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계 이야기
그로부터 일주일이었다. 레인님은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인형계를 내려다봤다. 유리창에 빗물이 맺혀 주르륵 흐르고 있는 게, 꼭 자기 마음 같아 괜히 싱숭생숭했다. 가볍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늘 이즈음에는 몰랑이씨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길을 산책했는데 어쩌나 하던 참이었다. 흥미로운 연락이 왔다.
“레인님, 악마들께서 딸기님과 호박씨를 붙잡았다고 합니다.”
“어머, 그게 벌써 거기까지 진행이 되었나요?”
와우. 기분도 꿉꿉하던 차에 더할 나위 없는 복수의 대상이 왔다. 천계, 마계할 것 없이 죄다 사기를 쳐먹어? 이 미친 호박씨야. 너가 피해자인데 너가 사기를 친 것처럼 뉴스에 나버렸잖아. 먼저 언플한 개새끼들한테 네가 해외로 출장 간 사이 당하면 어떡하냐. 변호사도 가출해서 셀프 변론해야 하게 생겼잖아.
게다가 그 부인인 딸기님은 어떤데. 뻔뻔한 얼굴이지만 엄청 예쁜 모델이란 말이야. 어머나, 39,800원에 감자 50개, 오이 20개, 늙은 호박 5개, 호박즙 2박스 세트가 마음에 안 드세요? 딸기, 힘낼게요! 그럼 44,700원 패키지는 어떠세요? 하며 최선을 다해 팔았다고.
“이……말려 죽어도 시원찮을 것들 같으니!”
도대체 천사와 악마들을 뭘로 보고 이런 특가 패키지를 판매했단 말인가. 은원을 가볍게 봐도 정도껏이지. 그녀는 농산물 패키지의 사기꾼들을 잡기 위해 열이 받아도 할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도 그럴게 인형계 최고의 악마 집안 아들이 호박씨였다. 지금은 딸기와의 결혼을 반대해 집에서 가출해 홀로 떠돌고 있지만 말이다.
“하, 오늘 천계의 모든 천사들과 마계의 악마들이 집결할 것이다. 그리 일러두어라.”
“예, 알겠습니다. 레인님.”
레인님의 심복은 거기까지 듣더니 얼른 통화를 끊고 인형계의 천사들에게 바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따지고 보면 레인을 그저 그런 악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태까지 보통 정도로 일한 악마들이라고 해도 절대 일반인과 비교했을 시 평범한 이는 없었다. 직함이지만 악마는 악마다. 어디까지나 이들은 결코 모욕이나 비웃음을 당했을 때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이다. 심복까지 보유한 걸 보면 말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레인은 가녀린 마음을 가졌기에 처음 시작했을 때 악마가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변의 지인들로부터도 만류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무려 고대때부터 존재해 온 인형이었다. 기억은 온전하지 않지만, 그런만큼 독할 수 밖에 없었다.
요는 복수에 관한 능력이다. 창의력. 그게 부족할 뿐, 레인은 역대급 악마라고 불리지는 못해도 누구에게 뒤떨어지는 악마는 아니었다. 아니, 그걸 떠나서 만나면 정말 무서운 분위기의 인형이었다.
심복은 절대로 눈밖에 나지 않길 바라며 전화를 돌리는 것을 마쳤다. 통화를 하던 모든 이들이 쾌재를 부르는 게 느껴졌다. 이유야 간단하다. 그놈의 38,900원 패키지를 혹해서 특가랍시고 몇십 박스씩 사재기했기 때문이다.
‘호박씨가 나에게도 팔았다. 진범 사기꾼 놈 호박씨에게도 민폐를 끼쳐? 죽여버릴 거야….’
이제 지하감옥이라고 쓰고 호텔이라고 읽는 곳에 갇힌 두 사람은 부들부들 떨고 있을 것이었다. 안 그래도 요 몇 달간 줄여서 천계(천계 지향 국가)와 마계(마계 지향 국가), 그리고 중립국까지 전부 딸기님과 호박씨의 체포 뉴스로 핫하지 않았는가.
‘뭐였더라. 겁나 웃겼는데. 악마들에게 잡혀서 호박씨 군만두만 먹고 비웃음 패턴 연구했던가?’
아, 그랬다. 호박씨는 수성의 인형이라 그런가, 화성의 악마들이 몇 번이고 스카우트를 제의해도 별로 하려 하지 않고 도망만 쳤다. 그런데 그들의 복수를 실제로 뉴스에서 보게 될 줄이야. 심복은 웃었다.
「마계, 천계 합동 작전으로 체포된 딸기님 부부는 이번에 악마들의 복수를 받았습니다. 아르나 기자, 마계는 지금 어떻지요?
네, 아르나 기자입니다. 관계자들은 현재 딸기님과 호박씨가 격리되어 각각 악마들과 대거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헉,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무슨 대거리입니까?
