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아하는 것, 그러니까 호기심이 돋는 것 말고 뭐랄까 깊숙하게 그것이 떠오르고 또 떠오르고 가끔 그걸 떠올리면 한없이 영화적인 상상이 펼쳐지고 그러면 나는 거기에 빠져서 금방 수줍어져버리고 하는 그런 ‘좋아하는 것’에는 시간이고 돈이고 애정이고 아끼지 않는 편이다. 어릴 적엔, 그러니까 이십 대까지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걸 확실히 느끼는 반면 그것을 자신 있게 표현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일단은 감추는 것이 더 익숙했고 자연스러웠다. 스물 일고 여덟 무렵, 좋아하는 일을 말 그대로 막 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나도 저렇게 해볼까’ 하더니 눈 깜짝할 새에 주위에서 뜯어말릴 정도로 뭐든지 다 해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론적으로 나는 맥주가 너무 좋아서 그걸 떠올리고 또 떠올리고 상상하고 어쩔 땐 수줍고 황홀할 지경에 이르는데, 그건 정말로 내가 그것을 '좋아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내 모든 자원을 투자할 가치란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체코로 갔다. 맥주 마시러.
기왕 거기까지 갔으면 절대로
마셔봐야 할 맥주 리스트!
3개월 동안 거의 매일 맥주를 마셨다. 한 잔, 반 잔, 미니 캔 한 개, 아니 한 모금이라도 마셨다. 아파도 마시고 우울한 날도 마시고 기쁜 날은 두 배로, 돈 생긴 날은 두 배에 곱절로 마셨다. 그게 가능했던 진짜 이유는 내가 맥주를 좋아해서 보다는 그곳 맥주가 좀 그러하기 때문이다. 나는 작고 큰 펍에 할머니들이 장바구니를 껴안고 들러 작은 맥주 한 잔을 커피와 함께 마시는 광경을 보고 정말에 감탄이 튀어나왔다. 처음엔 그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무례하게 따봉을 치켜들며 “유 룩 베리 굿!”을 남발하기도 했다. 자주 가던 서점에 딸인 작은 펍에서는 거의 갈 때마다 본 할아부지가 매일 다른 색깔의 맥주를 드시는데 (참고로 나는 관찰하는 것을 꽤 좋아한다. 해서 국내외서 혼자도 잘 쏘다니며 맥주를 마시는데, 안 보는 척하면서 주위 것들을 꼼꼼히 둘러보고 상상을 덧붙이는 일이 내게는 고유하고 소중한 취미이다. 그건 혼자일 때만 가능하다.) 그것도 그냥 그렇게 멋져 보였다. 하여간 이 곳에서 맥주라는 술은, 술 이기도 물 이기도 하고 하루의 윤활제이자 마치 생활인 것 같아 보였다. 가르치는 건 잘 못 배우면서 그런 건 또 잘 배우는 나는 꼭 같이 생활로서 맥주를 느꼈다. 그러자니 자연스럽게 다양하고 맛있는 맥주를 많이 마시게 됐다. 마시는 순간부터 집에 돌아오는 순간까지 ‘아! 이거는 못 잊어버리겠는걸…’ 했던 맥주 몇 가지를 소개한다.
500년 역사의 흑맥주 집 ‘우 플레꾸’
자체 양조한 흑맥주와
전통요리 '스비치코바'를 추천한다.
Google map : https://goo.gl/maps/smA7JfNm8LH2
사실 이 곳은 500년이라는 그 역사 때문에 단연 관광지에 가깝다. 더러 한국 관광객들도 많이 찾고, 손님들 대부분이 심하게 두리번거리는 걸 보면 관광객 전용 펍이 된 건 명확하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은 프라하에 들른다면 꼭 추천하고 싶다. 극장으로 쓰이던 공간을 그대로 펍으로 만들었다는 메인 홀은 500년째 극장 인테리어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광장처럼 넓은 홀 끝에는 잘 관리된 무대와 커튼이 그대로 있다. 들어서자마자 큰 규모에 놀라고 시끄러운 소음에 한 번 더 놀라는 곳이지만 한 시간쯤 지나면 함께 고성을 일구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누구든 앉으면 술 동무가 되는 곳, 모르는 노래도 큰 소리로 불러지는 곳, 우플레꾸다.
