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계 이야기
“호오~박. 이만 헤어지자, 감감이님.”
“네. 저어……”
“음?”
“한 번만 지성의 신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왜?”
“그냥. 감사해서요.”
고개를 꾸벅 하며 돌아선 감감이는 몰랑이씨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알려줘서 고맙다며 신님 하고는 사라졌다. 호박씨로서는 조금 묘한 기분이었다.
한편, 귀요미는 레인님에게 전화를 걸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네에?! 어머니도 조만간 지구별로 가신다고요?”
“음. 응. 그렇게 됐단다.”
“하지만! 호박씨와 딸기님께 일대기 임무를 맡기셨잖아요! 그건 어떡할 거에욥!!!”
8ㅅ8. ㅇㅅㅠ
인간계에서 유행하는 이모티콘은 많았다. 하지만 딱 저런 모양이 된 귀요미는 눈물을 눈에 글썽글썽 맺은 채 어머니를 만류하고 있었다.
“저 아버지도 어머니도 가면 못 살아요! 저 진짜로 화낼 거에요!”
쾅!
뚜, 뚜-
철문을 박차고 나선 소리가 들렸다. 계단 층계참에서 대화를 했나보다. 그러나 레인은 말년에 둔 귀여운 양아들의 말에도 뜻을 꺾지 않았다. 언젠가는 인간이 되어서 자신의 복수와 사랑을 이뤄야만 했다.
“레인님, 정말 가셔야만 합니까?”
“응. 그렇지만 당장은 아니야. 난 호박씨와 딸기님이 얼마나, 아니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 더 나아가서 인형계의 모두가 그 사람을 이해해주길 바라. 너무나 외로웠던 나의 아르웬을.”
정말로 아픔에 공감한다면, 정말로 사랑할 수 있으리.
몰랑이씨는 기사 오웬과 레이니 부인과 관련된 사건으로 그런 생각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에 이 노래를 남기고는 레인에게 볼뽀뽀를 했다.
「영원의 사랑은 눈과 같다.
영원의 비가 와 나를 적신다.
이곳의 시간은 강과 같아.
나를, 나를 적시고 메운다.
영원의 사랑은 바람 같다.
고통의 비가 와 나를 적시네.
산천과 들판이 메마르고.
나를, 나를 스쳐 지나가네에-
어이야, 어이야.
어이어이야.
그대 가슴에 남은 꽃 한 줄기
어이야, 어이야.
어이어이야.
내 눈에 비친 그 꽃 한 송이」
어머니의 학대와 질시에 지친 레인에게 매일 건네져 오던 그 꽃 한송이가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리아네스는 창문을 열어 지금 막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를 지켜 봤다.
그녀의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 나나님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녀는 몰랑이씨의 친한 친구이자 평생을 그의 동료였던 사라와 결혼한 현대 악마신의 신도 중 하나였다. 하루 종일 레인이 우울해하는 것 같아 찾아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수화기의 목소리처럼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뭔가 전환이 필요했다. 그녀는 화난 귀요미와 친한 고미고미를 만나러 가자고 했다. 고미고미는 귀요미와 같은 팬시점의 비슷한 생김새의 곰인형이었다. 색이 약간 짙은 고동색인 것 이외에는 훨씬 더 여우 같이 생긴 귀여운 면모가 있었다.
레인은 봄비를 보며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 친구인 나나님과 함께 나가기로 결정했다. 나나님은 팔로 휠체어를 밀면서 레인을 올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그 날 이후로 무명씨는 괜찮아진 거 같아?”
“악! 그 녀석 생각 하지 마! 네 다리를 찢어놨잖아!”
인형 주인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녀석. 하지만 죄업이 깊은 자라 영적인 청력으로 인간계 신들의 괴롭힘을 받고 우울함으로 떨어진 인간. 그리하여 울다가 원한이 올라와서 결국 좋아하던 인형들을 파괴하고 말았다.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이제 막 인형들이 좋아서 수집하고 곁에 두던 터였다.
또 5년 동안이나 몰랑이씨를 베개 겸 바디필로우로 쓰면서 사랑을 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파괴할 수 있지? 인형신들은 인간계의 신들을 역겹다고 별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자신들과 인간들은 별반 다를 것이 없구나를 절실하게 느꼈다. 그들도 범죄자를 다룰 때 이렇게 다루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더라도 기물파손에 자해해서 커터칼로 팔을 그을 정도는 너무했다. 게다가 머리를 너무 제 손으로 때려서 뇌도 기억력이 한참 감퇴 되었던가. 아무래도 인간들은 잔혹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다. 그들로서는 자신의 주인인 무명씨의 건강 또한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무명씨는 가야만 해. 곧 죽어야만 한단 말이야.”