지금 모욕과 비웃음과 비아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호박씨와 딸기님은 자기들이 절대 그러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범이 따로 있답니다. 그런데 악마들이 그걸 보더니만 너가 했잖아! 하면서 호박씨의 비웃음 패턴을 연구해 발라버리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들었을 때 심복은 팝콘을 먹다가 기도에 걸려서 사례를 들렸던 걸로 기억한다. 그 이후로도 일주일 간 고기 만두만 주면서 넌 정말 ‘모욕도 못하고 비웃음도 못해!’ 하면서 패턴을 연구시켰다고. 틀리면 딸기님과 직접 배틀을 해 서로 비웃으라고 했으니 과연 진정한 악마들답다.
‘어휴, 뭐 이래. 이래서 악마들 눈에 한 번 찍히면 무섭기 짝이 없다니까.’
심복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사실을 잡혀버린 딸기님과 호박씨에게 전해야 했다.
***
“호오~박 그러니까 왜 우리가 그래야 하는 거냐?!”
“딸기, 딸기! 정말로 원통하다!”
심복의 말을 들은 두 인형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직 천사와 악마들이 내부 회의 중이라 어떤 복수를 받을지는 몰랐지만, 그 결과는 처참할 것이 뻔했기에 호박씨는 억울하기만 했다.
“호박, 봐 줘라. 호박. 안 그래도 지난번에 뉴스에 크게 터져서 개나 소나 날 잡아가려는 것 같은데……”
“어허, 말 조심하십시오, 호박님. 당신을 하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아십시오!”
“딸기, 이 분은 그 이후로 트라우마가 생겼단 말입니다! 고기 만두 트라우마가!”
“죽여버리겠어, 악마들~!!!”
호박씨는 저를 두둔해주는 딸기님을 껴안으며 딸기님~!!!하고 억울하다며 땡깡을 부렸다. 그러나 실상은 좀 봐달라며 억울해 보이기 위해 하는 연기일 뿐이었다. 벌써 멀쩡히 길 가다가 납치되어서 악마들의 복수를 받은 게 몇 번인가? 아직도 만두만 보면 속에서 뭐가 올라올 지경이었다.
「오우, 호박. 오랜만이다, 그치?」
선량해보이는 장미 인형.
그러나 인간 모습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에 녹색의 눈동자를 가진 예리한 미청년.
샤라였다.
호박씨와 샤라는 무척이나 친했다. 그러나 친구마저 등쳐먹는 게 도둑의 역할이다. 갱생을 위해 나왔는데 어쩌다 보니…호박씨와 딸기님은 이제 생계형 사기꾼이 되어버렸다.
「씨발. 이렇게 사기를 쳐? 나에게? 앗, 이런. 나도 모르게 욕을……. 미안. 아니, 내게만이면 상관없지. 너 어쩌려고 하냐 이제. 천사분들에게까지 어떻게 다 판매를 했냐. 어휴.」
네…그래서 이제 세계 최고의 변호사인 님한테 조져질 예정임요.
호박씨는 그 후로 디저트와 변론 지옥에 쳐넣어졌다. 딸기님도 같이 다른 방에서 그 지옥을 겪고 있었는데, 지급되는 밥은 디저트로, 배고프다고 하면 밥이 없으면 빵이나 먹어! 하면서 마카롱을 입에 쑤셔 넣어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24시간동안 토크를 해야 했다. 토크를 하는 게 뭐가 문제냐 싶지만, 문제는 면식도 없는 선대 천사들까지 죄다 와서 자신들에게 왜 패키지를 팔았냐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호박씨와 딸기님은 그것이 불법이며, 엄연한 우롱죄임을 알고서도 행한 것이기에 가중처벌이 되었으며, 법적인 변론 지옥 외에도 정치, 경제, 보건, 예술, 그 외 기타 등등. 토크를 하면서 모든 무지를 까내려지곤 했다. 24시간 동안.
“끄아아, 호박! 이젠 못참아!!!”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다. 진짜 웬만하면. 근데 그렇게 일주일 간을 또 보내니, 호박씨와 딸기님은 잠도 못잔 채로 토크만 해 헬쓱해져 돌아왔다. 그 후에 내리 일주일 간 잠만 쳐잤는데, 그 후에 바로 씻고 나와 겨우 장 볼 겸 데이트하러 나왔는데 이렇다니.
“으아아악! 우리가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야!!!”
호박씨는 폭발했다. 모든 죄업을 갚겠다고, 자신은 딸기님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진짜 사람이 간사하긴 하다. 미쳐버리겠다. 또 어떤 복수를 당하려고 이러는 건지. 분명 마계 최고의 악마 가문인 프룻프룻 아들과 마계 지향 국가 미룽의 국왕 딸인 딸기님의 조합인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그런 그를 보며 딸기님이 안절부절 못했다.
인형계에 살인범도 있지만 그런 이들은 노예나 가까운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인형들은 성관계를 맺지 않는지라 강간범도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런 것까지 하면 영혼이 인간에 가까워진다는 관점 때문에 다들 거의 안하긴 했다.
