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랑이씨의 연대기
“강등된 건 우리 모두 불운이라고만 여겼다.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은….”
여기서는 슬프게 보여야만 했다. 실제로도 충격받았지만, 감감이님에게는 더 그렇게 보여야만 했다. 그래야 다음에 정보를 더 잘 주지. 그리고 그녀는 예상했던대로 정확히 그 포인트를 찌르고 들어왔다.
“앗, 죄송합니다. 너무 충격적인 정보였죠?”
“호박, 괜찮다. 수년을 라이벌이자 친구 먹었던 녀석이 그렇게 되다니. 안쓰러워서 그런다, 호박.”
“하지만 대체 누굴 해친 건지 모르겠습니다. 호박씨는 아십니까?”
“아니, 나도 모른다. 다만 그 녀석이 그랬으면 진짜 그럴만 할 사람일 거다.”
호박씨의 표정이 냉담해졌다. 아무리 인형 모습을 하고 있어도 인형들은 미간에 있는 영적인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탱탱소에서 팔던 감인형은 푹신푹신하고 부들부들했다. 그러나 금발에 근육질 체질인 건강 미녀가 본래 모습인 그녀는 지금 정색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몰랑이씨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같은 원수를 찾았다며 마음속으로 칼을 갈았다. 마피아보다도 독한 놈들이 군인이었다. 호박씨는 여기까지 하고는 입을 열었다.
“실은 난 몰랑이씨가 어떤 사람을 해쳤는지 알 것 같아.”
“네? 누군데요?!”
“기사 오웬이라고 있다.”
오웬 트리알. 별 거 없는 중세의 기사 인형이었다. 그러나 몰랑이씨는 그의 아래에서 자랐다고 한다. 어제 딸기님에게 물어본 정보가 아니었다. 몰랑이씨와 호박씨는 이래 보여도 꽤 긴밀한 사이라, 술을 먹으면서 많은 날들을 함께 하고 과거를 밝혔다.
“오웬이요?”
“호오~박! 아이구, 우리 감감이님이 너무 부들거리네! 귀엽다, 감감이.”
“으아악! 누르지 마십시오. 뒷머리 눌립니다!”
“쭉쭉 늘리면 또 늘어나구~”
호박씨는 여기까지 정보를 누설하기로 하고는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 먹었다. 카페 안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감이님을 놀리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자리를 옮길까?”
“아, 넵!”
유독 감감이님의 목청이 커서이기도 했다. 둘은 더 조용하고 한적한 공원으로 가기로 했다. 날씨가 좋은 봄이라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옛날 옛적에 말이야.”
호박씨는 레인님과 몰랑이씨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들은 것은 단편적인 부분이었지만, 보다 확실했다. 베르베르씨의 과거까지 나오자, 점점 감감이님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해갔다.
“뭔가 상당히 불안한데요.”
“그래도 들어봐. 두 사람의 과거는 생각보다 귀엽거든.”
호박씨는 빙긋 미소지었다.
J열 칸의 문 아래로 떨어진 후, 의식을 되찾은 아르웬은 레인이란 공녀님을 만났다. 공녀님은 허리까지 하늘색 물빛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었다. 눈동자도 아름다운 달빛이었다. 지금은 소녀지만, 어른이 된다면 누구보다 아름다운 인형이 되리라.
아르웬은 순간 그 외양에 빠져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딱!
“대답, 안 하니?”
“헉! 죄, 죄송합니다!”
빤히 보고 있던 죄로 따귀가 돌아왔다. 그 행동에 공녀님의 성격이 괴팍하다는 소문이 진짜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러나 이런 걸로 포기할 정도였으면 도서관까지 오지는 않았으리라. 아르웬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자세를 바로 했다.
“안녕, 몰랑이.”
“아, 안녕하세요. 레인님.”
“그렇지. 날 그렇게 불러줘.”
“네! 그런데……왜 절 여기로 부르신 건지요?”
“그냥. 널 보고 싶어서, 겸사겸사 비를 구경하는 동료도 만들겸.”
실은 레인의 마음은 이상한 놈이면 단번에 처벌할 겸이라는 말도 숨겨져 있었다. 지금 이 저택의 지하실방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기사 2명이 함께해 있었다.
“긴장 풀지 마. 등 뒤의 이 분들은 내 심복이야. 잘해.”
“넵!”