영업용 미소를 흘리는 바텐더가 둥그런 쟁반 위로 소주잔 같은 작은 잔에 든 꿀술을 되게 공짜인 것처럼 나눠주는데 족족 받아먹으면 나갈 때 프라하를 통째로 미워하게 된다. 한 잔 받아먹을 때마다 귀신처럼 꼼꼼하게 체크하여 계산하니 원하지 않는다면 다부지게 거절하는 것을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이 곳 흑맥주는 태어나서 마셔본 포터과의 흑맥주 중 가장 맛있다. 달지 않고 시원하게 꿀꺽꿀꺽 넘어가는 목 넘김, 그렇다고 밍밍한 건 절대 아닌 꽉 찬 맛이다. 커피나 초콜릿향보다는 보리향이 강하게 나서 장난 안 친 진짜 맥주 느낌이 난다. 1/5잔 정도 남으면 맥주를 한 가득 어깨에 싣고 다니는 바텐더가 새 맥주로 바꿔주고 가버린다. 당황해서 얼떨결에 새 맥주를 마시다 보면 계산할 때 깜짝 놀라게 된다! 도대체 어느 순간에 내 맥주잔을 세어 체크하는 건지 영영에 미궁이다. 아무래도 좋은 곳. 나를 프라하에 있게 하는 맥주.
시끄러운 곳이 싫은 날엔 강가를 걸어 변방의 수제 맥주집으로 간다.
블타바 강가를 남쪽으로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크래프트 비어 펍 '삐비니 프리스타브'
그날의 게스트 탭과 칠리 오일에 절인 치즈 요리를 추천한다.
Google map : https://goo.gl/maps/AViAoUtpd712
프라하에 체류하며 두 번째로 자주 방문한 이 곳은 부부가 운영하는 크래프트 맥주 전문점이다. 요즘 세대들이 재밌게 만드는 체코 내 소규모 양조장에서 생산한 맥주들을 판다. 미국식 IPA와 체코식 필스너의 조화를 잘 경험할 수 있고, 트렌디한 차세대 체코 브루어들의 다양한 맥주를 맛볼 수 있다. 개다가 음식이 아주 맛있는데, 심플하고 간결한 메뉴 구성이 아주 좋다. IPA 종류는 매주 바뀌고 50 종류 이상의 보틀도 판매한다.
보흐밀 흐라발이 작업실 출근하듯 드나들었다는 엄청 유명한 펍 'Tygra 티그라'
운 좋게 착석하신다면 체코 전통 방식의 육회 요리인 '타르타르'요리가 맛있다고 합니다.
Google map : https://goo.gl/maps/Th7DeCMtFZB2
프라하에 도착하기 전부터 마킹해둔 펍이었지만 너무 좁은 그 공간에 너무 과도한 인원이 들어 차 있어서 번번이 실패했던 곳이다. 웬만하면 서 서든 어설프게 앉어서든 한 잔은 먹고 나오겠는데 그게 안 되는 초 고밀도에 인원이었다. 체류 두 달만에 평일 낮 5시쯤 (오픈 직후) 겨우 어디 구석에 끼여서 마셔봤다. 맥주 사진 찍는 건 고사하고 보후밀 형님 얼굴 사진 찍는 것도 정말 정신 차려서 찍은 것.
결론적으로 티그라 맥주는 프라하에서 마신 맥주 중 가장 맛있었다. 어디 맥주인지 모르겠는 필스너인데, 뭔가 특별한 맛이 있다. 필스너 치고는 밀도가 높고 거품도 아주 쫀쫀하다. 약간 붉은색을 띠고 맛도 쓰고 시원한 통상적 필스너에 비해 부드럽고 고소한 편이다. 여기도 저번 에피소드 <신선한 프라하, 예술적인 맥주> 편에 소개한 오래된 펍처럼, 건장한 할저씨 바텐더가 탭을 지키고 있고 동전을 내면 맥주를 아주 박력 있게 (거품이 파도처럼 출~렁이게!) 쾅 준다. 그럼 나는 소심하게 “데꾸위…”그러고는 머리가 덜 빽빽한 한 구석에 가서 그걸 홀짝홀짝 마신다. 처음엔 “아니 뭐가 그렇게 특별하다고 이 난리 들이여” 하면서 인상을 팍 쓰고 마시다가 나도 모르게 구석을 견디며 넉 잔을 마신다. 나올 땐 어떤 감사함마저 느껴지는 곳.