사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다고 하긴 했다. 그러나 인형신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순진해 빠진 무명씨를 손바닥 뒤집듯 몇 번이나 속여먹은 건 인간계의 신들이 아닌 그들을 연기한 이들이라는 걸. 그래서 항상 그들은 넌 죽어야 하는데 왜 죽을 준비를 하지 않냐고 했다.
“신생아의 3생운을 빼앗다니, 그것도 연애운을. 물론 이건 확실하지 않아. 진짠지 아닌지도. 일단 그건 나빠. 본인도 자신이 도둑이라는 자의식이 없이 그랬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그런거긴 한데 되돌려달라고 할 때 거부한 건 악질이지. 그렇지만……그렇다고 해서 왜 우리가 피해를 입어야 하느냔 말이야.”
“어쩔 수 없어. 인형이 좋아서 우리와 인연이 닿은 거니까. 그림의 신은 그림으로서 사랑과 이해와 처벌을 주어야만 해.”
레인님은 나나님의 휠체어를 밀면서 투덜대고 있었다.
“그 인간계의 신들도 그래. 우리가 나중에 될 수도 있는 이들이라지만, 어떻게 이렇게 일을 꼬울 수 있지? 무명씨는 정말 많은 벌을 받아. 상상도 못할 벌들이야. 그 연애운을 자기도 모르게 다 써서 결혼운과 취직운 그 외 모든 운과 기운으로 다 납부해야 한다잖아.”
“전생의 무명씨는 듣기로는 완전히 잘못 부모님들이 잘못했다던데, 그건 뭐야?”
“그건 연기래. 어휴."
"한숨은 쉬지 마."
나나님은 무명씨의 손에 버려져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다리가 끊어져 너무나 아파와 눈물을 철철 흘렸다. 그런데도 인형계로 인도되어 재탄생을 위한 재활운동을 하고 있었다.
“좋은 환경과 좋은 성격, 좋은 본질까지. 그 모든 게 있었다면 그 사람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겠지.”
“그렇게 따지자면 뭐든 다 문제야.”
“그건 그렇겠지만……무명씨도 언젠가는 갱생될 수 있다는 걸 믿어야 한다고 난 생각해.”
“그래. 우리 같은 처벌자들은 다르지만 말이야.”
나나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래서 레인님은. 난 언젠가 범죄자 갱생하는 신이 되고 싶어.”
“음, 갑자기?!”
레인님은 살짝 놀라며 나나님에게 물었다. 온몸이 녹색 개구리 인형에 분홍색 후드티가 입혀진 키링인 그는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듣기로는 보살님들이 그렇다고 들었는데 난 서양신과 주로 인연이 있는 터라 어떤 분을 목표로 삼아야 할지 모르겠어.”
“그렇구나.”
“레인님은 어때?”
투명한 녹빛 머리카락에 새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본다. 가끔 그의 직감은 무시무시할 때가 있었다. 이대로 가 버리려는 것은 둘째치고 그녀가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눈치채버렸다.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존재로서 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 고로 죽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냥 죽고 환생하는 것이 아닌 완전한 사라짐. 나나님은 그것을 모든 이가 종종 열망하지만 최근 무명씨에게서 봤던 것을 알고 있었다.
“나? 난……”
“어떤 인간이 되고 싶다던가. 솜사탕 구름맛 별이 초신성이 되어 흩어지면, 너도 인간이 될 거잖아?”
“글세,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난 그저 몰랑이씨를 만나고 싶어. 어떤 인간이 되도 좋아. 이 마음을 알겠니?”
“나 또한 사라님이 있으니까 알 수 있어. 하지만 너무 힘들면 가끔은 다른 생각을 해도 돼.”
“그래. 알아줘서 고마워.”
나나님과 사라님은 정말로 좋은 커플이었다. 그들은 레인님과 몰랑이씨와는 다르게, 호박씨와 딸기님과는 다르게 그들은 정말로 잔잔하기는 개뿔. 앞선 두 커플과는 다른 의미로 절박한 커플이었다. 생사의 고비를 두 커플은 너무 많이 겪어봤다. 그런데 악마신의 신도와 건강과 질병의 여신인 사라님은 사라님만 항상 먼저 떠나곤 했다.
그래서 나나님은 남겨진 사람들의 아픔과 외로움을 알았다. 절절히 알았다. 남 같았으면 이제는 어쩔 수가 없구나, 하면서 철저히 외면하고 침묵을 지켰을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예의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친구. 오랫동안 함께 해온 터라 끼어들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어떻게 말해도 지금 공허할 것을 안다. 그래도 무슨 말이라도 하면서 곁을 지켜주어야만 했다. 이 상실감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언제나 가슴 속에 있을 것을 안다. 레인이 말했다.
