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 처음 먹어보는 입 사요.
어느 날 아이가 환한 얼굴로 종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며칠 전 백화점에 동생의 생일 케이크를 함께 사러 갔던 날의 기억을 담뿍 담아낸 그림이었죠. 서툰 솜씨지만 한눈에 봐도 즐거움이 넘실거리는 그림이었습니다. 알록달록한 케이크는 실제보다 훨씬 크고 화려했고, 케이크 상자를 보는 엄마와 아이의 입은 귀에 걸릴 듯 활짝 웃고 있고 아이는 만세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그날 아이가 느꼈을 설렘과 기쁨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듯했습니다. 이토록 순수한 감정의 발현 앞에서, 저는 문득 20세기 초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던 표현주의(Expressionism) 미술 사조를 떠올렸습니다.
표현주의는 눈에 보이는 대상의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재현보다는 예술가의 주관적인 감정과 내면세계를 강렬하게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둡니다. 표현주의 예술가들은 종종 강렬한 색채, 왜곡된 형태, 거친 붓질을 통해 감정을 시각화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대상의 외형적 유사성이 아니라, 대상을 통해 촉발된 예술가의 느낌이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예술작품이 작가의 정서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이러한 인식은 19세기 사진의 등장 이후 예술이 현실의 모방을 넘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된 개념입니다. 특히 철학자 빌헬름 보링거(Wilhelem Worringer, 1881-1965)는 그의 저서 『추상과 감정 이입』에서 예술 창작의 근원적인 충동으로 '감정 이입 충동'과 '추상 충동'을 이야기했습니다. 표현주의는 이러한 내적 충동, 특히 예술가의 주관적 감정을 외부 세계로 투사하려는 강렬한 욕구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의 케이크 그림 역시 이러한 내적 감정이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림 속 케이크는 실제보다 더 과장되게 크고, 인물의 비례는 어색합니다. 이것은 객관적 기록은 아니지만, 아이가 느낀 케이크의 엄청난 존재감과 그 순간의 벅찬 기쁨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표현적 선택입니다. 이 그림에서 표현되는 감정의 직접성은 표현주의가 추구했던 예술의 본질과 맞닿아 있습니다. 바실리 칸딘스키는 그의 저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예술은 예술가의 내적 필연성에서 비롯된다"고 말했습니다. 아이에게 그날의 즐거움을 그리는 행위는 어쩌면 가장 순수한 '내적 필연성'의 발현이 아니었을까요? 어떤 가르침이나 의도 없이, 그저 터져 나오는 감정을 솔직하게 화면에 옮겨 놓았습니다. 전통적인 미의 기준이나 사실적 묘사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것. 마치 에드바르 뭉크가 <절규>에서 내면의 불안을 극적으로 표현했듯, 아이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대화하여 보여준 것이죠.
무엇이든 쉽게 구할 수 있는 풍요의 시대이지만, 아이에게 케이크는 일상적으로 매일 맛볼 수 없는 욕망의 음식입니다. 그날 아이는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토핑이 가득한 케이크 진열장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몇 번이고 오가며 신중하게 케이크를 골랐습니다. 고작 케이크 한 조각에 이렇게 큰 감흥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은 아이들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듭니다. 때로는 그 순수함이 어른들에게 부러움마저 느끼게 하죠. 우리는 너무 멋진 무언가를 경험했을 때 "이것을 한 번도 안본 눈 사요.", "처음 맛보는 입 삽니다." 라고 그 첫 경험을 갈망하곤 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창작의 원천으로 이어질 만큼 강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행복 케이크' 그림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되찾고 싶어하는 '처음 맛보는 입'을 가진 자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순수한 감각으로 그려낸 진실일 것입니다. 그 순수한 기쁨을 고스란히 전달해 준 네 살의 아이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참고문헌]
빌헬름 보링거(Wilhelem Worringer),『추상과 감정 이입』, 1908
바실리 칸딘스키(Kandinsky),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권영필 역, 열화당, 2000(원저 1910년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