모방을 통해 현실을 재현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자 학습적 즐거움의 원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양 철학에서는 이러한 모방을 '미메시스(mimesis)'라 부르며, 이는 예술과 현실의 관계를 논하는 데 있어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진리의 그림자, 플라톤의 미메시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에게 미메시스는 본질적으로 ‘모방’을 의미합니다. 그는 우리가 사는 이 감각 세계가 영원불변한 진리인 ‘이데아(Idea)’의 불완전한 모방이며, 예술은 그런 감각 세계를 다시 한번 모방하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따라서 예술은 진리인 이데아로부터 두 단계나 떨어져 있으며, 현실을 왜곡하고 감정을 자극하여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다고 경계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플라톤은 그의 이상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아이의 초기 그림은 이러한 플라톤적 미메시스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36개월 무렵의 아이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안에 눈과 입을 그려 ‘사람’이라는 개념을 표현합니다. 사과를 그릴 때도 특정 사과를 관찰하기보다는 ‘사과는 둥글고 빨갛다’는 자신만의 표상 체계(스키마; schema)를 통해 재현합니다. 이는 사물의 전형적인 상태를 인지하는 ‘대상 항상성’의 발현이자, 감각 세계의 사물을 모방하려 하지만 아직 불완전한, 초기 형태의 미메시스라 할 수 있습니다.


39개월의 사과. 이 시기 사과를 참 많이 그렸다. 우측은 사과 상자까지 그린 모습.


가능성의 재창조,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반면,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를 창조적인 행위로 보았습니다. 그에게 미메시스는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뿐만 아니라 ‘있을 법한’ 또는 ‘있어야 하는’ 모습으로 보여줄 수 있는 창조적인 재현이었습니다. 즉, 예술은 현실의 본질을 더 깊이 탐구하고 드러내는 능동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아이의 그림 역시 점차 단순 모방을 넘어 아리스토텔레스적 미메시스로 발전합니다. 41개월 무렵에는 사과를 그릴 때 빨강 외에 여러 색을 사용해 독창성을 드러내고, 48개월 전후가 되면 꼭지뿐 아니라 잎사귀를 그리거나 음영과 하이라이트를 표현하려 시도합니다. 이는 더 이상 ‘사과’의 전형적 개념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눈앞의 구체적인 시각적 경험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있을 법한’ 모습으로 창조해내는 단계로 나아갔음을 보여줍니다.


이 때의 미메시스는 결코 수동적인 복사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대상을 표현할 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특징을 선택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을 단순화하며, 때로는 특정 부분을 과장합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창조적 재현의 본질이며, 아이가 세상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6살의 아이는 엄마를 그릴 때 꼭 하이힐을 신은 모습으로 그리곤 했습니다. 이것은 일상의 모방이 아니라 성장에 대한 열망이 투영된 아이의 시선을 보여줍니다.



41개월, 51개월의 사과



욕망의 거울, 르네 지라르의 미메시스

현대에 이르러 미메시스는 예술 창작을 넘어 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욕망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확장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사상가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인간의 욕망이 대상 자체의 가치보다는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를 ‘모방 욕망(mimetic desire)’이라 불렀으며, 이러한 욕망의 모방이 필연적으로 경쟁과 갈등을 낳는다고 분석했습니다.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이러한 지라르적 미메시스는 쉽게 관찰됩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던 아이가 다른 친구가 그 장난감을 재미있게 가지고 놀면, 갑자기 그 장난감을 간절히 원하며 떼를 쓰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사과를 먹고 싶어 하지 않다가도, 누군가 맛있게 사과를 먹으면 그 욕망을 모방하여 자신도 사과를 달라고 조르기도 합니다. 이는 아이의 욕망이 대상(장난감, 사과)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틀로서.

아이가 그린 사과 그림들을 시간순으로 늘어놓고 보면 참 신기합니다. 똑같은 빨간 동그라미에서 시작했던 그림이 어느새 초록 잎사귀가 달리고, 그림자가 생기고, "엄마, 이건 할머니가 좋아하는 사과야"라며 이야기까지 담게 됩니다. 이전에 사용한 스케치북을 보며 "이때는 정말 못 그렸네"라고 웃는 아이를 보면, 역설적으로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습니다. 아이가 자신의 옛 그림을 보며 성장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그림 실력이 늘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입니다. 이는 세상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며 표현하는 미메시스가 어떻게 발달해왔는지를 스스로 인식하는 순간이기 때문이지요. 아이의 손끝에서 나날이 성장하는 이 위대한 미메시스의 여정을, 오늘도 응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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