그러나 나름 도둑과 용병으로 한때 화려하게 살았던 호박씨다. 그 생활을 다 청산하고 죄도 꾸준히 갚고 있다지만, 인형의 인내심 한계가 변하지는 않는다. 결국 또 본인이 하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범죄에 손을 댄 것이다. 이렇게 되니 화나면 다 부숴버리고 복수를 계획하는 충동적인 성격인지라, 진범을 정말이지 때려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또각, 또각.
단체로 구두굽이 복도에 울려퍼졌다. 바닥을 보던 시선을 올려보니 여자, 남자할 것 없이 정장을 입은 모습이 보였다. 제길. 대악마님들이었다. 못생겼든, 잘생겼든 아이돌 배우보다 극상으로 가꿔 언뜻 보면 귀공자, 귀부인으로 보였다. 그런 그들의 선두에 선 것은 바로 레인님이었다.
레인님이 말했다.
“저번에는 샤라님에게 벌을 받았다더니, 이번에는 우리에게 잡혔군 그래?”
“네. 오랜만입니다, 레인님. 배우자분께서는….”
“……갔어. 그래, 그게 뭐?”
“네?”
“왜 죄인인 네가 그걸 묻냔 말이야.”
한때는 누구보다도 친했다. 딸기님과 레인님은 그냥 그저 그랬다. 성격도 안맞았다. 그러나 몰랑이씨와 호박씨는 정반대고 대천사이자 대악마가 될 라이벌이라 처음에 서로를 무시하면서도 인정했다. 아마 그렇기에 찌질한 범죄에까지 본의 아니게 손댄 지금과 같은 사태를 더 못 봐줄 것이리라.
“후후, 우리들이 비웃음 지옥, 변론 지옥 외에 뭘 더할까 생각을 했는데……좀 많이 어렵더라.”
그건 그랬다. 앞선 이들이 워낙 대단한 복수를 해서 유치한 복수를 내놓으면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 자기들이라면 은근 더러우면서도 그런 복수를 했을 것이었다. 레인님은 일단 더러운 걸 무지하게 싫어하니까 코딱지 파서 돌아가면서 튕기기, 아니면 방독면 쓰고 동시에 방귀 폭탄 던지기 같은 걸 했을 것이다.
‘방귀 폭탄 같은 건 제조하면 간단하긴 한데.’
하지만 무려 고대 때부터 파라오 여왕의 인형을 해온 그녀다. 중세 때에는 이미 인형계에서 공녀였고 말이다. 그런 레이디가 절대 더러운 행동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마 속삭이자마자 꺅, 무례한! 같은 반응을 보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체 무슨 복수를 할까 하고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몰랑이씨의 흔적을 찾아와.”
“응?!”
“못 들었니? 너 어쩌다 이렇게 사기 당했니? 너 그거 때문에 대악마 후보에서 탈락한 거 알지? 딸기님과 집안 반대 무릅쓰고 혼인 신고서까지 올렸는데 이게 무슨 일이니. 이번에 돌아간 몰랑이씨의 업적을 일단 다 정리해서 일대기를 써줘.”
“……호오박? 지금 들은 게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 분의 라이벌 되는 나보고 그런 일을 하란 말인가?”
“싫어? 하, 아님 지금 38,900원 패키지를 몰랑이씨에게도 팔아서 찔렸냐? 그걸 보면 더욱 더 해야 하지 않을까?”
“앗, 아니이……그거야, 그렇지만서도오…….”
호박씨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복수의 신들이 이때다 싶어 한쪽 다리로 쾅쾅하고 발구르기를 했다. 죄다 인형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다들 원수를 노려보고 있는 인간들의 형상이었다.
“큭큭, 속죄해. 다시 대악마의 위치를 노리려면. 우린 너희 부부에게 어떤 게 최대의 복수일지를 논의했어. 그러다가……원수의 업적을 기리는 책을 내게 하면 그걸로도 나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단다. 그래. 너, 당장 죽어. 죽어 없어질 게 아니면 평생 비웃었던 우리 남편을 평생 기려! 그리고, 그 망할 놈의 진범 잡아. 실시!”
딸기님의 고개가 거기까지 듣는 순간 부들부들 떨렸다. 왜냐하면 웃겨서. 부부인데도 이건 참을 수 없는 쾌감이었다. 모욕과 비웃음 그 이상의 복수. 그래, 내가 원한 건 바로 이거야. 희대의 라이벌이라는 건 희대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끔은 남들이 봤을 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나에게 감히 말로 꼬드겨서 38,900원짜리 패키지를 팔자고 했겠다. 넘어간 나도 잘못이지만, 진짜 나쁘긴 했어. 이미 농산물을 어마어마하게 사들여서는. 새꺄, 속죄해라.’
그리고 딸기님과 호박씨는 부부이면서도 라이벌이었다.
그래서 호박씨와 딸기님은 여기서 한동안 갈라지기로 했다. 당분간은 서로 잠잘 때 집에서만 만나는 걸로. 안 그래도 무명씨의 맨션에서 생활하는 동안 인간계에서는 볼 수 없는 사이었다. 무명씨의 동생이 수박씨와 딸기님을 갖기로 했기 때문이다.
호박씨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