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여행의 마지막 날, 오래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보수동 책방골목을 방문했다. 마지막 날 간 건 책 쇼핑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였다. 여행 초반에 가면 책을 계속 들고 다녀야 하니 짐이 될 것 같아 원하는 만큼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부산역에서 가깝다. 부산역 짐보관소에 여행 가방을 맡기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갔다. 버스를 5분 정도 타니 ‘보수동 책방골목’이란 정류장에 도착했다. 부산이 좋은 건 이런 책방골목이 지켜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이 도시에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 아닐까.
보수동 책방골목을 걷다 보니 이곳은 책을 사고파는 곳을 넘어 미지의 세계로 탐험을 하는 느낌을 주는 장소였다. 골목에 쭉 늘어선 서점에 들어설 때마다 뭔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아이도 그런 기분을 느낀 듯했다. 보물을 찾듯 무척 즐거워했다.
책방골목에 가기 전 나는 먼저 목표를 세웠다. 지난달 한병철의 <생각의 음조>를 읽었는데 책에 파울 첼란의 ‘스트렛토’ 시가 소개되었다. 파울 첼란의 시는 처음 접했는데 시에 담겨있는 희망의 메시지가 마음에 와 닿아 그의 시를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책방골목에서 파울 첼란의 시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또한 <체호프의 문장들>을 읽고 매력을 느꼈던 안톤 체호프의 소설도 사고 싶었다. 가필드 매니아인 아이는 자기가 미처 읽지 못한 가필드 만화책이 있을 거라며 샅샅이 뒤져보겠다고 했다.
작은 가게에 책을 여기저기 높게 쌓아놓고 파는 모습을 보니 학창 시절 수원 남문에 있던 할인 서점 대지서점이 생각났다. 고등학교 때 학기 초가 되면 친구들과 함께 그 서점에 가서 문제집을 잔뜩 사오곤 했다. 그리고는 서점 근처의 무한 피자 뷔페에 가서 교복 치마 단추를 하나 풀고 배불리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곳에 오니 나의 정겨운 서점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서점에서 쌓여있는 오래된 책 제목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어릴 적 엄마가 전집으로 사주었던 계몽사 세계문학, 일요일 낮마다 빼놓지 않고 보았던 영심이 만화, 초등학교 때 썼던 산수, 자연 교과서, 그리고 친정 아빠가 학창 시절 보낸 글이 실렸다고 하던 ‘여학생’ 잡지까지. 이곳에 다 있었다.
여기서도 새 책을 팔고 있었다. 작년 노벨상을 받았던 한강의 책들이었다. 한강의 새 책은 10%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나는 파울 첼란 시집 찾기에는 실패했지만 체호프의 책은 손에 쥐었다. 상태 좋은 민음사의 <체호프의 단편선>을 3천원에 구입했다.
아이는 끝내 가필드 책은 찾지 못했지만 다른 책을 여러 권 샀다. 내심 안 샀으면 하는 책도 있었지만 원하는 걸 전부 사주었다. 가격이 저렴하니 이곳에서만큼은 아이의 취향을 맘껏 존중해주고 싶었다. 책 사는 재미를 알아야 책 읽는 즐거움도 느끼는 법이니까.
책을 둘러보던 아이에게 책방 아저씨는 나이를 물어보더니 이제 곧 6학년이 되면 이런 책들이 좋다면서, 아이에게 맞는 필독서를 좌르륵 보여주셨다. 교사인 내가 봐도 서점 아저씨는 연령에 맞는 좋은 책을 정확히 파악하고 계셔서 신뢰가 갔다. 아쉽게도 아이는 그 책 중에서 고르지는 않았다.
아이는 <창문 넘어 도방친 100세 노인>도 골랐다.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책으로 꽤 두꺼운 책인데 선뜻 사겠다고 했다. 의아해 물어봤더니 얼마 전 기자 수업을 들었을 때 선생님이 소개해주셨는데 재밌어 보였다고 한다. 방학 때 교과 학원 안 보내고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기자단 프로그램을 보냈는데 아이는 그 수업을 어렵지만 재밌다고 했다. 수업을 통해 아이가 여러모로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 같아 보였다. 아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도 그 책을 열심히 읽었다.
책방골목에서 나는 LP판도 샀다. 비록 집에 턴테이블은 없지만 3천 원에 팔고 있는 빌헬름 캠프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과 폴리니의 슈베르트 방랑자 음반을 놓칠 수 없었다. 이번 여행때 숙소에 턴테이블이 있어 머무는 내내 LP를 들었는데 LP가 주는 감성적인 소리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운명적으로 LP판을 샀으니 이제 턴테이블 사서 들을 생각이다.
책방골목을 나설 때쯤엔 양손에 책이 가득한 비닐 봉지가 여러 개 있었다. 아이와 나는 이 책들을 어서 빨리 읽고 싶었다. 우리는 미리 찾아둔 근처 클래식 카페 ‘나담’으로 향했다. 이곳은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 수많은 클래식 음반과 도서를 보유하고 있다.
계단에는 작곡가 사진이 담긴 액자가 쭉 놓여 있었고, 공간 곳곳에 피아노, 첼로, 작곡가 조각상 등 음악과 관련된 물건들로 장식이 되어 있다. 엔틱하고 고풍스러워 90년대 이층집 서재 같은 분위기가 났다. 요즘 카페들이 절대 가질 수 없는 이곳만의 클래식한 감성이 있었다. 의외였던 건 다들 어떻게 알고 왔는지 MZ들이 많았고, 외국인도 있었다.
카페에는 처음 듣는 오페라 아리아가 잔잔히 흘렀다. 우리는 비엔나식 크림을 섞어 마시는 카페라떼와 초코라떼를 홀짝홀짝 마시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방금 산 따끈따끈한 책을 신나게 읽었다. 기차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이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