에헤이, 나는 아무리 맛나도 그렇게 구석에 서서 먹고 싶지는 않어요. 하는 분이라면 어느 정도 규모 있고 안락하면서도 아주 양질의 맥주를 만들어 파는 레스토랑을 소개합니다.
6가지 맥주를 양조하여 판매하는 펍
'우 트리 루지'
체코에서 흔히 찾기 어려운 브라운 에일을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6가지 모두 개성 있고 맛있다.
Google map : https://goo.gl/maps/o5Uso2CRfj62
이 곳은 6가지 자체 양조한 맥주만 판매하는 곳으로 3층까지 이어져있어 맛있는 전통음식과 함께 편안하게 맥주를 즐기기에 좋다. 어르신들과 함께 여행을 한다면 적극 추천. 전통 스타일인 필스너부터 붉은색의 엠버 에일, 브라운 에일, 다크 에일 (흑맥주) 등 다양한 맥주를 판매하고 각각 다 맛이 아주 좋다. 앞서 소개한 티그라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 티그라 펍 입성을 실패하거나, 올드타운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고도 자체 양조한 양질의 맥주를 경험하고 싶을 때 들러보시길 추천한다.
열심히 쿠키 굽는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손님들 대화 중에 유독 목소리가 낭랑하여 귀에 잘 들어오는 여자가 있었다. 여자가 상대에게 “그래서 그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야?” 고 물었는데 그 말이 급작스럽게 내 가슴까지 왔다. '나는 뭐 하는 사람인가.' 한동안 내 안에 그 질문이 폭풍 속 통통배처럼 어지럽게 일어서 정신을 못 차릴 때가 있었는데. 쿠키 반죽을 이쁘고 동그랗게 매만지면서 '나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나, ' 하고 스스로 물어봤다.
'나는 뭐 하는 사람인가'와
'나는 무얼 하고자 하는 사람인가' 하는
두 질문끼리 너무 멀리 떨어져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못하는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쿠키를 구워서 돈을 만드니까 쿠키 굽는 사람인가, 아니면 음악을 만들어서 노래 부르는 사람이니까 음악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엄마와 유나를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으니까 다만 큰 딸인 사람인가, 뭐든지 쓰는 일에 마음을 의지하니까 쓰는 사람인가.
결론이 없다. 나는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 하는 질문에 그냥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정말로 좋아하는 일 이거나 그것이 안 할 수 없는 깊이로 원하는 일이라면 절대 포기하지 않고 해 볼 수 있는 사람이면 그걸로 됐다고 친다. 그래서 그 아무도 나라는 사람의 정체에 관하여 한 줄로 요약할 수는 없을 사람이라는 것. 그 편이 내게는 더 맞는 것 같아.
그래서 오늘 나는 맥주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걸 진짜로 좋아하고 그래서 무어라도 기꺼이 해 보는 사람. 나는 뭐 하는 사람이냐고? 좋아하는 것을 기꺼이 좋아하는 사람!
그날의 음악
<Väsen - 'Pilvi & Eskos Brudvals'
(Live with Dreamers Circus)>
노을이 노랗게 세상을 익히는 저녁, 풀냄새 나는 호숫가의 풍경같이 아름다운 멜로디를 가진 곡 입니다. 웨딩 왈츠로 작곡 하였다는 이 곡은 스웨덴 민속 음악 밴드인 'Väsen(배슨)'의 기타 연주자 'Roger Tallroth'의 자작곡이에요. 매 주 소개하던 덴마크 밴드 'Dreamers circus' 드리머스 서커스와의 협연 라이브 영상을 소개합니다. 봄 가에 노을같은 그날의 음악으로 길고 느린 휴식 하시기를 바랍니다. :^)
'좋아하는 것을 기꺼이 좋아하는 사람'
글. 사진 신잔디
(일부 사진은 구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매주 토요일 아침 11시 새로운 에피소드가 발행됩니다
다음날인 일요일 저녁 11시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으로 읽어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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