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계절에 생긴 너에게
땅땅 언 계절을 지나는 일은 가혹하다.
그 날도 나는 11월의 스산한 아침 찬기를 정통으로 맞으며 출근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 말 좀 듣고 더 두터운 옷을 입을 걸. 요즘 날씨는 정말 알수가 없다니까. 옷깃을 세우며 웅크리다가 고개를 들어 문득 뉴스 헤드라인이 빠르게 움직이는 커다란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정부가 고금리 장기화 저성장 속 저출산의 특단 대책을 내놓겠다"고 한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다. 너에 대해서 잘 말 할 수 있을까. 날씨보다도 잔뜩 얼어붙은 서울역 6차선 한복판에서 사람들은 스크린을 보지도 않은 채, 저마다 한치의 냉기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자신의 속내를 감추곤 냉랭한 시선만 나누며 지나갔다.
2개월 전, 나와 남편은 그야말로 ‘바가지 문화’로 악명 높은 K-결혼을 헤쳐나갔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살벌한 웨딩 업계에서 정신 단단히 붙들어 매라는 선배들의 말을 숱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친구 A는 전설로만 전해 들었던 '스튜디오 촬영 시 커피 및 다과 강제 대접'을 실제로 겪었다. 웨딩 플래너가 스튜디오 촬영 사진사에게 마실것 사달라고 그렇게 압박을 했다고. 친구B는 스튜디오에서 800장이 넘는 사진을 20장으로 추리는 과정에서 15분만에 골라야하는 미션 임파서블을 찍어야 하면서 동시에 이상한 액자를 강매당했고, 친구 C는 신혼여행 패키지로 여행사와 계약했다가 마지막 일자에는 원하지 않는 쇼핑 코스를 돌며 해외 신혼여행지에서 한국산 옥장판과 이상한 전자파 차단 팔찌, 뱀피 가방 등을 강매 당할 뻔 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인 결혼식장 및 스드메, 스튜디오 촬영 루틴을 따르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던 것 같다. 일반 결혼식장보다는 정찰제로 정해져 있는 성당을(비용 때문에 성당을 고른 건 아님을 밝힌다. 원래 어릴 때부터 천주교 신자였고 성당에서 결혼하고 싶긴 했었으니까), 스튜디오 촬영도 간단하게 세미 버전의 스튜디오로 찍었다. 웨딩 플래너도 그냥 앱으로 대체했다. 그도 그럴것이 '웨딩'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어디든 예비 신혼부부를 뜯어먹으려고 안달이 난 사람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얼음판 같은 웨딩 여정을 아득바득 애써서 한 발씩 내딛었던 우리는 물어 뜯길만한 여지를 최대한 없앴다. 사실 백퍼센트 다 방어했냐고 하면 거짓말이다. 다만 그냥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다. 너무 스트레스 받으면 나만 손해니까. 이렇게 우리는 그나마 비교적 순탄한 결혼을 시작으로 안정적인 신혼이 기다리고 있을 줄만 알았다. 그러나 숨 돌리기도 잠시, “아이는 그렇게 쉽게 생기지 않을 것”이라던 선배들의 말만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는데 무방비 상태로 결혼 3개월이 채 안되어 두 줄을 보게 되었다. 분명 뛸 듯이 기뻐야 하는게 맞다만은, 걱정과 불안부터 앞선 것은 역시 팍팍한 계절 탓일테다. 네가 들으면 조금 섭섭할 수도 있겠지만, 그 때는 그랬다. 장류진의 소설 ‘도움의 손길’에는 아이를 그랜드 피아노에 비유하는 대목이 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이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미처 준비되지 않은 낡고 작은 신혼방에, 고귀하고 큰 존재감의 너를 맘 놓고 두기가 매우 부담스러웠다. 대입, 취업, 결혼 등 한 치 앞도 모른 채 달려오느라 비좁고 가난해진 나의 마음이 너를 다치게 하지 않을지도 두려웠다. 게다가 바깥 세상은 어떠한가. 사람도 사회도 온정 없이 얼어붙어 저마다의 밥그릇을 놓고 싸우기 급급하고, 공공장소에서 우는 아이를 날 선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걸. 나는 대한민국 ‘인구절벽’의 출산율 0.7명의 시대에 새 생명을 내놓는 것이 너에게 너무 미안한 선택지가 되진 않을까 고민했다. 당장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되었을 때 내가 준비해야할 돈과 자산들을 살펴보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밤을 새운 적도 있다. 하지만 고민은 고민일 뿐. ‘우리는 모두 준비된 채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네 심장 소리를 처음으로 듣게 되던 날부터 였다.