“그렇다고 너무 쫄지는 말고.”
“몰, 몰랑?”
인간 모습이 드러났다는 것을 눈치채자 그는 깜짝 놀라서 얼른 퐁, 하고는 인형으로 의태했다. 모른 채 하는 게 뻔히 보였으나 레인은 피식 비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이곳은 저택의 지하실방. 레인의 또다른 아지트이기도 했다.
“그래, 너 내 수족이 되어주겠니?”
“네?! 수족이요?”
“응. 넌 날 좋아하잖니. 매일 장미도 보내주고. 편지는…어머니의 기사들이 매번 찢어버렸지만.”
“아…….”
“이미 어머니가 눈치 챘어. 어쩔거니. 조심 좀 하지 그랬어.”
편지에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공작가에서 살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가 적혀있었기에망정이지, 더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면 정말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버렸을 지도 모른다고 레인님이 말했다.
“하지만, 난 어머니의 기사와는 다르게 내 수족이 필요해. 그 기사 오웬은 아버지의 수족이야. 내 시녀, 내 기사가 되어야 해. 넌 심복이 된다면 그런 걸 해야 할 거야. 여장까지도. 내 명령이라면 절대 복종 해야 해. 할 수 있겠니?”
요는 은혜를 갚아라였다. 아르웬으로서는 선망하는 공녀님이고, 사랑을 이루겠다! 같은 목적은 따로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해와도 좀 무서울 뿐이지 딱히 거절하고 싶은 욕망은 들지 않았다.
그 땐 나름 순진했다.
그래서 수락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 무섭고 치명적인 요구를.
아르웬은 말했다.
“네. 보답할게요. 공녀님의 수족이 되겠습니다. 공녀님이 가시는 어디라도 함께 갈 거에요. 저 그걸 위해서라면 기사 시험도 진짜 많이 준비해서 꼭 공녀님께!”
“아리아네스.”
“네?”
“아리아네스라고. 내 이름. 줄여서 아리아라고 불러.”
노래를 뜻하는 단어 Aria. 레인님의 본명은 그 단어가 들어가 있다고 했다. 아리아네스는 자신의 심복이 되기로 했으니 한쪽 무릎을 꿇고 맹세를 하라고 했다. 그것은 기사 서임 때의 맹세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동경인지, 선망인지, 사랑인지도 모른 채로.
“자, 그럼 이제 나와 얘기해.”
“네?”
“이쪽에 있는 기사들을 소개해줄게. 왼쪽의 복면을 두른 분은 파웰 스트라이커. 오른쪽의 복대를 한 분은 에리얼 룬드. 여긴 시녀들이야. 네 편지를 가져다 준 미리엘. 알트리가 가문의 둘째고, 백작 가문의 여식이야. 그리고 이 옆에는 나릴. 얘는 남작 가문의 첫째 아이야. 글솜씨와 머리가 상당해서 곁에 오래 두고 있어. 이 중 어머니가 내게 붙여준 사람들은 아무도 없어.”
“아, 안녕하세요. 몰랑.”
“귀엽구나. 말버릇이. 나는 공녀라 그런 건 뗀 지 오래야. 하지만, 넌 폭신폭신해 보이는 곰인형이니까 어울리네. 그래, 넌 이제부터 내 꺼야. 그러니 비를 구경할 때에도, 내가 공부를 할 때에도, 뭘 할 때에도 항상 함께 다녀야 해. 오웬에게는 파웰이 잘 말해둘 거야.”
“알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함께 침대에 눕자.”
“네?! 왜, 왜요?”
“응? 쉬자는 뜻인데. 뭘 생각하는 거니?”
냉정한 얼굴로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 아리아네스는 아르웬을 이끌고 좁은 지하실 방 안 침대 위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자신은 비에 대한 추억이 있는데, 아버지가 어릴 적 어느 날 빗속에서 납치당한 자신을 구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 땐 말이지, 너무 추웠어. 추워서 죽을 지경이었어.”
시야가 조각나고 있었다. 실금이 가고, 점점 까맣게 변해가는 가운데 그녀는 마침내 수색대속에 있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 품만 생각하면 더없이 따스했다. 어머니와는 상대적으로 사이가 안 좋은 터라 에이베르 가문의 명예를 더럽힐 뻔했다는 말만 들었다. 그러나 그런 모욕적인 말 틈에서도, 레인의 아버지이자 공작인 쿠르스는 따뜻하게 맞아주고, 전체적으로 가신들의 눌렸던 사기를 높였다.
