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에 알게 되는 것들
결혼 후. 완전히 달라진 생활.
매서운 겨울바람에 서서히 힘이 빠지고 나뭇가지에 연두빛이 듬성듬성 보이는 계절이었다. 나는 그 초봄의 훈연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임신 초기의 피로감과 입덧으로 갖은 고생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껏 집에 와서 바로 세안하지 않는 경우가 단 한번도 없었는데, 지금은 외투만 벗고 바로 소파에 쓰러져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가 한두 시간 후 깨어나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회사 일은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야 했다. 저녁이 되면 입덧이 시작되어, 일이 남아도 도저히 야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똑같은 내 인생을, 그것도 두 사람분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고, 그것도 기꺼이 즐겁게 살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 생활에 즐거움을 찾기란 좀 힘들었다. 평소 좋아하던 음식들은 하나도 맛이 없었고 음식을 먹기 전 항상 그것의 영양과 입덧에의 영향을 생각해야 했다. 냄새에 예민해진 내가 집에서 요리한 지가 오래되어 식재료들은 수명을 다해 썩어 나갔고, 나는 코를 막고 그것들을 비닐봉지에 버렸다. 봄이 되면 찾던 예쁜 자켓과 원피스들은 아예 생각도 못한 채 겨울 코트와 목도리를 그대로 하고 다녔다. 원래도 추위를 잘 타는 나는 봄볕에도 계속 춥기만 했다. 잠시의 외부활동으로도 숨이 차고 힘들어져서 주말에도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그냥 집안일이나 조금 하고 휴식을 취했다. 누군가 나에게 '왜 그렇게 살고 있어? 임신이라고 너무 가만히 있는 것도 안 좋아. 좀 움직이고 친구들도 만나고 그래.'라고 말한다면 당장이라도 싸울지도 몰랐다. 그것은 내 의지 밖의 일이었다. 나라고 가만히 있고 싶은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거.
그래도, 그래도 행복은 일상 속에.
한 시간 한 시간 견디기가 힘에 겨웠던 그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래도 생활 곳곳 행복의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일상이지만 오감으로 각인되는 그런 장면들. 비가 많이 쏟아지던 날, 남편이 늦은 밤까지 야근을 하고 바지가 축축해진 채로 들어오면서 안겨준 흰 장미꽃다발이 기억난다. 뭔가 자랑스러운 듯 날 바라보던 해맑은 표정, 남편이 꽃을 선물하곤 으례 하는 말이지만, "네 옆에 있으니 꽃이 하나도 안 예쁘잖아."라는 그 멘트까지도, 그날은 왜 그렇게 가슴 아리도록 행복했을까. 아직 밤에는 쌀쌀했던 어느 봄밤, 우리는 퇴근 후 재활용 쓰레기를 차곡차곡 분리수거함에 내놓았다. 그리고 지금 편의점 앞에 벚꽃이 만발했다는 남편의 말에 동네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파란 간이의자에 앉아 컵라면 하나를 호호 불어 나눠먹으며 만개한 벚꽃을 올려다보았던 그날, 결혼식 날보다도 명절에 큰집에 함께 가던 날보다도 우리가 더 부부같았다. 외출이 힘든 나를 위해 동네 꽃놀이를 기획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정말 고마웠다. 그날 우리의 작은 하늘이었던 벚나무 한 그루는 세상에서 가장 핑크빛이었다. 여행도 못 가고 좋아하는 공연도 못 본다고 서러워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나보다. 진짜 행복은 일탈이 아니라 일상에 있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해 주는 사람과 살고 있었으니까.
찾아보면 일상은 감동으로 가득했다. 약 먹는 걸 싫어하는 나를 위해 남편이 하루치씩 소분해서 가방에 넣어준 작은 약봉지들이, 입덧이 한창 심할 때 엄마가 보내준 싱그러운 천혜향이, 어머님이 갑자기 안겨주신 커다란 꽃다발이, 회사에서 일하던 중 갑자기 날아온 사랑한다는 메시지 하나가, 뭘 먹고 싶은지 모르겠고 메스껍기만 한 나에게 이것저것 먹고싶을만한 것을 물어봐 주는 제안이.. 돌아보니 내가 내 몸의 변화와 고통에만 집중해서 힘들어할 때 주변 사람들은 계속 나를 바라보고 보살펴주고 사랑해주고 있었다. 나는 왜 그런 고마움을 지금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걸까. 왜 그만큼이나 어리석은 걸까..
노력해서 되는 것, 노력해도 안 되는 것.
운명의 상대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노력해서 만들어 가는 거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하게 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바로 운명이다. 그리고 노력해서 맞춰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이미 서로 잘 맞는다는 것이다. 결혼하고 보니 내가 상대를 바꿀 수 있으리라는 자만으로 다른 누군가와 결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할 때가 있다. 지금 나는 매일 기꺼이 노력하고, 그 일상에서 즐거움과 안정감을 느낀다.
백마탄 왕자님 찾기.
별 볼 일 없는 연애들 속에서도 나는 얼마나 동화속 왕자님을 기다렸었던가.. 왕자님은 결국 있었다. 어릴 적부터 세뇌된 이미지가 아니었을 뿐. 그 사람이 누군가가 보기엔 못생기고 까다로운 슈렉일지라도 나와 함께일 때는 백마탄 왕자로 변신하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음에 정말 감사하다. '왕자'와 '리더'는 다르다는 걸 결혼하고 제대로 알았다. 왕자의 핵심은 나를 공주로 만들어 주느냐이다. 후줄근한 추리닝을 입은 나, 피곤에 지치고 화장이 들떠 있는 나라도 공주로 만들어 주는 사람만이 진짜 왕자님이다. 일탈은 누구와 함께하건 짜릿하고 행복하지만, 중요한 것은 계속되는 일상을 함께할 때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냐는 것. 지쳐 있는 일상에 향기를 주고, 한 순간에 날 공주로 변신시키는 마법을 부려 주는 슈렉과 함께 만들어 갈, 앞으로의 우리 가족의 이야기들이 참 기다려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