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냉장고 정리를 하면서 크나큰 자괴감에 빠졌다. 나의 냉장고는 마치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무덤처럼 보였다. 버려야 할 것의 반에 반도 안 버린 것 같은데 벌써 큰 비닐봉지가 다 찼다. 먹다 남은 사과 조각,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는 과일들, 물컹하다 못해 아예 물이 된 가지, 스폰지와 하나가 된 복숭아(로 추정되는 곰팡이).. 몇개만 버려 볼까 하고 주워담다 보니 생각보다 상태가 너무나 심각한 거다. 아, 나 이제 애는 좀 본다 싶었는데 살림은 진짜 못하는구나...
변명이지만 대략 상황은 이렇다. 이유식이 끝나고 유아식을 시작하고서는 세 끼니를 그때 그때 만들어준다. 그러다보니 장을 정말 자주 보는데 실제로 아기가 먹는 양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어른밥을 함께 해서 우리도 먹어야 식재료 소진이 가능하다. 그런데 아기밥을 해서 삼시세끼를 먹이고 치우고 나면 어른밥을 할 만한 에너지가 부족할 뿐더러, 그럼에도 뭔갈 해보겠다며 주방에 있자면 아기가 옆에 와서 계속 놀아달라 보채는 거다.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다가, 그래도 안 놀아주면 큰 소리로 울거나 아니면 발 밑에서 양념통 칸을 뒤지면서 노는 불안한 상황이 연출된다. 그래서 결국 식재료들은 조금만 쓰인 채로 보관되고, 또 조금 쓰인 채로 다시 보관되고 하는 과정을 거치다가, 어느 순간 상태가 완전히 저세상으로 가 버리면 나는 결국 아기밥은 해줘야 하니까 똑같은 재료를 다시 산다. 이것이 되풀이되면서 냉장고가 점점 식재료 무덤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내 습관도 문제다. 아기에게 사과를 깎아 주었으면 나머지는 그냥 내가 다 먹어버리면 될것을, 나는 입이 짧아서 아주 조금만 잘라 먹고 또다시 넣어놓는다. 남편 역시 남은 음식을 마구 해치워주는 스타일도 아닐 뿐더러, 야근과 모임으로 주말 빼고는 집에서 밥을 거의 안 먹는다. 정말이지 총체적 난국이다.
마구 자책을 하면서 돌파구를 고민했다.
1. 아기 밥을 사먹인다.
2. 어른 밥이랑 똑같이 만들어 먹인다
3. 아기 식재료를 죄다 소분해서 냉동해놓는다.
4. 내가 그냥 아기 밥에 간만 더해서 먹어치운다.
그래도 엄마의 욕심에 최소한 휴직 기간 중에는 1번 옵션은 최대한 피하고 싶다. 2번 옵션을 하기엔 아직 너무 어리고 아기 건강이 걱정된다. 3번은 사실상 정도의 차이이지 지금과 비슷한 패턴일 것 같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보는 게 좋겠다. 4번은 노력해 서 적어도 지금보단 나도 좀더 먹어야겠다. 휴우, 오늘도 결론은 어서 아기가 크는 수밖에. 꼬맹아, 빨리 커서 엄마가 밥 한끼에 한번만 하게 해주라...? 김치찌개 한솥 끓여 같이 먹을 수 있는 그날이여 속히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