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팅힐 영화에서 들었던 말을 버스에서 직접 들었을 때

먼 나라의 미술관으로 떠나는 에세이를 읽었다. 작가는 이국땅의 낯선 그림 앞에 서서 마음 어딘가에 뭉쳐 던져두었던 감정을 깊이 들여다본다. 나도 책 속의 그림들을 빨리 넘기지 않고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림이 건네는 말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꼭 필요한 일인 것 같다. 마음이 한결 개운해졌다.


책에서 또 인상적이었던 건 여행 중 만난 현지인의 모습과 그들과 나눈 대화였다. 읽다 보니 지난 영국 여행에서 마주친 사람들과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여행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봤지만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사람이다.


첫 번째는 버스 안에서 만난 할머니다. 우리는 버스에 타면 늘 2층 앞자리로 서둘러 올라갔다. 거기 앉아 런던 시내를 구경하는 건 그 자체로 근사한 여행 코스였다. 하지만 여행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우리도 굳이 2층에 오르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은 한 할머니가 커다란 장바구니를 들고 버스에 타셨다. 버스가 출발하자 할머니는 순간 휘청하더니 "Whoopsidaisies!" 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이 말은 한국어로 '에구머니나'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


영화 <노팅힐>에서 휴 그랜트가 담장을 넘으려다 떨어지자 "웁시데이지스"라고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줄리아 로버츠는 그 말을 듣고 할머니들이 쓰는 말이라고 그를 놀린다. 그 말을 런던 시내 버스에서 진짜 영국 할머니 입에서 나오는 걸 직접 듣자,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정말 내가 영국에 있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두 번째는 지하철에서 본 젊은 남자다. 빨간 양말에 말끔하게 슈트를 갖춰 입은 젊은 남자가 지하철에 탔다. 지하철 안에는 노선표 앞에서 계속 갸우뚱거리는 라틴계 할머니가 있었다. 남자는 그녀를 보고 망설임 없이 다가가 목적지를 묻고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었다. 할머니는 고맙다고 하며 자리에 앉았지만, 몇 정거장 지나 다시 노선표 앞에서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자 남자는 그녀에게 손가락 두 개를 펴고 "두 정거장 남았어요." 하고 말해 주었다. 마침내 할머니가 내릴 역에 도착했을 때, 그는 다시 한번 "이제 내리시면 돼요." 하고 환하게 웃으며 알려주었다.

내가 상상하던 바로 그 영국 신사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는 빨간 양말을 멋스럽게 소화하는 세련된 젊은이였지만 자기 멋만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매너와 친절함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 번째는 음악회에서 만난 할머니였다. PROMS 음악 축제를 보러 로얄 알버트홀에 갔을 때 아이 옆에 노부부가 앉았다. 영국 할머니는 공연 전 아이에게 계속 말을 걸며 스몰토크를 이어갔다. 할머니는 이 음악회와 공연장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해주며 “이렇게 좋은 자리에서 공연을 본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며 이 시간이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말씀해주셨다.


아이는 친절한 영국 할머니에게 모범적인 K 어린이의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는지 줄곧 바른 자세로 공연에 몰두했다. 공연이 끝나고 아이는 할머니께 꾸벅 인사를 했고, 할머니는 음악과 함께 한 우리의 여행을 축복해주었다. 할머니와의 따뜻한 대화 덕분에 우리 가족은 음악이 전해주는 감동을 더 크게 간직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해리포터 스튜디오에 갔다가 돌아오는 열차에서 만난 중년 부부다. 그때 아이는 여행 중 구입한 하늘색 맨체스터 시티 FC(프리미어리그)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걸 본 옆자리 아주머니는 아저씨에게 “너의 친구가 왔어”라고 웃으며 알려주었다. 아저씨는 너무나 반갑게 자신도 맨시티 팬이라며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배경화면에 있는 맨시티 엠블럼을 보여주기도 하고, 직접 맨시티 경기장에 가서 찍은 사진과 골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여주었다. 아저씨는 자신이 직관한 경기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신이 나서 열심히 말했다.


그런데 아이는 대화를 적극적으로 이어나가지 않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자기는 맨시티보다는 토트넘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이가 시큰둥하니 내가 나서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열차에는 사람이 많았고 순간 내 부족한 영어 실력이 드러날까 봐 말을 아끼고 미소만 지었다. 그것이 두고두고 후회된다. 그때 현지인과 좀 더 소통했더라면 그 순간 내가 느낄 수 있었던 여행의 깊이가 또 달랐을텐데. 현지의 정보와 감정들이 오갈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게 아쉽다. 언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용기 있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뒤늦게야 깨닫는다.


다음 여행에서는 두려워하지 않고 현지 사람들과 소통하며 여행을 나만의 방식으로 만들어가고 싶다. 대부분의 현지인은 자기 나라에 관심을 갖고 먼 나라에서 찾아온 여행자를 기꺼이 환대하며, 그곳의 숨은 이야기들을 나누어주고 싶어한다. 그리고 한국이란 나라에서 온 나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한다. 영국에서 만난 사람들의 눈빛 역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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