얼마 전 영지전이 끝난 참이었다. 이런 수상한 사건이 일어나다니, 방조해서는 안된다며 쿠르스는 레인을 찾아낸 신하들을 치하하고 그녀를 돌봤다. 셋째 딸인 그녀가 그렇게 되자, 레니아 공작부인은 이를 잡듯이 샅샅이 뒤져야 한다며 범인 수색을 명했다. 정작 자신의 딸인 레인은 방에 납치되지 않도록 가둬두라고 명령하고 말이다.
언니들이 물었다.
“안됐네.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너, 어머니에게서도 버림 받았구나?”
“여기서 오래 못 살아, 얘. 어쩔 거야?”
아리아네스가 아르웬을 자신의 심복으로 삼고자 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레인의 어머니는 쿠르의 첩 중 하나로, 레니아의 시녀 중 하나였다. 그러니 레니아가 이를 갈 이유는 충분했다.
쇄골쯤을 쿡쿡 손가락으로 눌리며 협박을 참아내야 했다. 그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루, 이틀을 지나면서 답답함은 커져 갔다. 그래서 레인은 비가 올 때마다 탑 1층에 가 창밖을 들여다 봤다. 그렇게 하염없이 빗속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 답답한 곳에서 누군가 자신을 구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게 없고, 실은 자신만이 자신을 구해야 한단 걸 알아도.
바로 그럴 때 아르웬이 나타났다. 매일 자신에게 의문의 편지와 꽃이 전해져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에 납치당했던 이력이 있는 그녀였기에 의심해서 버리라고 하긴 했다. 그러나 그의 근성이 이겼던 걸까? 시녀들마저 버리려다 읽어보곤 삐뚤빼뚤한 글씨에 웃겨서 갔다 놓은 건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렇게 된 고로 아리아네스는 아르웬에게 자신의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설명해주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홍차부터, 자주 가는 장소, 음식, 취향, 곁에 두는 사람 등 모든 것들을.
마치 배신하면 죽여버리겠다는 듯이.
아르웬은 그것들을 모두 차분하게 듣고 있었다. 사실 이곳에 오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이렇게 될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부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아하는 아가씨의 모든 것을 다. 그리고 여태껏 자신이 살아온 얘기 또한 다 했다.
하나 밖에 없는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기사 오웬이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해 종자로 삼게 된 이야기, 그렇게 에이베르 성에 오게 되어 일을 하며 발견한 레인의 이야기, 덤으로 베르베르와 친한 하녀들과 동네 아이들까지.
두 인형은 그렇게 자기 소개를 마쳤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온 세상이 뒤바뀌어 있었다.
“후, 여기까지. 내가 아는 두 사람의 과거는 딱 이 정도야.”
“감감이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레이니 공작 부인과 오웬 기사의 정황이 좀 수상하다고는 느끼네요.”
“그렇지?”
호박씨는 감감이를 인터뷰하려다 되려 자기가 하고픈 말만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로서도 속이 답답했다. 때문에 하소연처럼 말을 풀게 됐다. 그런 그에게 속을 안다는 듯이 그녀가 말했다.
“호박씨, 예전에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죠. 몰랑이씨는 언젠가 우리를 떠나갈 거라고. 그 말이 아주 전부터 사실이었다면…….”
“아주 전?”
“네. 그렇잖아요. 당장 레이니 공작 부인과 오웬 기사가 원수 지간일 지도 몰라요. 그 사람들이 몰랑이씨가 해친 사람들이라면, 신으로서의 강등은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요. 이상한 사람들이 그런 거일 수 있어도, 그래도 그들 또한 인형이니까요.”
“그렇지. 하지만 아직 기정 사실은 아니야. 몰랑이씨는 우주를 떠나 인간계로 가버렸고, 우리는 그의 흔적만 찾고 있으니 말이다, 호박.”
“그렇죠, 감감.”
감감이와의 인터뷰에서 아주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대통령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예전 몰랑이씨가 해쳐서 신에서 강등된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기사 오웬과 레이니 공작 부인과 연관되어 있다.
여기까지 말하고 호박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소설은 72화까지만 쓰여져 있습니다.
이후는 휴재입니다. 봐주시는 분들께 감사함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