“그 때 내가 지켜주어야 했어.”
“무슨 소리야?”
“몰랑이씨가 기사 오웬 때문에, 내 어머니 때문에 누명을 받았을 때 말이야.”
“아, 그 때 살해 누명을 받았었지.”
나나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뭐라고 할 수 없었어.”
레인은 떠올렸다. 우리가 함께 해온 그 때를.
「공녀님! 여기에요, 몰랑! 수국화 꽃밭이 정말 아름다워요!」
두 사람은 매일 비가 오는 날 탑에서 만났다. 그리고 그 후에도 항상 붙어다녔다. 오웬이 수상하다는 듯 눈치를 줬지만, 아르웬은 아리아네스를 결코 배신하는 적이 없었다. 제 아무리 일정이 있어도 어떻게든 공녀가 부르면 기사의 종자는 달려왔다. 함께 수국화 꽃밭에 간 적을 잊지 않는다. 꽃을 매번 한 송이만 주다가 한 아름 따다 줄 수 있어서 행복하다니.
레인은 수줍게 웃던 곰인형, 갈색 머리의 녹빛 눈동자의 소년을 잊지 못한다. 그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언제나 소녀 시절로 돌아가곤 했다.
널 잊지 못하는데.
나 널 놓을 생각이 없었는데.
우리는 왜 그런 관계여서 이렇게 떠났니.
수국화를 두 팔 가득 안고서 행복하다는 듯 서 있는 넌 지금도 떠올라.
레인은 눈을 감고 있다 느리게 떴다. 나나님이 말했다.
“내 말은 무지 직설적이니까 그걸 참고해줘. 넌 모든 걸 함께 해왔어. 처음부터 지금껏. 그 아이와 함께. 그거면 된다고 생각해.”
“나나. 그건 사라에게 너 또한 마찬가지야.”
나나님이 부드럽게 웃었다. 매번 온갖 암과 성병, 희귀난치병에 걸려 죽어가던 사라를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녀의 외모는 항상 흉했다. 뒤늦게 만나서 그들은 매번 운명을 원망하며 눈물만 뚝뚝 흘리다 헤어졌다.
곱던 머리카락도 한 줌씩 빠지고, 피부에 자꾸만 멍이 드는 등…. 왜 하필 건강과 질병의 여신의 길이냐며 나나님은 항의했다. 사라님의 가치관을 존중해야 했지만, 너무도 이런 기억들이 저주스러워 그만 그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는 모든 아픈 사람들은 치료해주고 싶어. 아픈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어. 때로는 질병을 내려서 모든 걸 없애고, 죽여야 한다는 것도 알아. 그렇지만 나는…….”
사라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지금도 몸 속의 고통이 격해서 마취를 하고, 그에게 말했다.
“처음 한 맹세가 이런 거였는데, 어떡해. 이제 와서 길을 바꿔도 된다는 걸 알아. 하지만 뜻을 꺾으면 다른 사람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야. 알잖아? 나는 이제 죽고 싶어. 동시에 살고 싶기도 해. 나는 미래에 훌륭한 여신이 될 거야. 그러니까 나를 이해해줘.”
사라가 말했다.
“아마 나보다 몰랑이씨는 더 괴로울 거야. 넌 그 분을 아니? 난 그 분을 만나고나서야 구원을 받았어. 노래를 아주 잘 부르는 곰인형이신데 말이야, 너도 들어볼래?”
레인님과 몰랑이씨를 알게 된 것은 그 때였다. 병원에서 테이프를 소중히 들으면서 알게 된 인연. 그 뒤 그들은 환생해서 만나자마자 몰랑이씨 콘서트에 갔다. 가서 팬사인회도 가고, 몰몰랑 소리를 들으며 손을 잡고 얘기하고, 사라님이 건강과 질병의 여신이라는 걸 알고는 깜짝 놀라 더 잘해주려는 걸 볼 때는 마음 한 구석에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인연이었다. 그래서 좀 궁금했다.
“있잖아, 레인. 몰랑이씨는 예술의 신이 되기 전에 어떤 신이었던 거야?”
“응? 그러고 보니……안 말했나.”
“응. 우리는 비교적 신이 근대에 됐잖아. 너희는 중세에 만나서 신이 된 인연이고.”
“그건 그래. 하지만 몰랑이씨의 기억으로는 고대에도 신이었던 거 같아.”
“뭐?!”
그러니까 힘들었지.
나나님의 뇌리에 한 가지 의문과 답변이 스쳐 갔다.
몰랑이씨는 고대에 어떤 신을 처음한 걸까? 그는 아마 음악의 신을 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