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작년'
아! 가버린 나의 한 살. 아쉬울 겨를 없이 설렘 솔솔 불어오니 이를 어쩌나, 올 해는 더 풍부히. 철저히 풍부하게 보내리라!
‘올해’라는 친절한 오늘의 호칭은 단 하루를 기점으로 ‘작년’이라는 서슬 퍼런 소리로 바뀌어버렸다. 수많은 생애 최고의 순간들을 낳은 나의 작년, 이쯤에서 꺼내어 결 곱게 한 번 보듬어주곤 추억으로 챙겨넣어야겠다. 작년에 만난 내 생애 최고의 맥주를 떠올리며!
내가 생맥주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사람 맛 때문이다. 어디선가 뽑혀지고, 볶아지고, 끓여지고, 여과되어 마침내 숙성되는 순간또 순간까지도 거쳐지는 시선의 흔적 때문이다. 가공되기 전의 맥주는 확연하게 요리 느낌이 난다. 홀짝 맛보며 이 잔의 인생을 예측해보는 시간이 나는 참 좋다. 그리고 서브하는 사람들의 능숙한 세심함이 또 좋다. 내가 가진 세월 중 가장 맛있는 생맥주를 떠올리자면... (아! 다시 여행하는 이 기분! 여행의 참 묘미는 단연코 이 돌려감기일 것이야!) 좀 먼- 곳으로 간다. 맥주왕국 벨기에 여행 중 운이 좋게 방문한 '세인트 식스투스'(St. Sixtus) 수도원 양조장의 '베스트 블레테렌(Westvleteren)' 이다.
트라피스트 비어 (Trappist Beer)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이 양조하는 맥주로, 수행 중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거나 수도원에 방문하는 순례자들의 접대를 위해 생산되었다. 전쟁의 여파로 상당수의 수도원이 사라지면서 수도원 양조의 명맥이 대폭 감축했고, 세속 양조장에 제조법이 팔리게 되면서 급격하게 대중화 되었다. 허나 곳곳으로 가짜 트라피스트 맥주가 등장하여 시장을 점유하면서 본래 트라피스트가 가지는 질 높은 퀄리티가 손실되기 일 수였고, 이를 참다못한 수도원 8곳이 모여 1997년 ‘국제 트라피스트 협회’를 조직, 트라피스트 에일에 대한 높은 자격조건을 세운다. 그리하여 현재 우리는 다시 질 높은 수도원 생산 맥주, 트라피스트 비어를 맛 볼 수 있게되었다.
트라피스트 맥주는 대게 도수가 높고, 그 맛과 향이 강렬하여 와인 잔 모양의 전용잔에 따라 마셨을 때에 가장 황홀하게 즐길 수 있다. 액체의 밀도가 높아서 벌컥 벌컥 마시기보다는 차나 와인처럼 향을 충분히 음미하며 마시면 좋다. 빵이나 치즈, 초콜릿과 잘 어울린다.
이 맥주를 만나게 된 사연은 장대하고도 기막힌 이야기로 시작된다. 평소처럼 별 볼일 없이 카페에서 쓸데없는 말들이나 적고 있던 나는 베스트 프렌드의 달콤한 제안으로 덜컥 유럽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어디를 가면 좋겠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나는 망설임없이 (혹은 강력하게끔) 벨기에 맥주여행을 추천했다. 착하고 착하며 술까지 못 하는 착한 나의 친구와 나는 통화를 마친지 2주 만에 정말로 벨기에로 떠났다. 우리의 이러한 급작스런 벨기에 여행에 관한 일화들은 참말로 잘 볶은 깨알 같아서, 한번 시작했다하면 중간에 멈추기가 여간 쉽지가 않은 관계로 오늘은 고르곤 골라 ‘베스트 블레테렌’ 양조장 방문기에 관해서만 슬쩍 이야기 해보려한다.
