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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ading Lady May 13. 2020

아이의 감정

네가 가장 힘든 순간 기대고 싶은 사람이 내가 될 수 있을까.  

“엄마, 사랑해요.”

아이는 요즘 나에게 하루에도 열몇 번씩도 사랑한다고 한다. 내가 나의 엄마에게 해 본 것이 기억나지 않는 말을 나는 나의 딸에게 매일매일 매우 과분하게 듣고 있다. 우리 엄마가 툭하면 말했던 “너도 너 같은 딸 낳아 봐라.” 라는 저주(?)는 아무래도 빗나갔나 보다. 뭘 알고 하는 말일까 의문이 들면서도 들을 때 마다 감격스럽고 고마운 사랑한다는 말. 사랑이 뭔지 대충이라도 아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본인 기분이 좋을 때 사랑한다고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 아이가 현재 자기 감정을 꾸밈없이 말하고 있는 것 만큼은 확실하다.


30개월 소율이는 감정 표현에 매우 솔직하다. 좋을 때도 싫을 때도 뒤로 숨기는 게 없다. 자기의 감정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남에게 알려주는 것이 꽤나 중요하다고 여기는지 그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 준다. 물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부정적인 기분 또한 모두 쏟아놓는다. 기분이 안 좋다고도 하고, 친구나 아빠나 엄마가 싫다고 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고맙다, 미안하다, 괜찮다, 재밌다, 우습다, 슬프다, 화나다, 아프다, 배고프다.. 등등 다양한 기분과 감정들을 표현하는 소율. 누군가가 나에게 아무런 숨김도 과장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모두 공유하는 것에 대해 정말이지 감사하고 경이로운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문득 반성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이렇게 나에게 이야기해주는 만큼 나는 아이의 감정을 잘 존중해 주고 있는지에 대해. 어쩌면 나는 아이가 느끼는 이 다양한 감정들을 판단해서 어떤 감정은 받아주거나 칭찬하고, 어떤 감정은 무시하거나 야단치는지도 모르겠다. 긍정적인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한 인간으로서 그걸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오히려 소율이는 내가 아프다고 하면 바로 와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호~' 하고 위로해 주려 하는데.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만 판단하려 하는 것, 어른이 될 수록 아이보다 훨씬 못나지는 점 중 하나이다.


문제행동 뒤에 가려진 아이의 감정

그러고 보면, 아이가 말이 트이기 직전에 정말 육아가 무지무지 힘들었던 때가 있었는데, 그 이유 또한 아이의 감정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소율이가 무작정 주저앉아 떼를 쓰던 때가 있었다. 집에서 그러는 것은 물론이고, 장난감 가게 앞에서 갖고 싶은 걸 쥐어들고 엉엉 울기도 했었고,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길거리에 주저앉기도 했고, 그냥 갑자기 이유 없이 모든 것이 다 맘에 안 든다는 듯 발버둥치기도 했다. 본인 기분이 상해 버리면 그 곳이 어디든 주저앉아 바락바락 울었는데, 어르고 달래는 것이 안 먹히는 것은 물론이요, 내가 더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면 아이는 더욱 서럽게 울었고, 육아 강연에서 배운 대로 문제행동에 대해 무관심하게 대하면서 “안 돼”라는 메시지 위주로 말하는 것 또한 별 소용이 없었기에 정말 이걸 도무지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막막하기만 했었다. 그렇게 길거리나 쇼핑몰 등에서 한바탕 아이랑 실랑이를 한 날에는 하루의 힘이 축 빠져서 다음날까지도 기분이 다운되어 있곤 했다. 외출이 두려워졌다. 큰 소리로 우는 나의 아이를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지나갈 때 마다 그들이 나에게 나쁜 엄마, 혹은 무능한 엄마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다. 내 아이가 고집쟁이 문제덩어리인 것 같았고, 어쩌면 내가 아이를 잘못 키워서 떼 쓰는 게 하나의 습관으로 박혀 버린 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 습관을 없애야 한다는 명분은 나로 하여금 아이에게 져 줄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했고, 그것은 결국 아이를 야단치는 행동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런데 두 돌 이후 언어 발달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단순한 단어 뿐 아니라 본인의 감정을 조금씩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되자 그런 막무가내식 떼쓰기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당시 나는 그렇게 떼씀으로 인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익히게 하기 위해 무덤덤한 태도로 "안 돼.", “떼쓰지 마.” 등의 말을 많이 했었는데, 돌이켜 보면 아이가 당시 느끼는 감정에 대해 내가 먼저 구체적인 언어로 풀어 이야기해 주는 것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과 감정은 다 있고 심지어 왠만한 말도 다 알아듣는데 본인 입으로만 못 하는 거라서 답답해서 오히려 더 떼를 썼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는 그걸 몰랐다. 오히려 ‘왜 말도 다 알아듣는 아이가 이렇게 떼를 쓰나’ 싶었다. 나는 왜 아이의 감정을 바라보지 않은 채 문제행동 그 자체에만 주목했을까. 아이를 많이 혼냈던 그 시기가 후회스럽다.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 내가 화를 내는 것은 장기적으로 우리의 관계를 서먹하게 할 것임은 물론, 내 경험상 단기적인 효과도 거의 없다. 육아의 거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이것 또한 아이를 믿어주고 기다리면 다 해결되는 문제 중 하나였던 것이다.


아이에게 가르쳐 줄 단 한가지

그 때에 비해 아이는 훌쩍 자라 재잘재잘 말을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들여다보지는 못한다. 그래서 속상한 일이 있을 때 괜히 멀쩡한 곳이 아프다면서 울 수도 있고, 집에 놀러온 친구가 돌아가는 게 서운해서 애먼 장난감을 집어던질 수도 있다. 아이의 단순한 행동 뒤에 숨겨진 복잡한 마음을 먼저 알아차리고 공감해 주는 것은 엄마의 역할 중 정말 어려운 부분 중 하나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미 혼자 밥도 잘 먹고, 혼자 화장실도 잘 가고, 조금만 더 있으면 혼자 책도 읽고 혼자 학원도 다니게 될 아이에게 내가 케어해줄 수 있는 것은 감정적인 영역밖에 남지 않은 느낌이 든다. 아이의 감정은 점점 더 무궁무진해진다. 앞으로 언젠가 화가 무지하게 많이 날 수도 있고,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고, 뭔가에 대해 으스대고 뽐내고 싶을 수도 있고, 더 자라서 사춘기가 되면 어쩌면 죽고 싶은 감정이 들 수도, 반대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기도 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자 지나가는 것임을 배우기를, 본인 감정의 상태와 이유를 스스로 살펴볼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감정적으로 정말 힘이 들 때 털어놓고 의지하고 싶은 대상이 여전히 엄마나 아빠이기를 바란다. 그걸 도와주는 것만이 앞으로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내 아이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힘의 원천이 되어 주는 일. 그것에 성공한다면 이 모든 다사다난한 육아 여정의 끝에서 정말 행복한 부모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과연 그런 부모가 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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