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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온 Apr 04. 2016

나는 꾸덕해지고 있다.

고일 것은 고이고 흐를 것은 흐르도록 





 이젠 희끄무레한 잔 기억만 남은 어린 시절의 나는 언제든 다른 그릇에 담길 수 있는 투명한 액체와 같았다. 어디에 있어도 긴장하지 않고 오히려 나의 모든것을 보여주어야 직성이 풀렸다. 작은 그릇에 담겨도, 큰 그릇에 담겨도 그 그릇의 모양을 유지하며 집단을 형성했다. 대외활동 등의 낯선 곳에서도 금방 말을 붙이고 친해지고, 나중엔 다시 헤어지는 것이 슬퍼서 울고 마는. 말갛게 고인 곳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그 속에서 시너지를 내며 사람들과 있는 내 모습이 좋아보였다.


 허나 요즘엔 어디에 있어도 편하지가 않다. 그릇에 담겨도 구석구석 빈틈이 생긴다. 지인과의 약속도, 가장 막역한 사이와의 술자리도 어딘지 모를 압박감이 발끝부터 스민다. 고민을 말해도 시원스럽게 말하지 못했고, 그 마저 말하는 것이 불편했다. 꼭 아빠처럼 알콜의 힘을 빌려야만 힘 줬던 발가락을 풀어냈다. 세상에서 가장 바보같다고 생각했던 모습이었는데.


 말랑한 스펀지에서 딱딱한 해면으로 굳어져버리는 그 중간의 어디쯤에 속하고 있는 것 같다. 쉽게 말하자면 단단해지는 중인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더 단단해지길 바라는 눈치다. 부모님도, 친구들도, 심지어는 내가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초등학교 수학학원 원장도 그런 소릴 했다. 아르바이트를 때려치고 싶다고 말하니까 '선생일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일들은 더 참으면 단단해지는 기회가 될 거다. 피하는 것은 인생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거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난 단단해지라는 말이 썩 좋게 들리진 않는다. 지금도 말랑말랑한 새내기와 대화하면 많이 경직되어 있음을 느끼는데. 벽돌, 아니 철옹성처럼 단단해지면 사람간의 진입장벽이 높아지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닌가. 이러다가 소위 말하는 '꼰대'가 되면 어떡하지.


 더 꾸덕꾸덕해지기 전에 자꾸 반죽하고 물도 주고 거름도 줘야겠다. 이렇게 자극 받은 스펀지가 해면이 되었을 때에는, 물 밀듯 밀려오는 막연한 가치관들을 의식적으로 거를 수 있도록 말이다. 고일 것은 고이고 흐를 것은 흐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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