이로써 나는 임산부가 되었다. 나를 부르는 호칭이 “신부님”이 아니라 “산모님”이 될 무렵,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짐승에 가까운 몰골이 되었다. 수시로 쿡쿡 찌르고 당기는 복통과 함께 동반되는 뜨끈한 미열 증상은 디폴트다. 후각이 예민해져 냉장고를 포함한 모든 냄새들이 거북해져 몇 주간은 변기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인공적인 화장품 냄새가 힘들어서 화장 해야 하는 날에만 억지로 화장을 했고, 샴푸나 바디워시를 사용하여 씻는 것 조차도 고역이었다. 또, 5주차부터 찾아온 입덧 해일로 하루 종일 배를 타는 것과 같은 멀미와 사투를 벌여야하고, 하필 ‘먹덧’에 당첨되는 바람에 쉼 없이 입 속에 무언가를 집어 넣어야 속이 편했다.
그 와중에 군포와 마포를 오가며 출퇴근을 하는 것은 거의 죽을 맛이었다. 임신 전에는 계단을 뛰듯이 날아다녔던 나인데, 이제는 지하철 계단을 오르다가 턱턱 막히는 숨에 중간에 멈춰서 천장을 바라보며 쉬어야 했다. 몰랐는데, 임산부석은 ‘세미 노약자석’과 다름 없었다. 핑크색 시트에 앉은 사람들에게 임산부 배지를 보여줘도, 그들은 흘끗 눈길만 주고 애꿎은 스마트폰을 켤 뿐이었다. 몸도 힘든데 눈치게임까지 해야 하니 그 마저도 질려서 자리를 피하고 서서 갈 때가 많았다. 그 날도 1시간 반을 꼬박 서서 갔어야 했다. 아랫배가 뻣뻣해지고 정신이 아득해 질 무렵, 집 근처 역에 도망치듯 내리니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렇게 나는 열차와 승객들이 떠난 플랫폼 벤치에 앉아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엉엉 울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해일 가운데에서도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진실로 너 덕분이었다. 2주에 한번씩 초음파 검사를 할 때마다 아기라고 부르기도 멋쩍은 좁쌀 크기부터 샤인머스캣, 망고 크기로 크며 나를 놀라게 하더니, 지금은 튼튼하고 건강하게 자라 어엿한 신생아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너. 나름대로 세상에 나올 준비로 분주한 너의 조그만 꿈틀거림에 나는 다시 한번 기운을 차리곤 한다. 아직 너와 눈인사하진 못했지만, 그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는 너의 노력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오늘은 너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날이다. 나는 동료들이 하루 중 어느 시간대에 비교적 따스운 눈빛으로 서로를 볼 수 있는지 알고 있었고, 그 타이밍은 지금이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올랐던 3층 사내 카페, 비교적 캐주얼한 자리다. 나는 조금 긴장했지만 제법 담백하게 허실허실 웃으며 '임밍아웃' 했다.
"저.. 그, 아기가 생겼어요."
"와, 진짜? 대박. 정말 축하해요."
사람들은 놀라더니 박수를 두어번 쳤다. 짐짓 커피를 내려놓고 담백하게 축하해주는 대표와 이사 그리고 팀원들까지. 그간의 많은 고민들이 한번에 털어지는 순간이었다. 프로젝트들이 정말 많이 바쁜 스타트업이었지만, 그럼에도 한 사람의 인생 여정을 응원해주는 인간적인 회사라서 참 감사했다. 네가 이렇게 멋진 사람들의 축복을 받는 소중한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두길.
이렇게 나는 너를 만나고 있다. 내가 너에게 선물할 작디작은 다정함으로 부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길. 그리고 얼어붙은 주변을 녹일 수 있는 따스함으로 자라길. 너의 존재, 너의 말과 행동이 이 계절에 매번 찾아다니는 바로 그 온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