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닮은 맥주
새벽의 가운뎃 시간이었다. 나는 나의 심지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불안하게 밤 잠을 쪼갰다. 코 끝에서 가슴으로 찬 공기가 맵게 차오르고, 도도한 개가 이불 속 으로 기어들어오는 그런 가운뎃 날 이었다. 가을의 중간, 그 중간을 가르는 밤의 중간.
나는 자신감이 없어질때에 영화를 튼다. 잘 만든 영화를 보고나서 내 이야기를 얼추 비슷하게 꾸며보는 나만의 싱거운 습관은 갈라진 밤의 빈 공간을 그럭저럭 잘 포장해준다. (하루하루는 정말이지 은근하고도 은밀한 영화와 같다. 모른 척 지나치는 것 들이 너무나 많을 뿐.)
나는 준비된 맥주를 잔에 한 가득 따르고 미셸공드리의 <무드 인디고>를 틀었다.
슬픔은 아프지만
결국에는 아름다운 것.
미래를 알처럼 낳는 외로움의
뒷걸음질과 같이.
발명가인 남자는 연주하는 코드의 분위기에 따라서 칵테일이 제조되는 '피아노 칵테일'을 만든다. (마이너 코드를 연주하면 독한 술이, 메이져 코드를 연주하면 달콤한 술이 제조되는 식이다.) 나는 '버석한 낙엽 휘날리는 텅빈 가슴 속 가을' 쯤의 신파적 가사를 한 노래를 연주하여 나오는 쓸쓸한 술을 받아먹고 싶었다. 내 안에서 제조된 가을을 탄 술, 오늘의 맥주는 쓴 맛이 특징적인 미국 수제 맥주 '레신'(resin)이다.
뉴욕의 '식스포인트'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레신'은 9.1%의 높은 알콜도수와 *IBU 103 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프로필에도 놀랍도록 자연스러운 맛을 자랑한다. 나는 레신을 마실 때 하마터먼 '진짜 맥주'를 마신다는 기분이 돈다. 두툼하고 묵직한 바디감에 화사하고 매운 느낌이 한 몸으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캔을 따는 즉시 신선한 홉향이 까득 올라오고,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풍부한 향이 지속된다. 적당한 단맛이 알콜향을 부드럽게 잡아주니 그야말로 감동적인 밸런스의 맥주. 쓰지만 결단코 필요한 씀 일 뿐, 결국에는 달콤한. 그래! 가을 같은 맛이다.
*IBU (International Bitterness Units)
맥주를 고를 때 알콜도수 말고도 고를 수 있는 여러가지 코드가 있다. 그 중 맥주의 '쓴 맛' 단계를 숫자로 수치화 한 것이 IBU 이다.
일반적으로 부드러운 맛이 특징인 맥주의 IBU는 10~30선, 씁슬한 정도의 맛은 40~60선이며, 쓴 맛이 특징적인 맥주는 60~100이상으로서, 이 경우엔 대부분 홉과 시트러스향이 강한 (화사한 향 혹은 매운 향) 더블IPA 맥주가 대부분을 이룬다.
날 좋던 날의 그리움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사람 정도는 누구나 다 있겠지만은,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밉고도 그리운 사람이 있다. 우리는 가을이면 늘 바쁘도록 여행을 했다. 두툼한 이불을 깐 봉고차 뒷칸에 돌맹이처럼 던져진 우리는 하루 온 종일을 시끄럽게도 굴러다녔다. 날 좋은 날 도로에서 길이라도 막히는 날이면 우리는 창문에 쪼로로로 붙어서 때 이른 산타처럼 나타난 뻥튀기 아저씨의 발걸음에 맞춰 팍 두꺼워지는 심장소리를 느꼈다. 아빠가 사준 뻥튀기는 환희의 심정 마냥 빠스락-! 경쾌한 비명을 지르고선 입안에서 흰 눈 처럼 녹았다. 그런 날 좋던 날들, 봉고차 뒷칸에서 뻥튀기를 쪼개 먹으며 굴러다니던 그런 가을이 사무치게 그립다. 그리워서 자꾸 그리워 하다보면 무언가가 밉다. 그리운 아빠가 밉다.
폐에 커다란 수련이 자라는 병에 걸린 여자는 싱싱한 생화를 한가득 껴안고 자야만 살 수가 있었다. 발명가인 남자는 매일매일 싱싱한 생화를 한가득 사 나르느라 결국에는 아끼던 칵테일 피아노를 팔아낸다. 영화의 장면 장면은 핑크에서 브라운으로 브라운에서 그레이로 점차 칙칙해져가다 여자의 죽음으로서 영화는 갑자기 끝이난다. 무지개 같은 아름다움이 활짝 피었다가, 묘연하게 사라진다.
누구나 가슴안에
치명적인 꽃 한 송이가.
그 누가 이 아름다운 영화를 비극이라 말할 수 있을까. 여자의 가슴에 피고 자란 꽃, 모든 비극 그리고 사사로운 슬픔까지도 어째서 이토록 아름다운 생의 일부일까.
모든 크래딧을 올려보내고 떠오르는 맥주의 기포 소리가 남는다. 나는 오드리토투가 이 맥주를 마셨다면 결코 죽지않았을 것 이라고 건방지게 주정한다. 우리 모두에겐 가슴안에 모진 꽃을 달래줄 맥주가 필요하다. 개다가 오늘은 가을의 가운데를 가르는 밤의 중간. 모든 예쁘고, 아프고, 슬픈 것들은 새삼 가을과 닮었다. 쓴 맛이 좋구나.
글 신잔디
사진출처 Google.com
Mood Indigo (2013, Michel Gond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