여행 중 머문 '겐트'라는 지역은 어디서도 조금만 걸으면 흐르는 강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가 묵은 호스텔 1층 레스토랑에서는 아침마다 무료 조식이 제공되었는데, 경관이 아주 좋아서 창가라도 차지 할 때면 강둑에 얼기설기 다리를 널어두고 모닝부터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과 자전거 뒷좌석에 서류가방과 신문을 켜켜이 묶어 싣고 콧수염을 휘날리며 출근하는 뚱보아저씨를 볼 수가 있었다. 바라만 보아도 공기에 단내가 도는 그 시간이 좋아서 나와 친구는 꽤 이른 시간부터 천천히 조식시간을 즐겼다. 그리고 그 날 내 옆에서 조식을 먹던 마음씨 고운 캐나디안 두 친구들 덕분에, 우리는 운이 좋게도 차 없이는 절대 갈 수 없는 '베스트 블레테렌' 양조장에 갈 수 있었다. 겐트에서 브뤼헤, 브뤼헤 에서도 먼 길을 둘러 저녁 즘 도착한 베스트 블레테렌 양조장은 정말이지 수도원답게 고요하고 정갈한 풍경이 한참을 이어지는 시골마을 한 가운데 조용히 숨어있었다.
카페 입구에는 식스투스 수도원의 오랜 역사부터 트라피스트맥주의 제조과정까지 빼곡하게 소개되고 있었는데, 인상적인 것은 한 명이 단 한 병씩만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베스트 블레테렌은 유럽 내 맥주 가게에서 흔히 찾을 수 없거나, 있다고 해도 가격이 아주 비쌌는데 그 이유를 양조장에 도착해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독특한 점 으로서 시중에 유통되는 베스트 블레테렌 병맥주에는 라벨이 없다. (하여 참기름 병이 연상..) 뚜껑으로 종류를 식별한다. 블론드는 노랑, 8은 파랑, 12는 초록색 뚜껑이다.
맥주는 세 가지 종류로서,
<베스트 블레테렌 블론드>
꽃과 꿀의 은은한 단 맛을 베이스로 바나나, 사과 등의 단 과일향이 풍부하게 퍼진다. 일반 밀맥주와는 다르게 곡물의 단 맛 보다는 과일이나 꽃 계열의 단 맛을 고루 안고있다. 텁텁하게 걸리는 느낌 없이 부드럽게 넘어가는 목넘김이 인상적이다.
<베스트 블레테렌 8>
체리와 흑설탕, 카라멜류의 단 향이 강하고 역시나 부드럽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액채의 촉감이 아주 좋다. 단 향을 거치면 구수한 곡물의 풍미가 한가득 채워지면서도 끝 맛이 아주 깔끔하다. 정성스러운 맛.
<베스트 블레테렌 12>
탁월한 깊이감과 높은 도수, 무거운 밀도를 가지고도 산뜻한 끝 맛을 자랑하는 최고의 맥주. 높은 알콜 도수에도(10.2%) 알콜향을 감지할수가 없다. 포도, 자두, 바나나 등 풍부한 과일향과 약간의 계피향도 스쳐지나간다. 향이 복잡하지만 탄탄한 바디감과 섬세한 끝 맛 때문에 지치지 않는다.
극적인 양조장 투어를 마친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곧장 여행길에 브뤼헤 시내에서 구매한 달 맥주를 나누어 마셨다. 밤 깊는 소리와 폭폭 쌓이는 맥주 거품소리, 그리고 오늘 처음 만난 지구 반대편 친구들과의 서투른 수다소리는 가는 초침소리를 제치며, 그렇게 그 밤 시간을 덮었다. 그리고 마침내 차지한 푸근한 이부지리 속에서 나는 숨죽여 흐르는 강 물소리를 음악 삼아 듣다가 한 해를 위한 작은 시를 적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부딪힘들은 저기 고요한 물결로 흘려보내야지, 표면으로 부서져 일렁이는 갈등의 빛 결의 귀하게 여겨야지. 설레는 내일만을 기다리며.
우리 모두는 그저 흘러가는 중 이지만
그 안에서 작은 것을 지키려고 치는 손 사레들이 만드는 물결, 물결이 있기 때문에 좀 괜찮은 것 아닌가요? 흘러가 버리는 중 이더라도.
서운한 일들이 많겠지만은 힘써 속마음을 보아주세요.
말로 가려움을 긁지 말아줘요.
우리들의 잡음이 만드는 물결, 물결을 사랑 해 주세요.
글 사진 . 신잔디
일부 사진 출처 goog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